혁명하는 여자들. 조안나 러스 외. 신혜경 역. 아작. 2016.

혁명하는 여자들. 조안나 러스 외.  신혜경 역. 아작. 2016. 


+단편선집 

sf소설선집. 페미니한 작품들이 몰려있다. 15편이 실려있는데, 그 중에 관심이 갔던 작품은 <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와 <가슴 이야기>를 흥미롭게 읽었음. 


++가슴 이야기_ 히로미 고토 

"전혀 제기되지 않은 질문들이 어저면 가장 중요한 질문들 일 것이다."(203)으로 시작하는 히로미 고토의 <가슴 이야기>는 작품 전반에 모유수유에 어려움을 겪는 주인공이 간호사, 남편, 시어머니와의 관계망 속에서 단순했던 수유의 어려움이, 모성의 어려움으로, 여성의 어려움으로, 점차 확전해나가는 줄거리다. 

출산 직후 모유수유를 하는 주인공에게 남편은 "뭐가 좀 나와?"하면서 느낌을 잘 모르겠다는 주인공을 두고 "무슨 말이야? 알 수 없다니? 네 몸이잖아, 아니야? 내 말은, 넌 분명 뭔가 느낄 수 있을꺼야."라며 압박을 가한다. 이에 간호사는 병실에 들어와 "아기를 혼자 두지" 말라며 "누구라도 그냥 쓱 들어와서 아기를 데려갈 수 있어요."라며 "12시간의 진통을 겪었고 28시간째 자지 못"하고 있는 주인공에게 말한다. 주인공은 간호사의 "그 말이 얼마나 부적절한 말인지 간호사에게 지적해줄 힘이 없"을 정도로 지쳐있다. 병원으로 시어머니가 방문해서는 "네 젖꼭지가 너무 잡작한 데다 아기가 그다지 잘 빨지를 못하네"라며 타박한다. 이제 막 출산을 마친 주인공은 "분노의 눈물이 차오른다."(204-206)

병원에서 집으로 온 주인공은 시리얼과 에너지바를 먹고 "다시 모유 수유를 시도한다. 고통은 날것이고 신선하다." 아기가 젖을 너무 빨아서 젖꼭지가 헐었다. 피가 나온다. 주인공은 걱정이 되어 친구에게 전화한다. 친구는 답해준다. "젖꼭지에 피가 맺힌 물집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 난관을 뚫고 모유 수유를 고수했다"며 떠들어댄다. 주인공은 친구의 그 "비극적인 젖꼭지 이야기를 이길 수 없다. 심지어 근처에도 못간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남편은 모유수유의 어려움을 겪는 주인공에게 "여자들은 여자들이 있었던 이래로 내내 모유 수유를 해왔어."라며 밀어붙인다. 남편은 "모유 먹는 아기들의 아빠를 위한 소책자"를 읽지도 않은채 모유수유가 인류의 여성들이 존재해왔던 이래로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쯤되면 제 정신으로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207-211) 

"대체 이 고통이 얼마나 오래갈 건지, 당신은 스스로 묻는다. 젖꼭지 고문과 모성 지옥을 겪은지 11일 째 되는 날" 주인공의 수유의 고통은 점점 더해져간다. "개처럼 누워서 아기에게 젖을 먹여보려"고 시도할 정도다. 헐어버린 젖꼭지를 바라보며 "난 그만 둘거야, 정말로. 내가 이 짓을 계속하다간 아기를 미워하게 될 것 같아."라고 항변한다. 이런 주인공에게 남편은 "아기한테는 모유 수유가 제일 좋은데, 넌 포기하겠다고, 그렇게 쉽게 말이야. 난 네가 더 강한 줄 알았어."라고 남편은 반격한다. (212-214) 

"잘 들어. 애한테 젖을 물려야 하는 사람은 나야. 당신이 코를 골며 자빠져 자는 동안 두 시간마다 일어나 젖꼭지가 찢어지고 피가 날 때까지 빨리는 건 나라고. 당신은 그 빌어먹을 도와주는 시늉이랍시고 저 썩을 기저귀 한 번 갈아주러 밤 중에 일어난 적 조차 없는데, 그래 내가 내 가슴을 뭘해야 하는지 나한테 말해 보시지 그래.(...) 그러니 그냥 입 닥치지그래. 그냥 입 닥쳐. 이 일은 너랑 상관이 없으니까 말이야. 이건 내 문제야!" (214-215) 

남편은 반격한다. "내가 젖을 먹일 수 있다면, 난 기꺼이 먹일거야!" 소설은 여기서 부터 결말을 준비한다. 주인공은 자신의 '젖'가슴을 오려 남편의 "거의 편평하고 작은 젖꼭지 위에 놓는다." 그리고 남편은 일어난다. 그는 일어나 앉아 "두 개의 비대해진 가슴을 내려다" 보며 "아 세상에"라고 신음한다. 주인공은 말한다. "걱정하지마. 다 괜찮아. 그냥 자연스럽게 닥치는 일을 하면 돼."라고 말하고 주인공은 "웃음을 짓는다. 어둑한 빛 속에서 얼굴을 빛낸다. 나는 등을 돌리고 누워 달콤하고 편안하게 잠든다." (215-217) 


++_1 

출산직후 산모는 쇼크상태다. 육체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극도의 긴장상태 이후에 절대적인 안정과 보살핌을 필요로 한다. 그런 산모는 출산을 하자마자 부터 "모성"이라는 이름이 거느리고 있는 희생과 인내를 감수해야 한다. 주인공을 둘러싼 남편의 말들이 그렇다.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나의 고통은, 참아야 하는 것. 견뎌야 하는 것으로 취급당한다. 이것은 "모성"이라는 것이 남성중심의 이데올로기속에서 여성을 어떻게 착취하고, 폭력에 노출시키고 있는지를 잘 확인 할 수 있다. 


++_2 

소설의 마지막에서 젖가슴을 남편에게 이식시켰을 때, 남편의 반응은 자신의 성기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젖가슴과 남근이 결합되는 이런 기이한 장면은 남근-남성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다. 이제, 남근-남성은 어떻게 되는가. 이 낯설과 이질적인 것과의 결합(실재와의 조우)은 남근-남성의 국면은 완전히 전환시켜 자신의 자리를 "모성"의 이데올로기 아래로 노출된다. 


++_3 

모유수유는 좋다. 아기에게 좋다. 이것이 남성중심의 가족 내에서 아기를 전적으로 돌보도록 "주부화"된 여성에게도 좋은가? 




질문 있습니다. 김현. 서랍의날씨. 2018.

질문 있습니다. 김현. 서랍의날씨. 2018. 


+어디서 보고 배웠겠습니까

<질문 있습니다>라는 글의 전문을 읽어보고 싶었는데, 계간지를 쉽게 구해서 읽을 수가 없었는데, 마침 단행본이 나왔다. 시인의 첫 작품집 <글로리홀>을 퇴근하는 버스 안에서 탐독하면서 도대체 이런 작품을 쓰는 사람은 누구일까, 어떤 삶의 서사를 가진 사람일까, 이 시인은 어디에서 세계를 조망하고 있는걸까. 궁금했었는데, 그의 산문집 <질문 있습니다>를 읽고 난 뒤, 난, 그를, 더 신뢰하게 되었다. 가령  자신이 "미쓰김"(12)이라고 불리며 수많은 남성-새끼들로 부터 "따먹히던"(13) 시절을 복기하며 "어디서 보고 배웠겠습니까"(13)를 반복하는 글의 구성은, 글쓰는 사람(작가)에 대한 신뢰가 마구마구 쌓였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군대, 그리고 문단에 널리고 널린 "씨발 새끼"(15)들은 1,2,3,4,5,6으로 이어지고 "1-1, 2-3, 3-5, 4-7, 5-9"(17)로 반복되면서 그야말로 "씨발 새끼"들의 "집"을 만들어냈다. 생각한 것 만큼 글이 길지 않은 글인데, 생각한 것 보다 더 여운이 남는 글이다. 


++선언하는 약력과 윤리로서의 약력 

"성폭력 해시태그 증언 운동을 어떤 방식으로든 기억하고 싶은 심정에서" 작가는 "페미라이터"(137)라는 이름을 쓴다고 한다. 작가는 이 "페미라이터"라는 이름을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임과 동시에 "행동/실천 양식"과 "권력을 질문하는 방법"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작가는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지면에서' 발견되는 페미라이터라는 말에 끊임없이 주눅 들길 바라며,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페미라이터라는 말 때문에 계속해서 지지받는 느낌을 받길 바란"(138)다고 한다. 작가는 "작품과 작가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한다고 하면서 "작품의 윤리는 작품이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는 "나는 작가의 윤리에 관심이 있다."(139)고 고백한다. 페미라이터라는 이름을 굳이, 고집하는 작가에게 "어디까지 갈래?"(143)라는 질문을 받는다고 한다. 사실, 위협을 느낀 쪽에서 보이는 흔한 반응 중 하나다. 어디까지 해야 성에 차겠어?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그만하고 글을 열심히 쓰라"(145)는 말을 자주 듣는다는 작가는 대답한다. 송구스럽다. 그러나 밝히고 싶다."고 대답한다. 정말 열심히 글을 쓴다는 작가는 자신의 페미라이터라는 약력을 두고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떳떳하게 밝혀 알리는 것" 그것이 약력이라고 말한다. 그 "약력에 작가의 윤리가 있다." 이 작가 읽으면 읽을 수록 신뢰가 마구마구간다. 


+++ 

1)시스젠터 헤테로 cisgender (페미위키)






김혜순 "돼지라서 괜찮아" -태어나는 돼지들을 위하여


                                                                                                          <수유너머 인문사회과학연구원 봄학기 에세이>



김혜순의 “돼지라서 괜찮아”
-태어나는 돼지들을 위하여- 

                                                                                                                                                        서한영교


1. 포르노적 부활

전 세계의 섹스심벌, 마릴린 먼로. 벌거벗은 몸으로 침대 위에 누워 엉덩이를 흔들면 남성-남근들은 마릴린 먼로가 덮고 있는 이불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듬었다. 치마 밑으로 솟구치는 바람이 되어 그를 향해서 있는 힘껏 불었다. 그가 상연한 세계로 들이닥친 남성-남근들의 탐욕으로 충만한 시선은 그를 실제보다 더 섹시하게 만들었다. 


화면같이 청결한 세상에서 살았었다고

은빛 비행기를 타고 가서

거울 속처럼 깨끗한 침대 위에

누워 이마에 손을 올렸었다고

하늘하늘 치마를 걷었었다고 하지 마라


(...)


양손에 돼지 가슴이 담긴 봉지를 든 여자가

아까부터 같은 얘기를 계속 중얼거리며 걸어가고 있다 

오줌 같은 비가 한 모금 두 모금 떨어지고 있다



 -『마릴린 먼로』부분



남성-남근은 “청결한 세상에서”, “거울 속처럼 깨끗한 침대 위에/ 누워”, “치마를 걷었던” 그를 보고 있다. 그 시선 아래에서 마릴린 먼로의 배역이 결정되고, 그 배역 속에서 마릴린 먼로는 “같은 얘기 계속 중얼 거리”게 하는 배역을 맡긴다. 남성-남근이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대답: 자기 욕망. 이 대답에 대한 라캉-지젝의 대답. 대타자에 의해 전도된 자기욕망. 즉, 도착적 시선(빛) 아래서 남성-남근이 본 것은 그들 자신의 욕망이다. 마릴린 먼로가 실제로 느꼈을 “유배지에 있는 것처럼” 느끼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며 4.5mg의 수면제 님부탈과 8mg의 안정제 바르비루투를 집어 삼켜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관해서는 보이지 않다. 마릴린 먼로는 그저 스크린 위에 있을 뿐이다. 남성-남근이 상연하고 있는 스크린 위에 그들의 환상을 위해 치마를 걷어 올리는 배역을 맡겼을 뿐이다. 마릴린 먼로는 정확하게 욕망의 원인-대상으로 자리 잡는다. 그래서 마릴린 먼로는 영원히 “청결한 세상”인 환상 스크린 속에서 “같은 얘기를 계속 중얼 거리”며 반복된다.


그리하여 최후의 배역에 철컥 달라붙는다


내가 싼 것 위에 몸을 철퍼덕 싸는 배역

영혼이 빠져나간 다음 쇠갈고리에 걸리는 배역

뭉개지며서 내가 내 혀 맛을 볼 수 있게 되는 배역



-『마릴린 먼로』부분

“청결한 세상” 속에 살고 있는 마릴린 먼로의 “최후의 배역”은 수면제를 집어삼키고 맞이한 죽음이었을까. 아니다. 그들은 다른 배역을 맡길 준비하고 있다. 그것은 포르노속으로 마릴린 먼로를 등장시키는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비밀(속살)을 간직하며 환상을 작동시키고 상징으로서의 마릴린 먼로를 발가벗길 예정이다. 2011년 마릴린 먼로의 포르노 필름이 경매에 붙여졌다. 약 2억 7000만원에 낙찰된 포르노 필름 속에 마릴린 먼로는 마침내 상징이 제거되어 벌거벗은 채 등장했다. 먼로의 마지막 배역이 상연되었던 것은 극장이 아니었다. “오줌같은 비가 한 모금 두 모금 내리는” 어둡고 침침한 모니터 위였다. 섹스 심벌 마릴린 먼로가 완전히 벌거벗었을 때, 상징은 해체되었다. 그저 벌거벗은 살덩어리의 실재로 등장했다.

아무래도 돼지를 십자가에 못 박는 건 너무 자연스러워, 의미없어

아무래도 돼지가 죽어서 돼지로 부활한다면 어느 돼지가 믿겠어?



-『돼지는 말한다』부분


먼로를 “십자가에 못 박는 건 너무 자연스러워, 의미없어” 하는 돼지(포르노 관객)는 돼지가 죽어서(환상 스크린 속 먼로) 돼지로 부활(포르노 모니터 속 먼로) 시켰다.
섹스심벌이라는 상징을 “의미없어”라며 거부하였다. 상징도 없고, 의미도 없는  벌거벗은 살덩어리 먼로로 부활시켰다. 상징적 돼지에서 벌거벗은 포르노 돼지로 부활시켰다. 오늘날에는 마릴린 먼로 뿐만 아니라 세월호 참사라는 사회적 상징을 제거하고 희생자들을 퉁퉁 불은(벌거벗은) 어묵으로 부활시키기도 하고, 5.18 광주민주화항쟁 당시 시신들을 두고 홍어로 부활시키기도 한다. 오늘날의 포르노 관객들은 상징적 의미를 거부하고 벌거벗은 실재와의 충돌에서 오는 효과에 환호한다. “오줌같은 비가 한 모금 두 모금 떨어지”는 포르노 모니터 앞에서 환호하고 있다.

하늘에 분홍 당신 떠간다 발가벗은 당신

나는 당신 알몸 쳐다보기 좋아서 손뼉을 짝짝짝 친다



(...)

분홍색 당신 몸속에서 기지개 켜는 시간 너무 좋아서

당신이 누구인지 누구의 딸인지 누구의 엄마인지 모두 잊고서
내가 네 개의 발에 구두 신고 짝짝 짝짝짝 손뼉 발뼉을 친다

-『핑크 피그 플루이드』부분


포르노 관객들은 “당신이 누구인지 누구의 딸인지 누구의 엄마인지” 전혀 상관없이 “짝짝 짝짝짝 손뼉 발뼉을” 치며 환호한다. 상징을 발가벗기고, 의미를 발가벗기고 남는 것은 오직 외설적 효과뿐이다. 


돼지다, 도무지 밖을 본 적 없는 돼지다, 내내 돼지다, 우울한 돼지다, 늑대가 온다 외치는 돼지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돼지를 왕으로 뽑은 돼지다, 오 멋진 시궁창! 외치며 베개를 껴안는 돼지다, 뒈질 돼질 낳아주신 엄마를 잡아가면 좋겠네 혼자 웃는 돼지다, 온 세상이 다 살쭉이라고 생각하는 입술이 부르튼 돼지다, 4XL돼지다, 침대에 꽉 찬 돼지다, 그 이름 도무지 돼지다, 바다 건너란 말만 들어도 벌벌 더는 돼지다, 고개를 들어본 적 없는 예예 돼지다,
(…)
눈동자에 무엇을 껴입었니 돼지, 왜 돼지가 돼지인 줄 모르나 돼지, 사진은 아는데 거울은 아는데 너만 모르는 돼지, 탄식 돼지, 후회 돼지, 이빨 뽑히고 꼬리 잘린 다음 입 안에 혼자 남은 외로운 혀 돼지, 그러나 입만 벌리면 돼지 돼지 소리가 나는 돼지, 고기 돼지




-『뒈지는 돼지』부분 


그들은 “의미없어”를 외치며 돼지로 퇴행-부활했다. 자기 거울 이미지 속으로 부활했다. 타자들의 시선이 차단된 자신들의 “오줌같은 비가 내리는” 방 모니터에서 부활했다. 그 누구도 그들을 보고 있지 않다. “도무지 밖을 본 적 없는 돼지”들은 “고개를 들어본 적 없는” 돼지들이다. 돼지들이 있는 곳은 바라보는 시선과 (타자에 의해)보여지는 응시의 간극이 지워진 자리에 등장하는 포르노적 거울의 방이다. “밖을 본 적 없는 돼지”들이 거주하는 자리다. 돼지들의 “눈동자에 무엇이 껴입”혀있는데 그것은 오직 바라볼 뿐인, 시선의 벽이다. 돼지는 돼지를 보고(시선) 있지만 그런 돼지를 바라보고(응시) 있는 돼지를 위한 자리는 없다. 오직, 볼 뿐. 시선과 응시의 간극에서 발생하는 환상의 자리도 없다. 비밀도 없다. 수수께끼도 없다. 오직 벌거벗길 뿐이다.
라캉-지젝에 의하면 포르노는 “타자의 응시와 주체의 시각의 이와 같은 일치”로서 “우리의 시각과 타인의 응시 간의 이러한 중첩, 이러한 일치"라고 말한다. 이는 거울단계의 아이들이 상상적 자아를 형성하는 시선과 응시의 거리가 중첩되는 것과 같다. 그래서 “포르노그라피는 본래 도착적”인데 포르노그래피의 도착성은 “갈 데까지 다 가서 우리에게 지저분한 세부들을 전부 다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포르노그래피의 형식이 “선험적으로 도착적인 위치를 점유하도록 강제”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응시와 시선의 거리를 메워버리는 것이 포르노라는 것이다. 포르노는 응시와 시선의 간극을 지워버림으로서 “마비된 대상-시선”으로 환원한다. “타인 내에 있는 대상-응시의 지점을 알고도 놓치거나 축소”함으로서 포르노는 상상계에 머무른다. 먼로의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은 그곳에 없다. 포르노는 닫힌 공간에서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확인하고 있을 뿐이다. 이곳이 포르노 원룸이다.
돼지들은 포르노 원룸에 갇혀있다. 그곳에서 “왜 돼지가 돼지인 줄 모르나 돼지”로 남는다. 돼지는 돼지인줄도 모른다. 알 수가 없다.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다. 그곳은 먼지 하나 없는 데카르트의 원룸이고, 헤겔의 “순수한 자기관계”의 원룸이다. 포르노 원룸 안쪽에 지내고 있는 돼지들의 실재는 “이빨 뽑히고 꼬리 잘린 다음 입안에 혼자 남은 외로운 돼지”이고 혼자 웃는 돼지”이고 “고개를 들어본 적 없는 예예 돼지”이며 “일평생 나를 타고 놀아”나는 돼지이다. 하지만 돼지들은 “무엇보다 제가 돼지일 줄 모르는” 돼지들이다. 그들은 상징계로의 진입을 거부하며 그저 “우는 소리”를 “비명”으로 지르며 “교성”을 내뱉는 포르노 속의 마릴린 먼로를 보고만 있다.



2. 포르노 원룸

먼로의 포르노가 끝나고 포르노 관객들은 충만해졌을까? 기쁨과 환희로 충만한 신체가 되어 삶의 의지로 가득한 주체로 이행하게 되었을까? 대답: 아니다. 보다 나은 대답: 아니, 그들은 또 다른 포르노를 찾아 나선다. 보다 완전한 대답: 포르노 원룸을 응시하고 있는 대타자의 시선을 못 본척(도착증)하거나 그 시선을 지워버리면서(편집증) (퇴)행위로의 이행 중이다. 

여자는 굴 껍데기 속에
굴처럼 미끈거리는 집을 지었습니다

집은 굴처럼 쉽게 상하고 입속에서 미끈미끈 씹혔습니다


(...)

엄마는 입속에다 아기를 길렀습니다

아기는 어마를 아껴서 파먹었습니다
아기가 여물어갔습니다

엄마! 세상에서 제일 먼 곳이 어디야
먹을게 없는데지!
나는 대답했습니다


(...)

새끼는 하루 종일 먹을 거 먹을 거 하고 

나는 아는데 내 배속의 끼룩끼룩
늘 배고픈 돼지는 모르는 것

그것은 나의 끝 

썩은 굴처럼 문드러질 나의 몸젖


갈매기 한 마리 떨어진 제 눈알을 쪼아 먹고 있네



-『키친 컨피덴셜』부분

그들이 퇴행한 곳은 굴 껍데기 속 같은 “엄마의 입속”이다. “엄마의 입속”에서 아기는 자란다. 엄마와 나의 동일시를 방해하는 응시로부터 숨기 위해 입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붉은 살덩어리가 꿈틀거리는 그곳에서 아이는 “엄마를 아껴서 파먹”으며 “여물어”가고 있다.

엄마의 가슴이 아이스크림처럼 폭폭 떠 먹히고 실밥이 풀린 손들이 너덜너덜 국 냄비 속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곳 이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서쪽 하늘을 숟가락으로 닥닥 긁어 먹는 달의 뼈를 고아 뽀얀 국물을 만들고 거기에 땅속 시신들의 육즙을 곁들여 마시는 곳 이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키친 컨피덴셜』부분


“차마 꿈엔들 잊”혀지지 않는 엄마의 입속은 엄마와 자신의 완전한 동일시가 이루어졌던 거울 안이다. 엄마를 “아이스크림처럼 폭폭 떠”먹을 수 있었던 거울의 안이다. 포르노 관객들은 꿈속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다. 도착적 자아의 탄생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타자라는 창문(시선)이 없는 포르노 원룸(입속)에 고집스레 존속(insist)하려한다.
엄마가 있는 부엌(입속)에서는 계속해서, 쉴 새 없이 음식들이 만들어진다. 그곳의 음식들은 실감은 나지만 질감이 없다. 상상적으로 실감나지만 실재가 없기 때문이다. 그 곳에서 “새끼는 하루 종일 먹을 거 먹을 거 하고” 보채고 엄마는 “파란 칼”을 꺼내들어 “늘 배고픈 돼지는 모르는” 음식을 내놓는다. 먼로의 포르노가 끝이라도 또 끊임없이 다른 포르노를 떠도는 것과 비슷합니다. 배가 부르다는 것은 “그것은 나의 끝”을 상징하기에 계속해서 먹어도 속이 더부룩하지 않는다. 실감은 나지만 질감이 없는 세계, 그곳에 고집스레 존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는 끊임없이 요리한다. 쓰레기와 요리가 동시에 만들어진다. 내가 먹는 것이 쓰레기인지, 요리인지 알 길이 없어진다. 자본주의 체제는 이것을 정확하게 노린다. 끊임없이 잉여를 생산한다. 잉여가 가치를 가지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생산되어야 한다. “엄마! 세상에서 제일 먼 곳이 어디야” 엄마는 대답한다. “먹을게 없는데지!” 길러진 아기에게 가장 먼 곳은 바로 엄마가 없는 곳, 엄마의 외부이다. 타자의 응시를 받아들이는 곳이다. 그곳은 길러진 아기에게는 먹을 것이 없는 곳이다. 엄마와의 상상적 동일시 속에서만 아기의 먹을 것은 요리되기 때문이다.

돼지9 길러서 먹어주세요

돼지9 먹고 울어주세요

돼지9 새끼도 낳아드릴께요

돼지9 슬픈 인생이었다고 한 번만 말해주세요

돼지9 나를 잘 싸서 준비해주세요

돼지9 창자는 줄에 걸어주세요

돼지9 하나도 버리지 말아주세요

돼지9 트림은 그렇게 심하게 말아주세요


맛있는 걸 당신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


모두 이름이 같은 돼지


돼지들이 걸어온다

다 먹어 치웠는데 또 걸어온다

배가 불러 죽겠는데 또 걸어온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당신』부분


포르노는 계속된다. 포르노 관객들이 깨닫지 못하는 거울이미지는 결국 대타자의 시선에 의해서 만들어진 “가짜”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 “가짜”를 알아차린다고 하더라도 포르노 관객은 “다른 가짜”로 눈을 돌릴 뿐이다. “가짜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그 가짜들은 이름이 없어서 이름이 모두 같다. “돼지9 원피스 돼지 돼지9 투피스 돼지 돼지9 넥타이 돼지” 처럼 끊임없이 만들어진다. “돼지9”들은 포스트모던하게 분열하며 증식한다. “다 먹어 치웠는데 또 걸어온다/ 배가 불러 죽겠는데 또 걸어온다” 이는 오이디푸스의 금지를 반대하면서 실재로 나아가 해방되길 원했던 들뢰즈의 분열증자의 그것과도 닮아있다. 배가 부르면 그만 먹어야 한다는 금기를 내면화하기를 거부한 분열증자의 그것 말이다. 돼지들은 금기 없이 무한 증식한다. 그 어떤 곳이어도 상관없다. 


구정물 가득 든 몸뚱이

한 우리에서 꿀꿀거리는

돼지들 어째서 다 똑같이 생겼는지

(...)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건

엄마 되고 싶은 애새끼들

아빠 되고 싶어 훌쩍거리는 애새끼들


아빠는 아빠 만들려고 나를 기르고요

엄마는 엄마 만들려고 나를 길러요


몸에 달라붙은 엄마아빠 냄새 때문에

몸 흔들어 털어버리는 중이에요

나는 시방 더러워요

엄마아빠 그림자 얼룩진 몸뚱이는 정말 더러워요


나 나 나 나는 죽지만 엄마아빠 영원히 살아요


엄마는 기름진 구름처럼 더럽고요

아빠는 더러운 물이 끓어서 더 더러워요 

-『어두운 깔깔 클럽』부분

아이는 어머니와의 동일시에 실패할 운명을 타고났다. 거울 속에 자신이 확인한 거울이미지가 어머니의 욕망이라는 것을 확인한 아이는 어머니와 자신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거울이미지 속에서 자신이 본 것은 스스로의 욕망이었으나, 사실은 그것은 자신의 욕망일 거라고 여겨지는 대타자(어머니)의 관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아이가 그러한 분리를 받아들이 않는다면. 즉, 어머니와의 동일시를 고집한다면. 그래서 어머니의 시선을 지워버린다면. 아이는 상징계의 질서로 입문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상상계를 고집스럽게 집착하는 도착증적 자아로 퇴행한다. 오이디푸스콤플렉스와 같은 주체 통과의례를 성공적으로 겪지 못한 아이는 어머니-되기의 불가능성을 받아들이고 아버지”처럼 되기”를 겪지 못한다. 주체는 비-주체로 퇴행한다. “나는 아버지가 아님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라는 역설이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이의 욕망은 근친상간적 욕망을 포기하지 못한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것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것은 “구정물 가득 든 몸뚱이”일지라도 말이다. 이제 “아빠는 아빠 만들려고 나를 기르고요/ 엄마는 엄마 만들려고 나를 길러요”처럼 “나는” 아빠와 엄마의 보충물로서 자리 잡는다. 그래서 “나는 시방 더러워요/ 엄마아빠 그림자 얼룩진 몸뚱이 정말 더러워요”가 된다. 아이의 포르노적 동일시는 자신을 끊임없이 “나 나 나 나는 죽지만 엄마아빠 영원히 살아요”로 직진한다.
라캉-지젝은 이를 두고 “영원한 생존이라는 남근적 세계는 (성)도착의 세계이다.(...) (성)도착이란 죽음과 성이라는 실재에 저항하는 방어(...)뿐만 아니라 죽음의 불가피성에도 저항하는 방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도착적인 시나리오가 상연하는 것은 ‘거세에 대한 부인’이다. (...)도착자의 불멸성은 코미디적인 불멸성이다.” 라고 한다. 주체의 입문의 계기가 되는 거세(언어)를 부인하며 “죽음만 싸지르는 엄마아빠”를 선망하며 동일시에 대한 고집을 피우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퇴행적 도착증은 거세공포에 시달리며 엄마아빠의 파편화된 신체의 일부 속으로 미끄러져 “엄마의 혹은 아빠의 창자가 되려는 창자를 흔들고 토하는 밤”의 시간을 맞이하게 된다. 페니스로의 퇴행 충동은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건/ 엄마가 되고 싶은 애새끼들/ 아빠 되고 싶어 훌쩍거리는 애새끼들”을 만든다. 포르노가 상연되고 있는 포르노 원룸에서 타자의 응시가 지워진 자리에서 도착적 돼지는 이 세계가 어서 망해버리길, 전쟁이라도 나서 다 리셋 되어 버리길 바라며 무한히 반복되는 죽음충동에 시달린다.



3. 철근콘크리트 천황 폐하!

나는 지금 벽 앞에 앉아 꿀꿀거리는 돼지 기분이에요
시간을 백열등처럼 매달아 놓고
불안이 마련해준 특별 방석에 앉으셔서
돼지더러 돼지를 버리라 닦달하시니 대단하시네요

-『철근콘크리트 황제 폐하!』부분
 

포르노에 손뼉 치는 돼지들은 “철근콘크리트 황제 폐하!”에 의해 사육된 돼지들이다. 돼지들은 포르노 원룸에 앉아 “벽만 바라보”며 “시간을 백열등처럼 매달아 놓고/불안이 마련해준 특별 방석에 앉”아 “꿀꿀”거리고 있다. 이곳은 창문하나 없이 사벽이 철근콘크리트로 지어진 원룸이다. 

도와달라는 소리 들어본 적은 있나요?

(다들 그렇게 외치니까)

왜 나보고 자꾸만 나를 버리라는 거예요?

엿 같다니까요? 정신과 의사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경찰도 아니면서

이 세상은 후손 거라면서 왜 자꾸 셋방살이하는 기분이 들게 해요?

왜 새벽에 일어나 벽만 바라보라는 거예요?

-『철근콘크리트 황제 폐하!』부분
 

이곳에서 “철근콘크리트 황제 폐하!”는 “기분이 엿 같아 본 적은 없으세요? 도와달라는 소리 들어본 적은 있나요?”라는 소리를 들어도 듣지 않는다. “왜 나보고 자꾸만 나를 버리라는 거예요?”라고 묻게 만든다. 아무리 소리쳐도 대답은 없다. 왜? 꿀꿀거리는 소리만 남았기 때문이다.


속의 아이는 절대 성장하지 않고 징징대고 껄떡거리는데
왜 내가 벽보고 나를 버려야 해요?
내가 어디있어서 나를 버려야 돼요?

-『철근콘크리트 황제 폐하!』부분
 

상징을 제거한 포르노 돼지들의 목소리를 오직 꿀꿀거리는 것뿐이다. 꿀꿀거리며 “징징대고 껄떡거”릴 뿐이다. 이쯤에서 철근콘크리트 황제 폐하!가 바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드러난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전략은 비-주체화로 “서사적 의미를 생성시키지 않고 통일적 신체를 파괴시키고 신체들을 찢어놓음으로서 죽음충동을 부추긴다. 비-주체되기를 강요받고 어떻게 욕망해하는지 훈육 받는다. 그러한 욕망에 길들여져 무력하게 자본주의적 시장 너머로 자신들의 욕망을 바라 볼 의욕조차 들지 않게 만드는 편집증적 체제“이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전략에 포섭된 비-주체들은 “절대로 성장하지 않고” 오직 “벽만 바라보”며 사육되고 있다. 사육된 돼지들의 배역은 전시되는 것이다.  


나는 돼지

노출증 환자 돼지



나는 내 오물을 나의 독자들에게 나눈다



만져봐 이보다 더 부드러울 수는 없어



내가 쓴 것을 돼지처럼 공중에 매달아주세요



뚱뚱보 독재자를 광장에 매달 듯이



(...)
내 입에 커피향이 열릴 때 모르는 얼굴이

모르는 무기를 들고 성큼성큼 내 안으로 들어온다

은박지가 벗겨지자 검푸른 밤하늘에 새콤거리는 발렌타인 데이의 별들

새로 만든 무덤의 얼굴이 소녀의 얼굴처럼 여물어 간다



-『요리의 순서』부분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모든 것을 전시의 강제 아래 복속시킨다. 돼지들은 전시되어야 한다. 발가벗겨진 채로 “노출증 환자 돼지”가 되어 매끈한 삼겹살을 보여주어야 한다. 전시되었을 때에만 가치를 획득할 수 있다. 전시가치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가볍게 무시한다. “전시가치의 관점에서 존재한다는 것 자체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기 못하고 오직 “보이는 한에서만 가치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시가치는 “완성된 자본주의의 핵심”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이렇게 전시되는 사회는 포르노적 사회이다. 모든 것이 겉으로 나오고, 벗겨지고, 노출된다. 포르노적 전시의 결과로 모든 것이 “어떤 비밀도 없이 즉각적인 소비에 내맡겨진” 상품으로 전락한다.  진열대 위로, 광고판 위로 전시한다. “광장에 매달 듯” 전시하고 “공중에 매달아” 전시한다. 전시가치를 생성시키는 것은 그것의 의미가 아니라 연출적 효과에 있다. 시선의 아우라가 제거된 페이스face를 전시하는 북book 은(페이스북) 너you라는 튜브tube로(유튜브) 전송된다. 포르노적 구경거리로 전시하도록 강제하는 자본주의 시선 아래 페이스face는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인스턴트instant하게 ‘좋아요’로 텔레그램telegram(인스타그램)된다. 의미는 죽음마저도 즉각적instant으로 생중계하는 촉각의 속도를 따라올 수 없다. 느려터진 의미의 속도는 ‘좋아요’의 촉각적 속도를 따라올 수 없다. 의미의 고유한 커뮤니케이션은 폐기되고 “이보다 더 부드러울 수 없”는 촉각적인 것이 지배한다. 그것은 직접적이다. 그래서 포르노적이다. 전시될 수만 있다면 벌거벗은 “오물”도 상관없다. 그 “오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 “오물”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중요하지 않다. 전시의 시뮬라르크 속에서 “오물”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어떤 “오물”이라도 전시가치를 인정받는다면 “모르는 얼굴”들이 “성큼성큼 내 안으로 들어”와 ‘좋아요’를 눌러줄 것이다. 이러한 망상을 두고 프로이트는 “편집증은 끝까지 구경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도 맹목적인 믿음으로 그들이 그 자리에 있다고 추정한다””고 한다. 이러한 망상적 믿음은 불분명하게 “모르는 얼굴”들을 기다리게 하며 편집증을 작동시킨다. 철근콘크리트 돼지가 강제하는 전시의 명령 아래 포르노 돼지들은 편집증적 망상에 사로잡힌다. 

우리는 미래의 어느 날 다큐멘터리를 찍는다. 영원히 생존할 자아를 위한 장기 농장 프로젝트 촬영 중이다. 그중에 나는 제일 예쁜 배우다. 이 생각이 내 연기에 최고로 도움을 준다. 나는 당신의 염통이 되려고 길러진다. 나는 당신의 폐가 되려고 길러진다. 나는 당신의 피부가 되려고 길러진다. 나는 당신의 쓸개가 되려고 길러진다. 심지어 나는 당신의 뇌가 되려고 길러진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나는 당신의 눈치를 보면서 얼른 당신의 눈동자를 내 눈동자로 바꿔준다. 

-『돼지가 돼지에게』부분


자본주의는 “영원히 생존할 자아” 중의 자아이다. 영원한 생존을 위해 편집증적 망상을 개발해야 한다. “나는 제일 예쁜 배우다. 이 생각이 내 연기에 최고로 도움을”주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나르시시즘적인 섬과 에고들로 이루어진” 고립을 가속화한다. 이는 상징계와 단절된 상상계가 주체를 지배하는 형식인 편집증이다. 지젝은 “이데올로기는 편집증적 구조”로 본다. 편집증적 망상이 전적으로 타자의 것인 것처럼, “당신의 눈동자를 내 눈동자로 바꿔”서 세계를 구성한다. 철근콘트리트 돼지의 시선이 이제 포르노 돼지의 시선을 완전히 장악한다. 나는 이제 “당신의 염통이 되려고 길러진다. 나는 당신의 폐가 되려고 길러진다. 나는 당신의 피부가 되려고 길러진다. 나는 당신의 쓸개가 되려고 길러진다. 심지어 나는 당신의 뇌가 되려고 길러진다.” 편집증적 망상은 전적으로 타자(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것이다. 

내가 완전히 당신이 되는 날, 예예 주인님 내 염통이 당신에게 가서 인사하는 날을 상상해본다. 그런데 고깃덩어리만 남은 내가 내 얼굴을 알아볼까? 당신은 연두색 형광조끼를 입고 와서 내 사지를 묶어서 질질 끌고 간다. 당신은 내 간, 당신은 내 콩밭, 당신은 내 심장, 당신은 내 눈알, 당신은 내 피부, 간절히 울부짖어도 당신은 내가 당신인 줄도 모르고 나를 끌고 간다. 곤봉으로 가끔 쑤셔대면서 간다. 당신은 돼지 사찰 모독 횡령 고문 협박으로 감옥에 가야 한다. 당신은 나를 이런 암덩어리 하면서 침대보다 작은 우리에 처박는다. 

-『돼지가 돼지에게』부분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사찰 모독 횡령 고문 협박”으로 포르노 돼지들을 “침대보다 작은 우리에 처박는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우리는 돼지로 키우고, 돼지로 가두고, 돼지로 살게 하며, 돼지의 표정을 짓게 한다. 편집증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신체를 갈갈이 찢어놓음으로서 죽음충동을 부추긴다. 이렇게 길러진 돼지는 벌거벗겨진채 “고깃덩어리만 남은 내가 내 얼굴을 알아볼까?”라는 질문 앞에 선다. 아니. 아니. 전혀 알아 볼 수 없을 것이다. 또 다시 포르노가 시작 될 것이다. 분명하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포르노를 계속해서 상연하며 돼지를 또 다시 가둘 것이다.



4. 돼지 유령이 찾아왔다

무음 청소기로 소리를 모두 빨아들인 것 같은 방 안

이름 모를 나무의 이파리들이 흐릿한 커튼을 어루만지는 방 안


(...)

하루 종일 제가 낳은 똥만 바라보면서 똥을 질질 싸는 선


(...)

나는 돼지인 줄 모르는 돼지예요

나는 돼지인 줄 모르는 선생이에요

매일 칠판에 구정물만 그리죠

나는 몸 안의 돼지를 달래야 하는 환자예요

그러고도 사람들 몸 안에 좌정한 돼지만 보여요

하루만 걸러도 냄새 진동하는 이 짐승을 어찌할까요

하루만 먹이지 않아도 꽥꽥 소리를 지르는 이 돼지를 어찌할까요


(...)

나는 돼지인 줄 모르는 돼지예요

두통이라는 뚱보 여자예요

구토라는 뚱보 여자의 그림자예요

날개도 없는 검은 기름가방이예요

제 몸을 제가 파먹는 돼지예요

-『돼지선』부분


포르노 원룸에 살고 있는 도착적 자아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라는 편집증적 방주인에게 월세를 꼬박꼬박 내며 이상적 자아를 유지한다. 방은 안락하고 제법 괜찮은 편이다. 단, 돼지로 머물러만 있다면 창문 없는 원룸이라도 꽤 괜찮은 편이다. 원룸 안에는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상연되는 포르노-모니터도 있다. 월세가 좀 밀려도 방 빼! 하지 않는다. 게다가 지루하지도 않다. 이 정도면 “돼지라서 괜찮아”라고 말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오히려 ‘돼지라서 다행이야’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하지만 “무음 청소기로 소리를 모두 빨아들인 것 같은 방안”인 포르노 원룸에도 “이름 모를 나무의 이파리들이 흐릿한 커튼을 어루만”질 때가 있다. 그것은 이 생활이 모두 끝날지도 모른다는, 공포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이다. 타자의 응시가 내 안으로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나는 돼지인 줄 모르는 돼지”라는 타자의 관점을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 타자의 관점에서 나는 “몸 안의 돼지를 달래야 하는 환자”이고 “두통이라는 뚱보 여자”이고, “구토라는 뚱보 여자의 그림자”로 보여질지도 모른다는 공포 말이다. 그런 이미지의 원초적 이미지들 속에서 결국 스스로 “제 몸을 제가 파먹는 돼지”라는 걸 인정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거세-공포 말이다. 포르노 원룸의 문틈으로 나란히 누운 한 줄기의 빛(시선)이 내가 돼지인 줄 모르고 있는 돼지라는 것을 비추어주는 거울 밖의 실재와의 조우한다. 


우리는 돼지로 돌아온다
먹고 싸는 이 돼지 자석에 철컥 달라붙는다
(...)
우리는 뜨거운 돼지로 돌아온다
마지막 배역을 맡으러 돌아온다


-『마릴린 먼로』부분 


실재와의 조우는 “유령적인 환영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상징적인 소통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곳에서, 즉 세계가 실패한 곳에서 출현”한다. 유령의 귀환은 “먹고 싸는 이 돼지 자석”으로 상징적 채무가 아직 청산되지 않은 지점에서 “돌아온다”. 상상계의 거울 속에서만 머무르려고 고집을 피우고 있는 거울이미지의 자아가 상징계로의 진입에 실패했던 곳에 “돼지로 돌아온다”. 상징화에 저항하는 수수께끼 같은 그곳에 실재가 놓여있다. 실재와의 조우에서 “일어나는 충격적인 쇼크는 자동인형처럼 움직이던 주체를 탄생시키고 어떤 간극을 여는데, 주체를 이를 상징화하려는 (궁극적으로 실패할) 노력들로 이 간극을 자유로이 채워 넣게 된다. 자유란 궁극적으로 외상적 마주침에 의해 개방된 공간에 다름 아니며 그 공간은 주체의 우발적/ 부적절한 상징화들/ 번역들로 메워지게 된다.” 상상계의 자아는 다시금 자신이 실패했던 증상(Sypmtom)의 문고리를 잡는다. 그리고 드디어 거울 밖으로 (쫓겨나듯)나간다.

오 더러운 년 간다

두들겨 맞고 간다

오 눈부신 망할 년 간다

도망간다

오 검게 반들거리는 시궁창 같은 년 간다

내뺀다


저년을 막아! 회초리를 든 사람들이 몰려온다

나혼자 살게요

버림받은 년
돼지 같은 년
달아난다

(...)


더러워 더러워 더러워 나 참 더럽네

그냥 꿈속에서 살걸 여긴 왜 왔을까

죽어라 돼지
너 왜 젖 먹니
너 왜 자라니

나 같으면 안자라겠다

주인님 오셔서 손가락 얼마나 굵어졌나

살은 얼마나 피둥거리나 만져보는데

나 같으면 안 자라겠다

오 그리운 돼지가 간다
쫓겨간다


오 한 여자가 돼지를 나가려고 한다


건들지 마 건들지 마
돼지를 건들지 마
더 이상

반토막난 흑돼지

그림자가 그녀에게 매달려 간다



-『지뢰에 붙은 입술』부분 


거울 밖의 타자(언어)의 세계는 괴물들로 가득하다. “회초리를 든 사람들”이 뒤쫓는다. 쫓기는 죄목은 “돼지를 나가려고” 한 것이다. 돼지(거울)의 바깥으로 나가려고 한 것일 뿐인데 뒤쫓는 사람들은 말한다. “그냥 꿈속에서 살”지. 응? “나 같으면 안 자라겠다”. 응?. 거울 안에서 살을 피둥피둥 찌우며, 손가락을 굵게 만들어준 주인님의 시선 아래서 살아가면 돼지? 왜 나가려는 거야?. 응? 거울 밖을 나가려고 하자마자, 고통스러운 타자의 시선들이 시작된다. 포르노 원룸 밖으로 나가려고 했던 것뿐인데, 방주인(이데올로기)은 매몰차게 뒤쫓는다. 뒤쫓기 때문에 달아난다. 뒤쫓지 않았으면 다시 방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는데 쫓아오기 때문에 달아난다. 맹렬히 달아난다. 포르노 원룸으로부터 달아나는 “반토막난 흑돼지/ 그림자가 그녀에게 매달”고 가야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야 한다. 


떠나면서 돌아본다
구름 같은 나를 담은 자루를
변덕 많은 그림자를 기수처럼 태우고
검은 땀 흘리다가 이제야 다리를 꺾는 돼지 한 마리를
나에게 어울리는 맞춤복은 아니었지만
벗어놓은 열 가락 살 장갑과 열 가락 살 양말
그위에 작은 창문처럼 손톱과 발톱
그 창문 뒤에서 내다보는 한 사람
깨우는 약
재우는 약
나가는 약
토하는 약
약 먹고 토하는 약

죽은 느낌표처럼 쓰러진 몸을 흰 천에 싸서 남겨두고 이제 떠난다

저것을 벗고 떠도는 것이 또 나라고 굳게 믿으면서


-『구천무곡』부분

 
돼지는 떠난다. “떠나면서 돌아본다” 돌아본 그곳에는 나에게 맞춘 듯 딱 맞다고 상상했던 것들이 “나에게 어울리는 맞춤복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벗어놓은 열 가락 살 장갑과 열 가락 살 양말”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한 때는 나의 것이었으나, 지금의 지금은 나의 것이 아닌 것들을 바라본다. 그것은 거울의 “창문 뒤에서 내다보는 한 사람”에 의해서 투여되었던 “깨우는 약/ 재우는 약 /나가는 약 /토하는 약 /약 먹고 약 토하는 약”으로 인해 느낌표조차 “죽은 느낌표”가 되어버린 곳이었다. 이제 떠날 시간이다. 떠나기 위해서는 “저것을 벗고 떠도는 것이 또 나라고 굳게 믿으면서” 떠나야 한다. 믿어야 한다. 거세공포를 넘어서 자기각성의 전율로 이행한다. 안녕, 거울들아. 안녕, 돼지들아. 안녕. 안녕. 안녕. 내 것이지만 내 것이 아니기도한 것들아. 안녕. 내 것이었으면 했으나 단 한 순간도 내 것이 될 수 없었던 것들아. 안녕. 안녕. 안녕. 이제 “쓰러진 몸을 흰 천에 싸서 남겨두고 이제 떠난다” 안녕. 꿈속에서나 만나자. 



5. 저게 나야, 저 얼룩진 얼굴말야

몸 버리고 가라는데 몸 데리고 간다
돼지 버리고 가라는데 돼지 데리고 간다

꿈속에서 나가
이제 그만 새나 되라는데
몸속에서 새가 운다

이제 그만 안녕 너 없이도 살 수 있어

돼지가 따라온다

내가 바로 저 여자야
못생기고 더러운 저 여자
배 속에 가득 망각이 들어찬 저 여자
머릿속에 토사물만 가득 든 여자
지나가던 소녀가 침을 탁 뱉는 바로 저 여자
길거리 모퉁이에 서 있으면 모두 달아나버리는 저 여자
무서운 아저씨들의 장화 밑에서 우글거리는
글의 집은 너무 좁은데 피할 줄도 모르는
떄 묻은 얼굴이야 더러운 엉덩이야 피 뭍은 발톱이야
날 데리러 오는 장의차 소리는 귀신같이 아는 바로 저 여자야
무서워서 먹고 무서워서 소리치고 무서워서 또 먹는 바로 저 여자야
나는 입술에 붙은 밥통이야 뱉은 걸 먹고 싼 걸 먹는 바로 저 여자야
역겨운 여자 냄새나는 여자 미친년 맞는 년
내가 접시에 누우면 맛있는 소스라도 발라서 구워줄래?
못생긴 여자야 하루에 한 움큼씩 항우울약 먹는 여자야
네가 나를 사랑해주겠다고 동정해주겠다고 그러지만
나 돼지야
그런데 한마디 덧붙이자면 나 재미있는 돼지야
나는 이렇게 생신 비밀이야 유머가 터질 듯해서
아들이이 운동장에서 차고 놀 수 있는 오줌보야

돼지 한 마리가 산문을 나서는 나를 멀찍이 따라온다
36도 5부 방에서 나왔으니 춥겠지? 냄새나는 코트들고 따라온다 

기쁘다 돼지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산문을 나서며』전문

거울을 떠난다. 벽을 떠난다. “이제 그만 안녕 너 없이도 살 수 있어” 하며 떠난다. 떠나면서 버린 것을 “데리고 간다”. 데리고 가지 않아도 “따라온다”. 상징계의 언어란 그런 것이다. 떠나면서도 동시에 데리고 가야하는 것이다. 돼지는 기존의 자신을 배치하던 상징적 질서와 단절하는 주체로서 떠난다. 돼지를 돼지로 만들던 그 상징적 배치를 뚫고 나가려고 한다. 포르노적 원룸에서 풀려난 돼지는 나르시시즘적 매끈했던 얼굴에서 “때 묻은 얼굴”을 마주한다. 카프카가 더러운 “아버지의 이름”을 받아들이면서 상징계로 들어설 수 있었던 것처럼 돼지도 자신의 오점을 받아들이면서 주체로 도약한 것이다. 돼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면역화된 안전한 돼지우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돼지를 끝까지 밀어붙여서 돼지로서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하는 것의 공허함을 받아들이는 것. 즉, 대타자의 응시 아래서 “못생기고 더러운” 모습으로 보여질까봐 두려워하는 돼지에서 그래 “나 돼지야”로 이행하는 것. 그래서 얼룩진 나의 돼지들을 데리고 “산문을 나서는” 것. 대타자의 관습적인 “36도 5부”의 온도에서 나와 “어떤 대타자도 없는 공포”의 온도로 이행하는 것. 그것은 거울 밖으로 걸어 나가면서 거울을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거울의 부정성을 “냄새나는 코트”처럼 껴입음으로서 헤겔의 “부정적인 것에 머무르기Verweilen bei Negative”에 이른다.
헤겔은 “정신은 부정적인 것과 정면으로 마주하며 그것에 머무를 때에만 정신은 위력으로 된다. 이러한 머무름이야말로 부정적인 것을 존재로 전환시키는 마술적 힘”이라고 한다. 이 때에 “부정적인 것”은 추상적이고 단순한 자기관계로서의 정신(친숙한 세계)을 깨뜨리는 타자(부정적인 것, 모순, 분열)를 뜻한다. 단순한 자기관계와 부정적인 것이라는 서로 대립하는 두 계기의 모순적 공존 속에서 “정신의 자유는 한낱 타자 밖에서 얻은 자립성이 아니라 타자 안에서 타자로부터 얻어낸 자립성이며, 타자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타자를 극복함으로써 실현”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부정적인 것에 “머무르는 한에서만 정신은 위력을 발휘”하며 그것은 “죽음을 감내하고 절대적 찢겨짐을 견뎌내는 정신, 조화롭고 평화로운 안식의 세계를 파괴하는 낯선 것에 대해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대면하는 정신의 힘”을 두고서 “부정적인 것에 머무르기”라고 명명하였다. 이를 통해서 새로운 세계/주체를 창조하는 정신이 바로 헤겔의 주체이다.   
김혜순의 돼지들은 오물을 뒤집어 쓴 주체로 탄생한다. “내가 바로 저 여자야
못생기고 더러운 저 여자 (...) 머릿속에 토사물만 가득한 여자 (...) 때 묻은 얼굴이야”로 가득한 주체는 근원적인 상실과 불가능한 회복을 끌어안은 채 변증법적으로 형성해나가는 돼지-주체이다. 그 주체는 말한다. “나 돼지야
그런데 한마디 덧붙이자면 나 재미있는 돼지야
나는 이렇게 생긴 비밀이야”. 비밀 없음의 포르노에서 이제 비밀이 생긴 주체이다. “영혼을 가진다는 것은 비밀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키냐르의 말에 따라 돼지-주체 영혼이 생겼다. 포르노적 벌거벗음 속에서 울부짖는 교성이 비밀의 말을 가지면서 “유머”를 구사하기도 한다. 새롭게 탄생하는 돼지. 그 돼지를 두고 “기쁘다 돼지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라고 환호를 질러도 되지 않겠나. 



6. 나서며 

쓰레기는 일견 가난한 자, 이방인, 고아, 난민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들이 스스로 쓰레기가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의 얼굴은 내가 비참하게 버려졌을 때, 죽음에 다가갔을 때, 국가의 무기력함으로 지뢰처럼 터지는 재앙들 앞에서 목격한, 마주한 이웃의 얼굴이며, 나의 국가 공동체 혹은 가부장제의 폭력 앞에서 내가 감당한, 나를 둘러싸고 있는, 바로 나 자신의 구멍인 어둠이다.

-『여성, 시하다』부분

김혜순의 15편의 돼지 연작시의 구성은 몽타쥬적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몽타쥬가 서사에 개입하여 알레고리를 생성해내는 반면 이 돼지 연작시 15편은 그야말로 포르노적이다. 돼지의 시선과 돼지 아닌 것들의 응시가 겹쳐있다. 돼지와 다른 돼지들은 딱히 구별되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 가까이(도착증) 있거나, 너무 멀리(편집증)있다. 그래서 파편적이고 부분-대상적이다. 그것은 15편의 연작시의 시적 주체들이 모두 거울에 반사된 시선-들의 포르노적으로 겹쳐있기 때문이다. 타자의 시선이 침범하지 못하는 시적 공간을 만들게 되면서 김혜순의 돼지로 접근하면 접근 할수록 돼지와 독자사이의 간극은 너무 가까워지거나, 너무 멀어진다. 15편의 연작시는 알레고리를 생성하기 보다 오히려 알레고리를 분산시키면서 포르노의 형식을 가지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형식이야 말로 오늘날의 돼지들의 형식이 아닐까.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새로운 주인-기표를 향한 욕망을 차단시켜 무력하고, 냉소적인 얼굴 속에서 인간의 표정을 지워내는 이 세계와 작별을 고하며. 김혜순의 돼지-주체는 상품 형태로 전시를 강제하는 이데올로기에 맞서 “안죽은(undead) 부분대상의 형태로 고집스레 지속되는 충동의 노래”들을 부른다. 

있지, 조금 있다 고백할 건데 나 돼지거든 본래 돼지였거든” 






참고문헌

김혜순. 『피어라 돼지』, 김혜순. 문학과지성사, 2016.

김혜순. 『여성, 시하다』, 김혜순. 문학과지성사, 2017.

권택영, 『자크 라캉 욕망이론』권택영 엮음, 문예출판사. 2005.

바디우, 알랭. 『오늘날의 포르노그래피』, 박정수 역. 웅진지식하우스, 2007.

바디우, 알랭. 『Logic of Worlds: Being and Event2』, Continuum Publishing, 2013.

벤야민, 발터.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최성만 역. 도서출판 길, 2007.

지젝, 슬라보예. 『삐딱하게 보기』, 김소연, 유재희 역. 시각과언어, 1995.

지젝, 슬라보예. 『하우투리드 라캉』, 박정수 역. 웅진지식하우스, 2007.

지젝, 슬라보예. 『전체주의가 어쨌다구?』, 한보희 역. 새물결, 2008. 

지젝, 슬라보예.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박정수 역. 그린비, 2009.

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김태환 역. 문학과지성사, 2015.

한병철. 『투명사회』, 김태환 역. 문학과지성사, 2014.
김서영. 「재난과 회복을 변주하는 정신분석의 해석학: 21세기 파국적 상상력을 오용하는 편집증적 구조를 넘어서」. 문학과사회, 92  (2010): 318-332.

구태현. 「히치콕의 카메라로 엘리엇과 프로스트 응시하기. 응시의 관점에서 본 모더니즘의 두 풍경」. 인문논총, 55  (2006): 315-37

성창기. 「헤겔의 주체: “부정적인 것에 머무르기”. 지젝의 헤겔 해석을 중심으로」. 철학사상. 46 (2012): 259-288

장문정. 「포르노그래피, 지워진 타자의 시선」. 대동철학논문집, 62  (2013): 61-84.

조재룡. 김혜순 대담. 「지금-여기, 시가 할 수 있었던 것들, 시가 해야말 했던 말들」. 문  학동네. 87 (2016)

황미욱.「해롤드 핀터의 “달빛”- 실재와의 조우와 실재의 윤리」. 새한영어영문학, 56  (2014): 3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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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 최승범. 생각의 힘. 2018.

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 최승범. 생각의 힘. 2018. 


<쪽글> 


1) 우리 때는 말야. 다들 그랬어. 더한 집도 많아. 
우리 때는 그런 거 없이도 애들 잘만 키웠는데 요즘 것들은 유난을 떤다고 나무란다. 그분들께 여쭤보고 싶다. 그래서 장성한 자식들과 사이가 좋으시냐고.(23). 여기서 '우리 때'라고 하는 것을 기준으로 '너희 때'를 평가한다. 우리 때에는 "월급봉투만 잘 가져다 주면 무슨 짓을 해도 좋은 남편 소리를 듣던 때"(23)이고 "퇴근한 아버지는 하루 종일 청소도 안하고 집에서 뭘 했느냐며 어머니께 화를 내"(23)도 별 이상할 것이 없던 때 였다. 그 때에 우리시대의 어머니들은 하나같이 "우리 집의 시시포스"(27)였다. 


2) 남성에게 묻지 않고 여성에게만 묻는 것
"무심코 아이는 지금 누가 봐주는지를 물은 것이다. 아차, 실수했다 싶었다. 여태껏 숱한 남성들을 늦은 밤에 만나왔지만 그들에게는 한번도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없다."(28) 

"일하려고 야근하면 '독한 년'이 되고 애가 아파 조퇴하면 '민폐녀'가 된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도 가는 길은 선악과를 떠올리게 하는 원죄의 시간이다. 맞벌이 부부지만 육아와 가사는 독박이 기본 값이다."(85)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며 아내에게 육아를 떠넘기지만, 직장에서 여자 동료가 육아휴직을 내면 이기적이라고 비난하는 남자들 여럿 봤다. 우리 집 청소, 빨래, 설거지는 아내가 다 해야 하지만 우리 부서 여직원의 퇴근이 빠른 건 기분 나쁘다는 남자들 많이 봤다. 학교에 여교사가 많아 남자아이들의 '올바른' 성역할 학습이 우려되지만, 집에서 엄마만 아이를 돌보는 건 남자아이 교육과 아무상관없다는 남자들 엄청봤다."(88)


3) 자상한 아빠가 되는 건 쉽다
"나쁜 아빠 되는 건 정말 어렵다. 애가 울거나 말거나 귀 막고 잠을 자도, 젖병 소독이며 목욕 한 번 안시켜도, 유모차 끌고 동네 한 바퀴만 돌면 금세 자상한 아빠로 소문난다. 백 가지 중 하나만 잘못해도 나쁜 엄마가 되는데, 백가지 중 하나만 잘해도 좋은 아빠가 되는 사회는 정상이 아니다."(33) 

+

"딸은 늙은 부모를 봉양하는 간병인쯤이었다. 최근에 딸을 선호하는 부부가 더 많다며 인식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비행기 태워주는 것은 딸이다' ' 늙어 부모 보살피는 건 딸뿐이다'라는 말처럼 봉양과 대접을 기대하고 달을 낳으려는 심리는 수천 년간 이어져온 여성 착취의 역사와 맥을 같이한다."(81)

"저항의 분위기는 오래전부터 물씬물씬 피어나고 있었다. 되바라진 여성들이 분란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 달라진 세상에 남성들이 적응하지 못하는 게 문제다."(138) 

"남자를 페미니스트로 만드는 첫 번째 지점은 엄마의 인생에 죄책감을 느끼는 데 있다고 믿으므로. 단, 그게 아내를 착취하는 '대리효과'의 방식으로 이어지지만 않는다면."(154)



<개념들> 

-호모소셜homosocial (페미위키)


<리뷰> 

1)남성과 남자
남자는 남성으로 존재하는 자. 남성-남근의 존재자를 남자라고 불러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듦. 하이데거는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짓는데, "존재(sein)"는 자신을 드러낼 특정한 장소를 발견하고 그곳에서 실현되어 특정한 형태를 갖는 것을 "존재자seiendes"라고 불렀다. 존재자는 항상 '거기da'라는 특정한 장소와 특정한 방식으로 현존재(dasein)한다. 현존재는 세계라는 공간과 시간에 의해 그 형태를 얻으면서 '세계-내-존재"로 자리한다. 성으로서의 남성이 자신을 드러낼 특정한 장소를 발견하고 그곳에서 남성을 실현하며 특정한 형태를 갖추면서 "남-자"로 자리하게 되는 것으로 구분해서 볼 수 있을까. 따라서, 성gender으로서의 남성이 특정한 방식으로 형태화되고, 장소를 가짐으로 인해서 '세계-내-남자'로 자리잡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책의 형식
한 가족의 내력과 한 개인의 구술사를 기본축으로 하여 삶의 서사 속에서 만난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 전개. 저자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읽다보면 흥미롭고, 신나게 읽힘. 1부,2부, 3부는 동일한 형식을 지닌다. 저자의 가족과 자신의 삶의 서사 속에서 발견(?)된 가부장-괴물/남자-괴물/ 혐오-괴물에 대한 묘사, 설명, 예시들로 나열된다. 개인의 서사를 정치적/사회적 맥락안에서 풀어내기 위한 형식을 갖춘다. 이러한 구성형식은 일상/삶의 촘촘한 폭력네트워크를 드러내기에 (전형적으로) 적합해보인다. 4부, 5부는 저자가 일하고 있는 교실-내-운동을 드러내는데, 1,2,3부와는 다소 다른 형식을 취하는데, 잘 모르겠다고, 리뷰는 남겨두자. 



3)무엇을 할 것인가?
남고에서 페미니즘을 가르친다는 저자. 수업을 통해 "은근히" 이루어진다는 페미니한 접근을 넘어선 다음 과제에 대해서 독자들에게 남겨주었다면, 여운이 생겼을 듯. 마르크스의 문장을 패러디하기까지 하면서 "페미니스트가 되자"라고 말하는 저자의 목소리가 책의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볼륨이 확 낮아진듯 도 한데... 어디까지 우리는 가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질문 할 때, "충분함"이야 말로 그 기준이 되어 줄 텐데, 저자는 얼마나 충분한가?, 라고 묻게 되기도 한다. 


4)남성-페미니스트 
남성으로서 페미니즘을 말하기 굉장히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 남성-페미니스트임을 선언하는 순간 '자기와의 긴장'관계를 지속시키는 것이 정말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 우리 사회의 제도적 무의식 아래서 길러진 남성이 페미니스트의 자리에서 삶을 꾸린다는 것은 거의 "목숨을 건 도약(헤겔)"에 가까울 정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 그러나 "불가능 속의 가능성(바디우)"을 구현하는 것이 혁명의 과정인지라, 저자의 도약에 박수와 갈채를 보내고 싶다는. 또, 나에게 돌아오는 질문. 나는 충분한가?. 



<관련자료링크> 

-강남 살인사건이 '여성혐오 범죄'인 이유 (한겨례)

-나도 메갈리안이다 (매일신문)




개념정리: 라캉

<라캉: 대상 소문자 a> 


*”환상은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그 무대이다”라고 언급한 라캉의 말이다. 환상은 욕망의 근거이지 그 자체는 아니다. 환상은 욕망들을 영사하는 비어 있는 스크린이다. 환상과 실재계 사이에 매개가 되는 개념이 ‘대상 a’이다. 라캉은 대타자를 가리키는 대문자 A에 대비되는 소문자 a를 써서 소타자의 기표로 삼는다. ‘대상 a’는 일종의 구멍이고, 대상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무를 뜻한다. 그것은 결여된 대상이 아니라 결여 그 자체이다. -장석주, 철학자의 사물들 


*욕망은 정확히 말하자면 어떠한 대상도 가지지 않는다. 욕망은 항상 사라진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이므로 상실한 대상에 대한 지속적인 탐색을 수반한다. 주체와 타자 사이의 파열을 통해 아이의 욕망과 어머니의 욕망 사이에 간극이 벌어진다. 이 간극에 의해 욕망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대상 a가 도래한다. 환상을 통하여 주체는 타자와 하나가 되는 착각을 지속시키고 자신의 균열을 외면하려고 노력한다. 타자의 욕망은 항상 주체를 넘어서거나 벗어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가 되찾아 자신을 지탱할 수 있는 어떤 것이 남겨진다. 그것이 바로 대상 a 이다. -숀 호모, <라캉 읽기> 


<라캉: 라랑그 lalangue>

*”언어는 의심의 여지없이 라랑크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라캉에 의하면 무의식은 라랑그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대한 지식이다. 또한 그는 글과 말을 비교하며 문학 litterature과 문학lituraterre을 비교한다. 라캉이 만든 신조어로서 영어로는 literature(문학)과 illiterate(문맹의)를 합하여 Illiterature로 번역된다. -김서영/ 영화로 읽는 정신분석


*라랑그는 상징계의 한 부분으로서 창조적 오독을 가능케 한다. 이는 일종의 말장난이며 정신병적 언어로서 기존의 언어체계가 불완전함을 말해주는 중요한 지표이다. 기존의 언어체계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말장난인 라랑그를 통해 그 결여를 보상받는다. -김점용/ 슬픔을 긍정하기까지: 시인이 들려주는 우리 시 이야기 


*공시적인 환유는 어근적이고, 통시적인 은유는 의미를 지닌 소리를 가지기 때문(210)이라는 것이다. 라캉은 정신분석 실제 임상에서도 이런 신념을 드러내고 있다. “말의 소리는 명확히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래도 그 효과만큼은 확연하게 확산된다......의심할 여지없이 심리분석가는 그가 사용하는 말의 의미적 울림을 주의 깊게 계산해서, 이것을 불러 일깨움으로써 상징이 가지는 힘에 의거해 유희할 수 있다”(Ulmer, 193).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는 동일음을 라랑그의 차원에서 극대화시킬 때 가능한 것이다. 먼저 ‘의미적 울림’이라는 말에 주목하자. 동일음을 지닌 단어의 유희를 라랑그 차원에서 극대화시킨다는 말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철자의 순서를 바꾸거나 철자를 마음대로 붙였다 떼는 철자변치 놀이를 통해 합성어와 신조어의 자유로운 주조를 뜻한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사랑하다의 불어 동사 3인칭형 aimes와 영혼 âme는 같은 소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같은 의미이고, 대학(univérsite)은 uni-vers-Cythère(보들레르 시에 나오는 여신)와 같은 소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미래의 대학 교육은 성교육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말하다(dires)와 욕망(desire)은 순서는 틀리지만 같은 소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동일한 의미로 간주하고, 읽다(lire)와 매듭(lier)은 같은 소리를 지니고 있기에 글을 읽는다는 것은 매듭을 푸는 것만큼이나 힘이 든다는 것을 함축한다고 주장하는, 일종의 말의 유희이며 재치이다(이렇게 보면 특히 프랑스 포스트구조주의 이론가들의 글들은 매듭이고 우리 독자는 이리저리 꼬여있는 매듭을 푸는 듯한 독서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라캉은 자신의 세미나를 진행하는 동안 끊임없이 이런 유희를 했을 뿐만 아니라, 이런 라랑그에 확고한 신념을 표명했다. “라랑그는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모든 효과를 제시한다. 이 효과는 말하는 사람이 언명되어진 지식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을 이미 넘어선 지식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라랑그가 지니고 있는 고유기술이다. 그리고 우리가 라랑그를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은 보편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을 훨씬 능가한다.” 이 지극히 개인적이라서 수수께끼 같은 라랑그는 쥬이상스와 연결되며, 사차원적 의미라는 것이 라캉의 말이다. 즉 1차 의미는 sense, 2차 의미는 nonsense, 3차 의미는 common-sense, 그리고 가장 고차원의 4차의 의미는 joui-sense 즉 의미유희이다. 4차원적인 의미인 이 쥬이상스가 바로 라랑그이며 이는 근원적인 실체를 다루며 무의식을 소환한다는 것이다. 이는 꿈과 무의식의 언어로 기의가 된다. 왜냐하면 라캉은 “기의란 꿈마다 다시 나타나는 그리고 잠재해 있는 의미(혹은 개인적인 컨텍스트)와 일치하는 주제”(위의 책, 92, 193-204)이기 때문이다. 은유는 ‘시적인 빛’(158)이며 무의미에서 의미가 생성될 때 생기며, 모든 인간의 무의식 속에서 점진적인 발전을 통해 ‘부계의 신비’를 생성하며, 이것을 경멸하는 것은 인간의 운명을 멸시하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158). -김보현/ 라캉의 라랑그 (원문: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windbomb&logNo=10047597707&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kr%2F)

*이 단어는 어떤 정상성도 거부하는 불법적 쾌락 공간으로서의 언어, 혼란스럽고 복수적인 동음이의어, 말장난, 불규칙한 은유적 연결과 울림을 가리키는 신조어다. -슬라보예 지젝/ 하우투리드 라캉 






제도적 무의식에 관한 소론


#1 잉글랜드 로러덤에서 발생한 사건 (온세상) 

-사회발달의 각 단계에서 보이는 비동시성, 이른바 선직국과 개발도상국 간의 시차가 빚어낸 충격적 결과중의 하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의 급증이다. 이 폭력은 무작위로 상대를 고를 뿐 아니라 체계적으로 자행되며, 일정 유형을 띠면서 그 사회의 특정맥락을 선명하게 반영하낟. 

-파키스탄 출신 무슬림 청소년의 '정치적 무의식'과 직면한다. 이드의 폭력은 단지 충동에서 비롯된 혼란이 아닌 정확히 이데올로기적 틀을 지닌다. 자신이 사회로부터 소외되었다고 느낀 청소년 집단은 지배집단의 하층계급 출신 소녀들을 상대로 복수를 감행했다. 그러므로 종교와 문화에세도 여성을 겨냥한 잔인한 폭력의 특징이 있으리라는 의혹은 지극히 합리적인 문제제기다. 


#2 인도에서 자행된 집단강간 사건(경향신문) 


#3 멕시코 시우다드 후아레스 여성 연쇄 살인사건

-독립 근로여성이라는 새로운 계급에 마초가 보인 전형적인 반응 

-산업화와 현대화의 결과인 급속한 사회변화는 발전을 위협으로 느끼는 남성의 잔인한 반응을 야기했다. 이 모든 경우에서 결정적 특징은 폭력이라는 범죄행위가 결코 거친 에너지의 즉흥적 발산이 아니라 학습되고, 외부에서 유입되고, 하나의 의례로 굳어진 것, 요컨대 사회 공동체의 집단적-상징적 실체의 일부라는 것이었다. 대중의 '순진한' 시선이 짐짓 외면한 것은 폭력의 잔인함 자체가 아니라 이 범죄에 내재된 '문화적'이고 의례로 굳어진, 상징적 풍습이었다. '


#4 카톨릭 신부들의 소아성애 (카톨릭뉴스 지금여기)

-소아성애는 개인의 '사적' 무의식 차원이 아니라 제도 자체의 '무의식' 차원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카톨릭 제도가 리비도에 젖은 병적인 현실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카톨릭 제도 자체의 보존을 위해 소아성애가 필요했다. 소아성애성향이 없는 신부도 오랜 세월 성직자 생활을 하면 소아성애 행위에 연루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제도의 바탕에 린 논리가 신부를 소아성애에 빠지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제도의 무의식은 교회라는 공공기관이 지닌 음란한 이면의 존재를 한사코 부정하고 은폐하려고 한다. 


*참고도서
새로운 계급투쟁, 슬라보예 지젝, 자음과 모음, 2016 



난민에 관한 소론

#1 

-난민은 글로벌 자본주의의 동려고가 군사개입과정에서 난민 발생의 원인을 찾는 일이다. 

-청(소)년들은 결코 자율적으로 사회를 바꾸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왜? 기성세대들이 그렇게 되지 않도록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들 부유한 나라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특징은 새로운 노예제도의 출현이다. 자본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장려하는 경제체제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하지만 경제 현장의 자본주의 작동방식은 노예 양산일 뿐이다. 노예제는 중세 말 폐지 된 것 처럼 보이지만 근대 초기부터 남북전쟁에 이르기까지 식민지에서 더 기승을 부렸다. 비약을 무릅쓰고 과감하게 가정해보자. 글로벌 자본주의의 새로운 시대는 노예제의 부활이라는 서막을 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탈리아 프라토 중국인 섬유공장 화재 (국제신문) 

-2005년 파리폭동 (한국일보)

파리 근교의 불타는 현장에 그 어떤 정치 프로그램도 없었다는 것은 우리의 정치가 얼마나 빈곤한지를 알려주는 실체의 예다. 우리는 이 사회를 선택의 사회라고 자찬하지만 강제된 민주적 합의를 거부할 유일한 대안이 고작 맹목적 행동밖에 없는 사회 속에 살고 있다. 

-규칙에의 복종이냐 혹은 (자기)파괴적 폭력이냐를 택일해야 하는 선택이라면 우리가 그토록 숭배한 선택의 자유란 대체 무슨 소요잉ㄹ까? 

-라깡: 행위로의 이행 passage a lacte, 즉 충동적으로 행위로 옮겨짐, 말로 어찌 표현할 수 없고 생각으로도 정리할 수 없는 행위로의 이행, 참을 수 없는 무게의 분노를 수반하는 행위로의 이행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이행을 낳은 의미를 탐색하려는 유혹에 사로잡힌다.(해석학의 유혹) 그러나 행위로의 이행은 단지 충동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범인의 무기력함에 그치지 않는다. 


#2

이탈리아 남부와 발칸반도에 체류 중인 난민들이 더는 그곳에 머무르지 않고 스칸디나비아 국가와 독일로 가려고 조바심을 내는 것을 보고 있다. 칼레에서 천막생활을 하면서도 프랑스에 만족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영국으로 넘어가려는 수천 명의 난민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가난, 고토으 위험에 처한 인간은 최소한의 안전과 먹고살 여건만 만련되면 만족할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어렵고 힘들 수록 인간은 절대적 유토피아를 열망한다. 그러나 난민이 배우게 될 뼈아픈 교훈은 '노르웨이는 없다'는 것, 심지어 노르웨이 안에도 노르웨이는 없다는 것이리라. 

-현실에서 꿈을 쫓는 대신 현실을 바꾸는데 집중해야 한다. 


#3

문화는 우리가 실제 믿지 않고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행하는 모든 것의 이름이다. 

-산타클로스를 믿지 않지만 12월이면 집집마다 심지어 공공장소에도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우는 것이 문화가 아니고 무엇일까? 

-난민과의 감상적 연대,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우리' 스스로를 유죄로 단죄하는 잘못된 감상적 자기 비하가 그것이다. 우리의 실질적 과제는 오히려 '우리'와 '저들' 노동자 계급 사이에 가교를 구축하여 연대 투쟁을 하는 것이다.



이웃에 관한 소론

#1 애덤 코츠코 <소름끼침> (알라딘 링크) 

-소름 끼치는 낯섦이야 말로 오늘날 이웃의 기묘한 본질이라고 한다. 모든 이웃은 궁긍적으로 기이하다. 이웃은 '기이하게' 만드는 것은 이웃이 보여주는 기이한 행동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저런 행동을 하는지 속내를 알 수 없어서다. 


#2 사드 후작의 작품들 

-사드의 작품에서 소름이 돋는 것은 소름끼치는 장면이 나와서가 아니라 '왜 저런 짓을 할까?' 하는 물음이다. 그 변태행위를 통해서 이상하다는 혐의를 지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3 프로이트 

-이웃은 무엇보다 하나의 사물이며,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어떤 침입자이자, 우리를 훼방하며 우리의 익숙한 생활 방식을 혼란에 빠뜨리는 다른 생활방식(혹은 사회생활과 의례에서 드러나는 주이상스jouissance의 방식)을 지닌 사람이다. 그래서 너무 가까이 있는 이웃은 공격적 반응을 촉발시킨다. 우리는 불안한 침입자를 쫓아내려 하기 때문이다. 


#4 이스라엘군의 인도주의 이데올로기 전략 

-2003년 이스라엘 군이 테러리스트 혐의를 받는 한 남자의 집을 파괴했을 때. 군인들은 유독 친절한 티를 내며, 심지어 그 가족을 도와 집에서 가구를 들어내는 것을 도왔다. 그리고 불도저로 그 집을 깔아 뭉갰다. 

-한 이스라엘 병사가 테러리스트가 숨었다고 의심되는 팔레스타인 사람의 집을 수색했다. 이 때 어머니는 놀란 딸을 진정시키려 딸의 이름을 불렀고, 병사는 겁에 질린 소녀의 이름이 자기 딸의 이름과 똑같아 놀랐다고 했다. 감상에 사로잡힌 병사는 지갑을 꺼내 딸의 사진을 팔레스타인 어머니에게 보여주었다. 

#5 존 포드 감독 <수색자> 

-영화 끝부분의 주요 장면에서 어떻게 타니(곧 이웃)과 나 사이에 가로놓인 심연을 뛰어넘는 운동이 일어났는지 설명했다. 

-에단은 오랜 수색 끝에 마침내 소녀 시절 인디언에게 끌려간 조카 데비의 행방을 찾아내고 숙녀가 된 그녀를 구한다. 그런데 영화 내내 에단은 데비를 구출해 집으로 돌려보내려는게 아니라 죽일 생각이었다. 인종차별주의에 사로잡힌 에단은 오랜 세월 인디언과 함께 생활한 백인 처녀는 죽어 마땅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마침내 무방비로 쓰러져있는 데비를 발견한 에단은 그녀를 두 팔로 안아 올리고 포옹하며 집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심한다. 이런 태도 변화는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일반적 해석을 마지막 순간, 에단의 마음에 담긴 선함이 승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피핀은 이런 해석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가 보기에 정답은 잠깐 스쳐 지나가는 에단의 헝클어진 눈빛에 담겨있다. 

-그 눈빛은 홀연 되살아난 인간적 온기와 동정을 드러낸 것이 아니다. "눈빛은 무엇보다도 혼란, 곧 에단이 불현듯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돌연 자신이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다는 혼란을 보여준다." 이 헝클어진 눈빛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할 것은 틀림없다고 확신한 자신의 원칙이 부분적으로 허구와 상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깨달음이며, 에단이 백인으로서 품어온 정체성에 대한 회의이다. 우리(그리고 그)는 자신의 신념에 집착하지 않고 마침내 행동에 나설 때에만 비로서 그 신념의 폭과 깊이가 어느 정도였는지 깨닫는다. 

-에단은 데비를 마침내 이해해서 혹은 그녀의 감정 세계를 헤아리고 공감하는 통찰을 통해서 그녀를 살려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수 없다는 깨달음, 자신이 곧 타인이라는 깨달음으로 그녀를 살려주었다. 


#6 이집트의 속담 

"고대 이집트인의 비밀은 이집트인 자신에게도 비밀이다." 

-바로 그래서 이웃과 만날 때면 공감하거나 이해하려 시도하지 말고, 마음에도 없는 존중을 가장하는 대신, 너희나 우리나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구나 하며 낄낄대고 웃어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참고도서

-새로운 계급투쟁/ 슬라보예 지젝/ 자음과 모음/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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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협에 관한 소론

#1 우디 알로니 감독의 <정션48> 2016 

-난 이웃에 사는 여인들을 보호하려고 아랍어로 노래를 불러. 


#2 스파이크 리 감독의 <말콤 엑스> 

-대학에서 강연을 마친 말콤 엑스에게 한 백인 여성이 다가와 흑인해방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뭐냐고 묻는다. 말콤엑스의 대답은 "없소." 

-백인의 할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아니라 흑인 공동체 내부에서 시작되어야지 선량한 백인 진보가 선물하는 것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 


#3 무가베의 유엔연설  (허핑턴 포스트) 

-"우리는 게이가 아니다." 

-무가베는 동성애 운동이 글로벌 자본주의의 문화적 충격에 따른 현상이며, 전통적 사회ㅜㄴ화 양식을 위태롭게 한다고 이해했다. 

-이로서 반동성애운동은 반식민지운동과 같다는 논리로 성립 


#4 이슬람의 보코하람 (뉴스페퍼민트) 

-서구 교육을 금지한다. 

-특히 여성의 교육을 금지한다


#5 반투스탄 (브런치 블로그) 

-반투스탄은 흑인이 따로 모여 살도록 설정한 구역으로, 장기적 목표는 반투스탄을 독립시켜 아예 남아공에서 제외하는 것이었다. 


*위협을 바탕으로 민족성, 네이티비아nativia를 강조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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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할 사전

ㄱ : 김수영
김수영을 읽으면 뜨거워진다 자꾸 몸의 끝자리들이 타닥타닥 군불을 낸다 이토록 비루해서 아름다운 건 김수영뿐이다.

ㄴ : 노래
노래를 듣는다. 좋은 것들이 없다. 내가 좋지 않아서 이다. 케이팝 스타를 볼 때마다 절망에 가까움이 환희라는 걸 알아차린다. 모든 노래에는 가락이 있는데 이것이 문제다.

ㄷ : 도래
도래할 사전을 쓴다 언젠가 먼 길을 돌아온 자에게 건네주련다 오늘이 계속되고 있다는 믿음과 함께. 벤야민의 메시아의 문장이 될 것이다.

ㄹ : 록앤롤
록앤롤 앤드 엔드 록은 죽고 롤만 남아버린 때에 록은 부뢀한다


ㅁ: 미친 

어느 날 목욕탕에서 수음하는 사내를 본적이 있다 


ㅂ: 비비드 

늘 내게 너무나 선명해서 보기 싫은 것들이 몇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운동복이다. 


ㅅ: 슬픔 

이성복은 이렇게 남겼다. 

"유독 왜 슬픔만이 세상 끝까지 뻗쳐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기쁨 뒤에 슬픔이 오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어째서 슬픔뒤에 다시 슬픔이 남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재난 그 이후, 슬픔은 진화해나간다는 확신이 든다. 


ㅇ: 아가 

이 단순한 자음과 모음의 결합

세상 모든 말의 첫 시작으로서의 ㅇ (이응)과 

세상 모든 말의 첫 각도로서의 ㄱ (기역) 


ㅈ: 줄 

당신과 나 


ㅊ: 출근 

오늘의 뉴스 "월 200만원 벌면 1억 모으는데 42년?.."허탈" 


                                             < 표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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