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순 "돼지라서 괜찮아" -태어나는 돼지들을 위하여


                                                                                                          <수유너머 인문사회과학연구원 봄학기 에세이>



김혜순의 “돼지라서 괜찮아”
-태어나는 돼지들을 위하여- 

                                                                                                                                                        서한영교


1. 포르노적 부활

전 세계의 섹스심벌, 마릴린 먼로. 벌거벗은 몸으로 침대 위에 누워 엉덩이를 흔들면 남성-남근들은 마릴린 먼로가 덮고 있는 이불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듬었다. 치마 밑으로 솟구치는 바람이 되어 그를 향해서 있는 힘껏 불었다. 그가 상연한 세계로 들이닥친 남성-남근들의 탐욕으로 충만한 시선은 그를 실제보다 더 섹시하게 만들었다. 


화면같이 청결한 세상에서 살았었다고

은빛 비행기를 타고 가서

거울 속처럼 깨끗한 침대 위에

누워 이마에 손을 올렸었다고

하늘하늘 치마를 걷었었다고 하지 마라


(...)


양손에 돼지 가슴이 담긴 봉지를 든 여자가

아까부터 같은 얘기를 계속 중얼거리며 걸어가고 있다 

오줌 같은 비가 한 모금 두 모금 떨어지고 있다



 -『마릴린 먼로』부분



남성-남근은 “청결한 세상에서”, “거울 속처럼 깨끗한 침대 위에/ 누워”, “치마를 걷었던” 그를 보고 있다. 그 시선 아래에서 마릴린 먼로의 배역이 결정되고, 그 배역 속에서 마릴린 먼로는 “같은 얘기 계속 중얼 거리”게 하는 배역을 맡긴다. 남성-남근이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대답: 자기 욕망. 이 대답에 대한 라캉-지젝의 대답. 대타자에 의해 전도된 자기욕망. 즉, 도착적 시선(빛) 아래서 남성-남근이 본 것은 그들 자신의 욕망이다. 마릴린 먼로가 실제로 느꼈을 “유배지에 있는 것처럼” 느끼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며 4.5mg의 수면제 님부탈과 8mg의 안정제 바르비루투를 집어 삼켜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관해서는 보이지 않다. 마릴린 먼로는 그저 스크린 위에 있을 뿐이다. 남성-남근이 상연하고 있는 스크린 위에 그들의 환상을 위해 치마를 걷어 올리는 배역을 맡겼을 뿐이다. 마릴린 먼로는 정확하게 욕망의 원인-대상으로 자리 잡는다. 그래서 마릴린 먼로는 영원히 “청결한 세상”인 환상 스크린 속에서 “같은 얘기를 계속 중얼 거리”며 반복된다.


그리하여 최후의 배역에 철컥 달라붙는다


내가 싼 것 위에 몸을 철퍼덕 싸는 배역

영혼이 빠져나간 다음 쇠갈고리에 걸리는 배역

뭉개지며서 내가 내 혀 맛을 볼 수 있게 되는 배역



-『마릴린 먼로』부분

“청결한 세상” 속에 살고 있는 마릴린 먼로의 “최후의 배역”은 수면제를 집어삼키고 맞이한 죽음이었을까. 아니다. 그들은 다른 배역을 맡길 준비하고 있다. 그것은 포르노속으로 마릴린 먼로를 등장시키는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비밀(속살)을 간직하며 환상을 작동시키고 상징으로서의 마릴린 먼로를 발가벗길 예정이다. 2011년 마릴린 먼로의 포르노 필름이 경매에 붙여졌다. 약 2억 7000만원에 낙찰된 포르노 필름 속에 마릴린 먼로는 마침내 상징이 제거되어 벌거벗은 채 등장했다. 먼로의 마지막 배역이 상연되었던 것은 극장이 아니었다. “오줌같은 비가 한 모금 두 모금 내리는” 어둡고 침침한 모니터 위였다. 섹스 심벌 마릴린 먼로가 완전히 벌거벗었을 때, 상징은 해체되었다. 그저 벌거벗은 살덩어리의 실재로 등장했다.

아무래도 돼지를 십자가에 못 박는 건 너무 자연스러워, 의미없어

아무래도 돼지가 죽어서 돼지로 부활한다면 어느 돼지가 믿겠어?



-『돼지는 말한다』부분


먼로를 “십자가에 못 박는 건 너무 자연스러워, 의미없어” 하는 돼지(포르노 관객)는 돼지가 죽어서(환상 스크린 속 먼로) 돼지로 부활(포르노 모니터 속 먼로) 시켰다.
섹스심벌이라는 상징을 “의미없어”라며 거부하였다. 상징도 없고, 의미도 없는  벌거벗은 살덩어리 먼로로 부활시켰다. 상징적 돼지에서 벌거벗은 포르노 돼지로 부활시켰다. 오늘날에는 마릴린 먼로 뿐만 아니라 세월호 참사라는 사회적 상징을 제거하고 희생자들을 퉁퉁 불은(벌거벗은) 어묵으로 부활시키기도 하고, 5.18 광주민주화항쟁 당시 시신들을 두고 홍어로 부활시키기도 한다. 오늘날의 포르노 관객들은 상징적 의미를 거부하고 벌거벗은 실재와의 충돌에서 오는 효과에 환호한다. “오줌같은 비가 한 모금 두 모금 떨어지”는 포르노 모니터 앞에서 환호하고 있다.

하늘에 분홍 당신 떠간다 발가벗은 당신

나는 당신 알몸 쳐다보기 좋아서 손뼉을 짝짝짝 친다



(...)

분홍색 당신 몸속에서 기지개 켜는 시간 너무 좋아서

당신이 누구인지 누구의 딸인지 누구의 엄마인지 모두 잊고서
내가 네 개의 발에 구두 신고 짝짝 짝짝짝 손뼉 발뼉을 친다

-『핑크 피그 플루이드』부분


포르노 관객들은 “당신이 누구인지 누구의 딸인지 누구의 엄마인지” 전혀 상관없이 “짝짝 짝짝짝 손뼉 발뼉을” 치며 환호한다. 상징을 발가벗기고, 의미를 발가벗기고 남는 것은 오직 외설적 효과뿐이다. 


돼지다, 도무지 밖을 본 적 없는 돼지다, 내내 돼지다, 우울한 돼지다, 늑대가 온다 외치는 돼지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돼지를 왕으로 뽑은 돼지다, 오 멋진 시궁창! 외치며 베개를 껴안는 돼지다, 뒈질 돼질 낳아주신 엄마를 잡아가면 좋겠네 혼자 웃는 돼지다, 온 세상이 다 살쭉이라고 생각하는 입술이 부르튼 돼지다, 4XL돼지다, 침대에 꽉 찬 돼지다, 그 이름 도무지 돼지다, 바다 건너란 말만 들어도 벌벌 더는 돼지다, 고개를 들어본 적 없는 예예 돼지다,
(…)
눈동자에 무엇을 껴입었니 돼지, 왜 돼지가 돼지인 줄 모르나 돼지, 사진은 아는데 거울은 아는데 너만 모르는 돼지, 탄식 돼지, 후회 돼지, 이빨 뽑히고 꼬리 잘린 다음 입 안에 혼자 남은 외로운 혀 돼지, 그러나 입만 벌리면 돼지 돼지 소리가 나는 돼지, 고기 돼지




-『뒈지는 돼지』부분 


그들은 “의미없어”를 외치며 돼지로 퇴행-부활했다. 자기 거울 이미지 속으로 부활했다. 타자들의 시선이 차단된 자신들의 “오줌같은 비가 내리는” 방 모니터에서 부활했다. 그 누구도 그들을 보고 있지 않다. “도무지 밖을 본 적 없는 돼지”들은 “고개를 들어본 적 없는” 돼지들이다. 돼지들이 있는 곳은 바라보는 시선과 (타자에 의해)보여지는 응시의 간극이 지워진 자리에 등장하는 포르노적 거울의 방이다. “밖을 본 적 없는 돼지”들이 거주하는 자리다. 돼지들의 “눈동자에 무엇이 껴입”혀있는데 그것은 오직 바라볼 뿐인, 시선의 벽이다. 돼지는 돼지를 보고(시선) 있지만 그런 돼지를 바라보고(응시) 있는 돼지를 위한 자리는 없다. 오직, 볼 뿐. 시선과 응시의 간극에서 발생하는 환상의 자리도 없다. 비밀도 없다. 수수께끼도 없다. 오직 벌거벗길 뿐이다.
라캉-지젝에 의하면 포르노는 “타자의 응시와 주체의 시각의 이와 같은 일치”로서 “우리의 시각과 타인의 응시 간의 이러한 중첩, 이러한 일치"라고 말한다. 이는 거울단계의 아이들이 상상적 자아를 형성하는 시선과 응시의 거리가 중첩되는 것과 같다. 그래서 “포르노그라피는 본래 도착적”인데 포르노그래피의 도착성은 “갈 데까지 다 가서 우리에게 지저분한 세부들을 전부 다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포르노그래피의 형식이 “선험적으로 도착적인 위치를 점유하도록 강제”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응시와 시선의 거리를 메워버리는 것이 포르노라는 것이다. 포르노는 응시와 시선의 간극을 지워버림으로서 “마비된 대상-시선”으로 환원한다. “타인 내에 있는 대상-응시의 지점을 알고도 놓치거나 축소”함으로서 포르노는 상상계에 머무른다. 먼로의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은 그곳에 없다. 포르노는 닫힌 공간에서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확인하고 있을 뿐이다. 이곳이 포르노 원룸이다.
돼지들은 포르노 원룸에 갇혀있다. 그곳에서 “왜 돼지가 돼지인 줄 모르나 돼지”로 남는다. 돼지는 돼지인줄도 모른다. 알 수가 없다.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다. 그곳은 먼지 하나 없는 데카르트의 원룸이고, 헤겔의 “순수한 자기관계”의 원룸이다. 포르노 원룸 안쪽에 지내고 있는 돼지들의 실재는 “이빨 뽑히고 꼬리 잘린 다음 입안에 혼자 남은 외로운 돼지”이고 혼자 웃는 돼지”이고 “고개를 들어본 적 없는 예예 돼지”이며 “일평생 나를 타고 놀아”나는 돼지이다. 하지만 돼지들은 “무엇보다 제가 돼지일 줄 모르는” 돼지들이다. 그들은 상징계로의 진입을 거부하며 그저 “우는 소리”를 “비명”으로 지르며 “교성”을 내뱉는 포르노 속의 마릴린 먼로를 보고만 있다.



2. 포르노 원룸

먼로의 포르노가 끝나고 포르노 관객들은 충만해졌을까? 기쁨과 환희로 충만한 신체가 되어 삶의 의지로 가득한 주체로 이행하게 되었을까? 대답: 아니다. 보다 나은 대답: 아니, 그들은 또 다른 포르노를 찾아 나선다. 보다 완전한 대답: 포르노 원룸을 응시하고 있는 대타자의 시선을 못 본척(도착증)하거나 그 시선을 지워버리면서(편집증) (퇴)행위로의 이행 중이다. 

여자는 굴 껍데기 속에
굴처럼 미끈거리는 집을 지었습니다

집은 굴처럼 쉽게 상하고 입속에서 미끈미끈 씹혔습니다


(...)

엄마는 입속에다 아기를 길렀습니다

아기는 어마를 아껴서 파먹었습니다
아기가 여물어갔습니다

엄마! 세상에서 제일 먼 곳이 어디야
먹을게 없는데지!
나는 대답했습니다


(...)

새끼는 하루 종일 먹을 거 먹을 거 하고 

나는 아는데 내 배속의 끼룩끼룩
늘 배고픈 돼지는 모르는 것

그것은 나의 끝 

썩은 굴처럼 문드러질 나의 몸젖


갈매기 한 마리 떨어진 제 눈알을 쪼아 먹고 있네



-『키친 컨피덴셜』부분

그들이 퇴행한 곳은 굴 껍데기 속 같은 “엄마의 입속”이다. “엄마의 입속”에서 아기는 자란다. 엄마와 나의 동일시를 방해하는 응시로부터 숨기 위해 입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붉은 살덩어리가 꿈틀거리는 그곳에서 아이는 “엄마를 아껴서 파먹”으며 “여물어”가고 있다.

엄마의 가슴이 아이스크림처럼 폭폭 떠 먹히고 실밥이 풀린 손들이 너덜너덜 국 냄비 속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곳 이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서쪽 하늘을 숟가락으로 닥닥 긁어 먹는 달의 뼈를 고아 뽀얀 국물을 만들고 거기에 땅속 시신들의 육즙을 곁들여 마시는 곳 이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키친 컨피덴셜』부분


“차마 꿈엔들 잊”혀지지 않는 엄마의 입속은 엄마와 자신의 완전한 동일시가 이루어졌던 거울 안이다. 엄마를 “아이스크림처럼 폭폭 떠”먹을 수 있었던 거울의 안이다. 포르노 관객들은 꿈속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다. 도착적 자아의 탄생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타자라는 창문(시선)이 없는 포르노 원룸(입속)에 고집스레 존속(insist)하려한다.
엄마가 있는 부엌(입속)에서는 계속해서, 쉴 새 없이 음식들이 만들어진다. 그곳의 음식들은 실감은 나지만 질감이 없다. 상상적으로 실감나지만 실재가 없기 때문이다. 그 곳에서 “새끼는 하루 종일 먹을 거 먹을 거 하고” 보채고 엄마는 “파란 칼”을 꺼내들어 “늘 배고픈 돼지는 모르는” 음식을 내놓는다. 먼로의 포르노가 끝이라도 또 끊임없이 다른 포르노를 떠도는 것과 비슷합니다. 배가 부르다는 것은 “그것은 나의 끝”을 상징하기에 계속해서 먹어도 속이 더부룩하지 않는다. 실감은 나지만 질감이 없는 세계, 그곳에 고집스레 존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는 끊임없이 요리한다. 쓰레기와 요리가 동시에 만들어진다. 내가 먹는 것이 쓰레기인지, 요리인지 알 길이 없어진다. 자본주의 체제는 이것을 정확하게 노린다. 끊임없이 잉여를 생산한다. 잉여가 가치를 가지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생산되어야 한다. “엄마! 세상에서 제일 먼 곳이 어디야” 엄마는 대답한다. “먹을게 없는데지!” 길러진 아기에게 가장 먼 곳은 바로 엄마가 없는 곳, 엄마의 외부이다. 타자의 응시를 받아들이는 곳이다. 그곳은 길러진 아기에게는 먹을 것이 없는 곳이다. 엄마와의 상상적 동일시 속에서만 아기의 먹을 것은 요리되기 때문이다.

돼지9 길러서 먹어주세요

돼지9 먹고 울어주세요

돼지9 새끼도 낳아드릴께요

돼지9 슬픈 인생이었다고 한 번만 말해주세요

돼지9 나를 잘 싸서 준비해주세요

돼지9 창자는 줄에 걸어주세요

돼지9 하나도 버리지 말아주세요

돼지9 트림은 그렇게 심하게 말아주세요


맛있는 걸 당신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


모두 이름이 같은 돼지


돼지들이 걸어온다

다 먹어 치웠는데 또 걸어온다

배가 불러 죽겠는데 또 걸어온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당신』부분


포르노는 계속된다. 포르노 관객들이 깨닫지 못하는 거울이미지는 결국 대타자의 시선에 의해서 만들어진 “가짜”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 “가짜”를 알아차린다고 하더라도 포르노 관객은 “다른 가짜”로 눈을 돌릴 뿐이다. “가짜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그 가짜들은 이름이 없어서 이름이 모두 같다. “돼지9 원피스 돼지 돼지9 투피스 돼지 돼지9 넥타이 돼지” 처럼 끊임없이 만들어진다. “돼지9”들은 포스트모던하게 분열하며 증식한다. “다 먹어 치웠는데 또 걸어온다/ 배가 불러 죽겠는데 또 걸어온다” 이는 오이디푸스의 금지를 반대하면서 실재로 나아가 해방되길 원했던 들뢰즈의 분열증자의 그것과도 닮아있다. 배가 부르면 그만 먹어야 한다는 금기를 내면화하기를 거부한 분열증자의 그것 말이다. 돼지들은 금기 없이 무한 증식한다. 그 어떤 곳이어도 상관없다. 


구정물 가득 든 몸뚱이

한 우리에서 꿀꿀거리는

돼지들 어째서 다 똑같이 생겼는지

(...)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건

엄마 되고 싶은 애새끼들

아빠 되고 싶어 훌쩍거리는 애새끼들


아빠는 아빠 만들려고 나를 기르고요

엄마는 엄마 만들려고 나를 길러요


몸에 달라붙은 엄마아빠 냄새 때문에

몸 흔들어 털어버리는 중이에요

나는 시방 더러워요

엄마아빠 그림자 얼룩진 몸뚱이는 정말 더러워요


나 나 나 나는 죽지만 엄마아빠 영원히 살아요


엄마는 기름진 구름처럼 더럽고요

아빠는 더러운 물이 끓어서 더 더러워요 

-『어두운 깔깔 클럽』부분

아이는 어머니와의 동일시에 실패할 운명을 타고났다. 거울 속에 자신이 확인한 거울이미지가 어머니의 욕망이라는 것을 확인한 아이는 어머니와 자신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거울이미지 속에서 자신이 본 것은 스스로의 욕망이었으나, 사실은 그것은 자신의 욕망일 거라고 여겨지는 대타자(어머니)의 관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아이가 그러한 분리를 받아들이 않는다면. 즉, 어머니와의 동일시를 고집한다면. 그래서 어머니의 시선을 지워버린다면. 아이는 상징계의 질서로 입문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상상계를 고집스럽게 집착하는 도착증적 자아로 퇴행한다. 오이디푸스콤플렉스와 같은 주체 통과의례를 성공적으로 겪지 못한 아이는 어머니-되기의 불가능성을 받아들이고 아버지”처럼 되기”를 겪지 못한다. 주체는 비-주체로 퇴행한다. “나는 아버지가 아님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라는 역설이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이의 욕망은 근친상간적 욕망을 포기하지 못한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것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것은 “구정물 가득 든 몸뚱이”일지라도 말이다. 이제 “아빠는 아빠 만들려고 나를 기르고요/ 엄마는 엄마 만들려고 나를 길러요”처럼 “나는” 아빠와 엄마의 보충물로서 자리 잡는다. 그래서 “나는 시방 더러워요/ 엄마아빠 그림자 얼룩진 몸뚱이 정말 더러워요”가 된다. 아이의 포르노적 동일시는 자신을 끊임없이 “나 나 나 나는 죽지만 엄마아빠 영원히 살아요”로 직진한다.
라캉-지젝은 이를 두고 “영원한 생존이라는 남근적 세계는 (성)도착의 세계이다.(...) (성)도착이란 죽음과 성이라는 실재에 저항하는 방어(...)뿐만 아니라 죽음의 불가피성에도 저항하는 방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도착적인 시나리오가 상연하는 것은 ‘거세에 대한 부인’이다. (...)도착자의 불멸성은 코미디적인 불멸성이다.” 라고 한다. 주체의 입문의 계기가 되는 거세(언어)를 부인하며 “죽음만 싸지르는 엄마아빠”를 선망하며 동일시에 대한 고집을 피우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퇴행적 도착증은 거세공포에 시달리며 엄마아빠의 파편화된 신체의 일부 속으로 미끄러져 “엄마의 혹은 아빠의 창자가 되려는 창자를 흔들고 토하는 밤”의 시간을 맞이하게 된다. 페니스로의 퇴행 충동은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건/ 엄마가 되고 싶은 애새끼들/ 아빠 되고 싶어 훌쩍거리는 애새끼들”을 만든다. 포르노가 상연되고 있는 포르노 원룸에서 타자의 응시가 지워진 자리에서 도착적 돼지는 이 세계가 어서 망해버리길, 전쟁이라도 나서 다 리셋 되어 버리길 바라며 무한히 반복되는 죽음충동에 시달린다.



3. 철근콘크리트 천황 폐하!

나는 지금 벽 앞에 앉아 꿀꿀거리는 돼지 기분이에요
시간을 백열등처럼 매달아 놓고
불안이 마련해준 특별 방석에 앉으셔서
돼지더러 돼지를 버리라 닦달하시니 대단하시네요

-『철근콘크리트 황제 폐하!』부분
 

포르노에 손뼉 치는 돼지들은 “철근콘크리트 황제 폐하!”에 의해 사육된 돼지들이다. 돼지들은 포르노 원룸에 앉아 “벽만 바라보”며 “시간을 백열등처럼 매달아 놓고/불안이 마련해준 특별 방석에 앉”아 “꿀꿀”거리고 있다. 이곳은 창문하나 없이 사벽이 철근콘크리트로 지어진 원룸이다. 

도와달라는 소리 들어본 적은 있나요?

(다들 그렇게 외치니까)

왜 나보고 자꾸만 나를 버리라는 거예요?

엿 같다니까요? 정신과 의사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경찰도 아니면서

이 세상은 후손 거라면서 왜 자꾸 셋방살이하는 기분이 들게 해요?

왜 새벽에 일어나 벽만 바라보라는 거예요?

-『철근콘크리트 황제 폐하!』부분
 

이곳에서 “철근콘크리트 황제 폐하!”는 “기분이 엿 같아 본 적은 없으세요? 도와달라는 소리 들어본 적은 있나요?”라는 소리를 들어도 듣지 않는다. “왜 나보고 자꾸만 나를 버리라는 거예요?”라고 묻게 만든다. 아무리 소리쳐도 대답은 없다. 왜? 꿀꿀거리는 소리만 남았기 때문이다.


속의 아이는 절대 성장하지 않고 징징대고 껄떡거리는데
왜 내가 벽보고 나를 버려야 해요?
내가 어디있어서 나를 버려야 돼요?

-『철근콘크리트 황제 폐하!』부분
 

상징을 제거한 포르노 돼지들의 목소리를 오직 꿀꿀거리는 것뿐이다. 꿀꿀거리며 “징징대고 껄떡거”릴 뿐이다. 이쯤에서 철근콘크리트 황제 폐하!가 바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드러난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전략은 비-주체화로 “서사적 의미를 생성시키지 않고 통일적 신체를 파괴시키고 신체들을 찢어놓음으로서 죽음충동을 부추긴다. 비-주체되기를 강요받고 어떻게 욕망해하는지 훈육 받는다. 그러한 욕망에 길들여져 무력하게 자본주의적 시장 너머로 자신들의 욕망을 바라 볼 의욕조차 들지 않게 만드는 편집증적 체제“이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전략에 포섭된 비-주체들은 “절대로 성장하지 않고” 오직 “벽만 바라보”며 사육되고 있다. 사육된 돼지들의 배역은 전시되는 것이다.  


나는 돼지

노출증 환자 돼지



나는 내 오물을 나의 독자들에게 나눈다



만져봐 이보다 더 부드러울 수는 없어



내가 쓴 것을 돼지처럼 공중에 매달아주세요



뚱뚱보 독재자를 광장에 매달 듯이



(...)
내 입에 커피향이 열릴 때 모르는 얼굴이

모르는 무기를 들고 성큼성큼 내 안으로 들어온다

은박지가 벗겨지자 검푸른 밤하늘에 새콤거리는 발렌타인 데이의 별들

새로 만든 무덤의 얼굴이 소녀의 얼굴처럼 여물어 간다



-『요리의 순서』부분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모든 것을 전시의 강제 아래 복속시킨다. 돼지들은 전시되어야 한다. 발가벗겨진 채로 “노출증 환자 돼지”가 되어 매끈한 삼겹살을 보여주어야 한다. 전시되었을 때에만 가치를 획득할 수 있다. 전시가치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가볍게 무시한다. “전시가치의 관점에서 존재한다는 것 자체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기 못하고 오직 “보이는 한에서만 가치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시가치는 “완성된 자본주의의 핵심”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이렇게 전시되는 사회는 포르노적 사회이다. 모든 것이 겉으로 나오고, 벗겨지고, 노출된다. 포르노적 전시의 결과로 모든 것이 “어떤 비밀도 없이 즉각적인 소비에 내맡겨진” 상품으로 전락한다.  진열대 위로, 광고판 위로 전시한다. “광장에 매달 듯” 전시하고 “공중에 매달아” 전시한다. 전시가치를 생성시키는 것은 그것의 의미가 아니라 연출적 효과에 있다. 시선의 아우라가 제거된 페이스face를 전시하는 북book 은(페이스북) 너you라는 튜브tube로(유튜브) 전송된다. 포르노적 구경거리로 전시하도록 강제하는 자본주의 시선 아래 페이스face는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인스턴트instant하게 ‘좋아요’로 텔레그램telegram(인스타그램)된다. 의미는 죽음마저도 즉각적instant으로 생중계하는 촉각의 속도를 따라올 수 없다. 느려터진 의미의 속도는 ‘좋아요’의 촉각적 속도를 따라올 수 없다. 의미의 고유한 커뮤니케이션은 폐기되고 “이보다 더 부드러울 수 없”는 촉각적인 것이 지배한다. 그것은 직접적이다. 그래서 포르노적이다. 전시될 수만 있다면 벌거벗은 “오물”도 상관없다. 그 “오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 “오물”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중요하지 않다. 전시의 시뮬라르크 속에서 “오물”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어떤 “오물”이라도 전시가치를 인정받는다면 “모르는 얼굴”들이 “성큼성큼 내 안으로 들어”와 ‘좋아요’를 눌러줄 것이다. 이러한 망상을 두고 프로이트는 “편집증은 끝까지 구경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도 맹목적인 믿음으로 그들이 그 자리에 있다고 추정한다””고 한다. 이러한 망상적 믿음은 불분명하게 “모르는 얼굴”들을 기다리게 하며 편집증을 작동시킨다. 철근콘크리트 돼지가 강제하는 전시의 명령 아래 포르노 돼지들은 편집증적 망상에 사로잡힌다. 

우리는 미래의 어느 날 다큐멘터리를 찍는다. 영원히 생존할 자아를 위한 장기 농장 프로젝트 촬영 중이다. 그중에 나는 제일 예쁜 배우다. 이 생각이 내 연기에 최고로 도움을 준다. 나는 당신의 염통이 되려고 길러진다. 나는 당신의 폐가 되려고 길러진다. 나는 당신의 피부가 되려고 길러진다. 나는 당신의 쓸개가 되려고 길러진다. 심지어 나는 당신의 뇌가 되려고 길러진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나는 당신의 눈치를 보면서 얼른 당신의 눈동자를 내 눈동자로 바꿔준다. 

-『돼지가 돼지에게』부분


자본주의는 “영원히 생존할 자아” 중의 자아이다. 영원한 생존을 위해 편집증적 망상을 개발해야 한다. “나는 제일 예쁜 배우다. 이 생각이 내 연기에 최고로 도움을”주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나르시시즘적인 섬과 에고들로 이루어진” 고립을 가속화한다. 이는 상징계와 단절된 상상계가 주체를 지배하는 형식인 편집증이다. 지젝은 “이데올로기는 편집증적 구조”로 본다. 편집증적 망상이 전적으로 타자의 것인 것처럼, “당신의 눈동자를 내 눈동자로 바꿔”서 세계를 구성한다. 철근콘트리트 돼지의 시선이 이제 포르노 돼지의 시선을 완전히 장악한다. 나는 이제 “당신의 염통이 되려고 길러진다. 나는 당신의 폐가 되려고 길러진다. 나는 당신의 피부가 되려고 길러진다. 나는 당신의 쓸개가 되려고 길러진다. 심지어 나는 당신의 뇌가 되려고 길러진다.” 편집증적 망상은 전적으로 타자(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것이다. 

내가 완전히 당신이 되는 날, 예예 주인님 내 염통이 당신에게 가서 인사하는 날을 상상해본다. 그런데 고깃덩어리만 남은 내가 내 얼굴을 알아볼까? 당신은 연두색 형광조끼를 입고 와서 내 사지를 묶어서 질질 끌고 간다. 당신은 내 간, 당신은 내 콩밭, 당신은 내 심장, 당신은 내 눈알, 당신은 내 피부, 간절히 울부짖어도 당신은 내가 당신인 줄도 모르고 나를 끌고 간다. 곤봉으로 가끔 쑤셔대면서 간다. 당신은 돼지 사찰 모독 횡령 고문 협박으로 감옥에 가야 한다. 당신은 나를 이런 암덩어리 하면서 침대보다 작은 우리에 처박는다. 

-『돼지가 돼지에게』부분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사찰 모독 횡령 고문 협박”으로 포르노 돼지들을 “침대보다 작은 우리에 처박는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우리는 돼지로 키우고, 돼지로 가두고, 돼지로 살게 하며, 돼지의 표정을 짓게 한다. 편집증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신체를 갈갈이 찢어놓음으로서 죽음충동을 부추긴다. 이렇게 길러진 돼지는 벌거벗겨진채 “고깃덩어리만 남은 내가 내 얼굴을 알아볼까?”라는 질문 앞에 선다. 아니. 아니. 전혀 알아 볼 수 없을 것이다. 또 다시 포르노가 시작 될 것이다. 분명하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포르노를 계속해서 상연하며 돼지를 또 다시 가둘 것이다.



4. 돼지 유령이 찾아왔다

무음 청소기로 소리를 모두 빨아들인 것 같은 방 안

이름 모를 나무의 이파리들이 흐릿한 커튼을 어루만지는 방 안


(...)

하루 종일 제가 낳은 똥만 바라보면서 똥을 질질 싸는 선


(...)

나는 돼지인 줄 모르는 돼지예요

나는 돼지인 줄 모르는 선생이에요

매일 칠판에 구정물만 그리죠

나는 몸 안의 돼지를 달래야 하는 환자예요

그러고도 사람들 몸 안에 좌정한 돼지만 보여요

하루만 걸러도 냄새 진동하는 이 짐승을 어찌할까요

하루만 먹이지 않아도 꽥꽥 소리를 지르는 이 돼지를 어찌할까요


(...)

나는 돼지인 줄 모르는 돼지예요

두통이라는 뚱보 여자예요

구토라는 뚱보 여자의 그림자예요

날개도 없는 검은 기름가방이예요

제 몸을 제가 파먹는 돼지예요

-『돼지선』부분


포르노 원룸에 살고 있는 도착적 자아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라는 편집증적 방주인에게 월세를 꼬박꼬박 내며 이상적 자아를 유지한다. 방은 안락하고 제법 괜찮은 편이다. 단, 돼지로 머물러만 있다면 창문 없는 원룸이라도 꽤 괜찮은 편이다. 원룸 안에는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상연되는 포르노-모니터도 있다. 월세가 좀 밀려도 방 빼! 하지 않는다. 게다가 지루하지도 않다. 이 정도면 “돼지라서 괜찮아”라고 말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오히려 ‘돼지라서 다행이야’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하지만 “무음 청소기로 소리를 모두 빨아들인 것 같은 방안”인 포르노 원룸에도 “이름 모를 나무의 이파리들이 흐릿한 커튼을 어루만”질 때가 있다. 그것은 이 생활이 모두 끝날지도 모른다는, 공포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이다. 타자의 응시가 내 안으로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나는 돼지인 줄 모르는 돼지”라는 타자의 관점을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 타자의 관점에서 나는 “몸 안의 돼지를 달래야 하는 환자”이고 “두통이라는 뚱보 여자”이고, “구토라는 뚱보 여자의 그림자”로 보여질지도 모른다는 공포 말이다. 그런 이미지의 원초적 이미지들 속에서 결국 스스로 “제 몸을 제가 파먹는 돼지”라는 걸 인정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거세-공포 말이다. 포르노 원룸의 문틈으로 나란히 누운 한 줄기의 빛(시선)이 내가 돼지인 줄 모르고 있는 돼지라는 것을 비추어주는 거울 밖의 실재와의 조우한다. 


우리는 돼지로 돌아온다
먹고 싸는 이 돼지 자석에 철컥 달라붙는다
(...)
우리는 뜨거운 돼지로 돌아온다
마지막 배역을 맡으러 돌아온다


-『마릴린 먼로』부분 


실재와의 조우는 “유령적인 환영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상징적인 소통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곳에서, 즉 세계가 실패한 곳에서 출현”한다. 유령의 귀환은 “먹고 싸는 이 돼지 자석”으로 상징적 채무가 아직 청산되지 않은 지점에서 “돌아온다”. 상상계의 거울 속에서만 머무르려고 고집을 피우고 있는 거울이미지의 자아가 상징계로의 진입에 실패했던 곳에 “돼지로 돌아온다”. 상징화에 저항하는 수수께끼 같은 그곳에 실재가 놓여있다. 실재와의 조우에서 “일어나는 충격적인 쇼크는 자동인형처럼 움직이던 주체를 탄생시키고 어떤 간극을 여는데, 주체를 이를 상징화하려는 (궁극적으로 실패할) 노력들로 이 간극을 자유로이 채워 넣게 된다. 자유란 궁극적으로 외상적 마주침에 의해 개방된 공간에 다름 아니며 그 공간은 주체의 우발적/ 부적절한 상징화들/ 번역들로 메워지게 된다.” 상상계의 자아는 다시금 자신이 실패했던 증상(Sypmtom)의 문고리를 잡는다. 그리고 드디어 거울 밖으로 (쫓겨나듯)나간다.

오 더러운 년 간다

두들겨 맞고 간다

오 눈부신 망할 년 간다

도망간다

오 검게 반들거리는 시궁창 같은 년 간다

내뺀다


저년을 막아! 회초리를 든 사람들이 몰려온다

나혼자 살게요

버림받은 년
돼지 같은 년
달아난다

(...)


더러워 더러워 더러워 나 참 더럽네

그냥 꿈속에서 살걸 여긴 왜 왔을까

죽어라 돼지
너 왜 젖 먹니
너 왜 자라니

나 같으면 안자라겠다

주인님 오셔서 손가락 얼마나 굵어졌나

살은 얼마나 피둥거리나 만져보는데

나 같으면 안 자라겠다

오 그리운 돼지가 간다
쫓겨간다


오 한 여자가 돼지를 나가려고 한다


건들지 마 건들지 마
돼지를 건들지 마
더 이상

반토막난 흑돼지

그림자가 그녀에게 매달려 간다



-『지뢰에 붙은 입술』부분 


거울 밖의 타자(언어)의 세계는 괴물들로 가득하다. “회초리를 든 사람들”이 뒤쫓는다. 쫓기는 죄목은 “돼지를 나가려고” 한 것이다. 돼지(거울)의 바깥으로 나가려고 한 것일 뿐인데 뒤쫓는 사람들은 말한다. “그냥 꿈속에서 살”지. 응? “나 같으면 안 자라겠다”. 응?. 거울 안에서 살을 피둥피둥 찌우며, 손가락을 굵게 만들어준 주인님의 시선 아래서 살아가면 돼지? 왜 나가려는 거야?. 응? 거울 밖을 나가려고 하자마자, 고통스러운 타자의 시선들이 시작된다. 포르노 원룸 밖으로 나가려고 했던 것뿐인데, 방주인(이데올로기)은 매몰차게 뒤쫓는다. 뒤쫓기 때문에 달아난다. 뒤쫓지 않았으면 다시 방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는데 쫓아오기 때문에 달아난다. 맹렬히 달아난다. 포르노 원룸으로부터 달아나는 “반토막난 흑돼지/ 그림자가 그녀에게 매달”고 가야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야 한다. 


떠나면서 돌아본다
구름 같은 나를 담은 자루를
변덕 많은 그림자를 기수처럼 태우고
검은 땀 흘리다가 이제야 다리를 꺾는 돼지 한 마리를
나에게 어울리는 맞춤복은 아니었지만
벗어놓은 열 가락 살 장갑과 열 가락 살 양말
그위에 작은 창문처럼 손톱과 발톱
그 창문 뒤에서 내다보는 한 사람
깨우는 약
재우는 약
나가는 약
토하는 약
약 먹고 토하는 약

죽은 느낌표처럼 쓰러진 몸을 흰 천에 싸서 남겨두고 이제 떠난다

저것을 벗고 떠도는 것이 또 나라고 굳게 믿으면서


-『구천무곡』부분

 
돼지는 떠난다. “떠나면서 돌아본다” 돌아본 그곳에는 나에게 맞춘 듯 딱 맞다고 상상했던 것들이 “나에게 어울리는 맞춤복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벗어놓은 열 가락 살 장갑과 열 가락 살 양말”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한 때는 나의 것이었으나, 지금의 지금은 나의 것이 아닌 것들을 바라본다. 그것은 거울의 “창문 뒤에서 내다보는 한 사람”에 의해서 투여되었던 “깨우는 약/ 재우는 약 /나가는 약 /토하는 약 /약 먹고 약 토하는 약”으로 인해 느낌표조차 “죽은 느낌표”가 되어버린 곳이었다. 이제 떠날 시간이다. 떠나기 위해서는 “저것을 벗고 떠도는 것이 또 나라고 굳게 믿으면서” 떠나야 한다. 믿어야 한다. 거세공포를 넘어서 자기각성의 전율로 이행한다. 안녕, 거울들아. 안녕, 돼지들아. 안녕. 안녕. 안녕. 내 것이지만 내 것이 아니기도한 것들아. 안녕. 내 것이었으면 했으나 단 한 순간도 내 것이 될 수 없었던 것들아. 안녕. 안녕. 안녕. 이제 “쓰러진 몸을 흰 천에 싸서 남겨두고 이제 떠난다” 안녕. 꿈속에서나 만나자. 



5. 저게 나야, 저 얼룩진 얼굴말야

몸 버리고 가라는데 몸 데리고 간다
돼지 버리고 가라는데 돼지 데리고 간다

꿈속에서 나가
이제 그만 새나 되라는데
몸속에서 새가 운다

이제 그만 안녕 너 없이도 살 수 있어

돼지가 따라온다

내가 바로 저 여자야
못생기고 더러운 저 여자
배 속에 가득 망각이 들어찬 저 여자
머릿속에 토사물만 가득 든 여자
지나가던 소녀가 침을 탁 뱉는 바로 저 여자
길거리 모퉁이에 서 있으면 모두 달아나버리는 저 여자
무서운 아저씨들의 장화 밑에서 우글거리는
글의 집은 너무 좁은데 피할 줄도 모르는
떄 묻은 얼굴이야 더러운 엉덩이야 피 뭍은 발톱이야
날 데리러 오는 장의차 소리는 귀신같이 아는 바로 저 여자야
무서워서 먹고 무서워서 소리치고 무서워서 또 먹는 바로 저 여자야
나는 입술에 붙은 밥통이야 뱉은 걸 먹고 싼 걸 먹는 바로 저 여자야
역겨운 여자 냄새나는 여자 미친년 맞는 년
내가 접시에 누우면 맛있는 소스라도 발라서 구워줄래?
못생긴 여자야 하루에 한 움큼씩 항우울약 먹는 여자야
네가 나를 사랑해주겠다고 동정해주겠다고 그러지만
나 돼지야
그런데 한마디 덧붙이자면 나 재미있는 돼지야
나는 이렇게 생신 비밀이야 유머가 터질 듯해서
아들이이 운동장에서 차고 놀 수 있는 오줌보야

돼지 한 마리가 산문을 나서는 나를 멀찍이 따라온다
36도 5부 방에서 나왔으니 춥겠지? 냄새나는 코트들고 따라온다 

기쁘다 돼지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산문을 나서며』전문

거울을 떠난다. 벽을 떠난다. “이제 그만 안녕 너 없이도 살 수 있어” 하며 떠난다. 떠나면서 버린 것을 “데리고 간다”. 데리고 가지 않아도 “따라온다”. 상징계의 언어란 그런 것이다. 떠나면서도 동시에 데리고 가야하는 것이다. 돼지는 기존의 자신을 배치하던 상징적 질서와 단절하는 주체로서 떠난다. 돼지를 돼지로 만들던 그 상징적 배치를 뚫고 나가려고 한다. 포르노적 원룸에서 풀려난 돼지는 나르시시즘적 매끈했던 얼굴에서 “때 묻은 얼굴”을 마주한다. 카프카가 더러운 “아버지의 이름”을 받아들이면서 상징계로 들어설 수 있었던 것처럼 돼지도 자신의 오점을 받아들이면서 주체로 도약한 것이다. 돼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면역화된 안전한 돼지우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돼지를 끝까지 밀어붙여서 돼지로서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하는 것의 공허함을 받아들이는 것. 즉, 대타자의 응시 아래서 “못생기고 더러운” 모습으로 보여질까봐 두려워하는 돼지에서 그래 “나 돼지야”로 이행하는 것. 그래서 얼룩진 나의 돼지들을 데리고 “산문을 나서는” 것. 대타자의 관습적인 “36도 5부”의 온도에서 나와 “어떤 대타자도 없는 공포”의 온도로 이행하는 것. 그것은 거울 밖으로 걸어 나가면서 거울을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거울의 부정성을 “냄새나는 코트”처럼 껴입음으로서 헤겔의 “부정적인 것에 머무르기Verweilen bei Negative”에 이른다.
헤겔은 “정신은 부정적인 것과 정면으로 마주하며 그것에 머무를 때에만 정신은 위력으로 된다. 이러한 머무름이야말로 부정적인 것을 존재로 전환시키는 마술적 힘”이라고 한다. 이 때에 “부정적인 것”은 추상적이고 단순한 자기관계로서의 정신(친숙한 세계)을 깨뜨리는 타자(부정적인 것, 모순, 분열)를 뜻한다. 단순한 자기관계와 부정적인 것이라는 서로 대립하는 두 계기의 모순적 공존 속에서 “정신의 자유는 한낱 타자 밖에서 얻은 자립성이 아니라 타자 안에서 타자로부터 얻어낸 자립성이며, 타자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타자를 극복함으로써 실현”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부정적인 것에 “머무르는 한에서만 정신은 위력을 발휘”하며 그것은 “죽음을 감내하고 절대적 찢겨짐을 견뎌내는 정신, 조화롭고 평화로운 안식의 세계를 파괴하는 낯선 것에 대해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대면하는 정신의 힘”을 두고서 “부정적인 것에 머무르기”라고 명명하였다. 이를 통해서 새로운 세계/주체를 창조하는 정신이 바로 헤겔의 주체이다.   
김혜순의 돼지들은 오물을 뒤집어 쓴 주체로 탄생한다. “내가 바로 저 여자야
못생기고 더러운 저 여자 (...) 머릿속에 토사물만 가득한 여자 (...) 때 묻은 얼굴이야”로 가득한 주체는 근원적인 상실과 불가능한 회복을 끌어안은 채 변증법적으로 형성해나가는 돼지-주체이다. 그 주체는 말한다. “나 돼지야
그런데 한마디 덧붙이자면 나 재미있는 돼지야
나는 이렇게 생긴 비밀이야”. 비밀 없음의 포르노에서 이제 비밀이 생긴 주체이다. “영혼을 가진다는 것은 비밀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키냐르의 말에 따라 돼지-주체 영혼이 생겼다. 포르노적 벌거벗음 속에서 울부짖는 교성이 비밀의 말을 가지면서 “유머”를 구사하기도 한다. 새롭게 탄생하는 돼지. 그 돼지를 두고 “기쁘다 돼지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라고 환호를 질러도 되지 않겠나. 



6. 나서며 

쓰레기는 일견 가난한 자, 이방인, 고아, 난민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들이 스스로 쓰레기가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의 얼굴은 내가 비참하게 버려졌을 때, 죽음에 다가갔을 때, 국가의 무기력함으로 지뢰처럼 터지는 재앙들 앞에서 목격한, 마주한 이웃의 얼굴이며, 나의 국가 공동체 혹은 가부장제의 폭력 앞에서 내가 감당한, 나를 둘러싸고 있는, 바로 나 자신의 구멍인 어둠이다.

-『여성, 시하다』부분

김혜순의 15편의 돼지 연작시의 구성은 몽타쥬적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몽타쥬가 서사에 개입하여 알레고리를 생성해내는 반면 이 돼지 연작시 15편은 그야말로 포르노적이다. 돼지의 시선과 돼지 아닌 것들의 응시가 겹쳐있다. 돼지와 다른 돼지들은 딱히 구별되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 가까이(도착증) 있거나, 너무 멀리(편집증)있다. 그래서 파편적이고 부분-대상적이다. 그것은 15편의 연작시의 시적 주체들이 모두 거울에 반사된 시선-들의 포르노적으로 겹쳐있기 때문이다. 타자의 시선이 침범하지 못하는 시적 공간을 만들게 되면서 김혜순의 돼지로 접근하면 접근 할수록 돼지와 독자사이의 간극은 너무 가까워지거나, 너무 멀어진다. 15편의 연작시는 알레고리를 생성하기 보다 오히려 알레고리를 분산시키면서 포르노의 형식을 가지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형식이야 말로 오늘날의 돼지들의 형식이 아닐까.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새로운 주인-기표를 향한 욕망을 차단시켜 무력하고, 냉소적인 얼굴 속에서 인간의 표정을 지워내는 이 세계와 작별을 고하며. 김혜순의 돼지-주체는 상품 형태로 전시를 강제하는 이데올로기에 맞서 “안죽은(undead) 부분대상의 형태로 고집스레 지속되는 충동의 노래”들을 부른다. 

있지, 조금 있다 고백할 건데 나 돼지거든 본래 돼지였거든”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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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에 관한 소론

#1 

-난민은 글로벌 자본주의의 동려고가 군사개입과정에서 난민 발생의 원인을 찾는 일이다. 

-청(소)년들은 결코 자율적으로 사회를 바꾸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왜? 기성세대들이 그렇게 되지 않도록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들 부유한 나라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특징은 새로운 노예제도의 출현이다. 자본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장려하는 경제체제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하지만 경제 현장의 자본주의 작동방식은 노예 양산일 뿐이다. 노예제는 중세 말 폐지 된 것 처럼 보이지만 근대 초기부터 남북전쟁에 이르기까지 식민지에서 더 기승을 부렸다. 비약을 무릅쓰고 과감하게 가정해보자. 글로벌 자본주의의 새로운 시대는 노예제의 부활이라는 서막을 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탈리아 프라토 중국인 섬유공장 화재 (국제신문) 

-2005년 파리폭동 (한국일보)

파리 근교의 불타는 현장에 그 어떤 정치 프로그램도 없었다는 것은 우리의 정치가 얼마나 빈곤한지를 알려주는 실체의 예다. 우리는 이 사회를 선택의 사회라고 자찬하지만 강제된 민주적 합의를 거부할 유일한 대안이 고작 맹목적 행동밖에 없는 사회 속에 살고 있다. 

-규칙에의 복종이냐 혹은 (자기)파괴적 폭력이냐를 택일해야 하는 선택이라면 우리가 그토록 숭배한 선택의 자유란 대체 무슨 소요잉ㄹ까? 

-라깡: 행위로의 이행 passage a lacte, 즉 충동적으로 행위로 옮겨짐, 말로 어찌 표현할 수 없고 생각으로도 정리할 수 없는 행위로의 이행, 참을 수 없는 무게의 분노를 수반하는 행위로의 이행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이행을 낳은 의미를 탐색하려는 유혹에 사로잡힌다.(해석학의 유혹) 그러나 행위로의 이행은 단지 충동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범인의 무기력함에 그치지 않는다. 


#2

이탈리아 남부와 발칸반도에 체류 중인 난민들이 더는 그곳에 머무르지 않고 스칸디나비아 국가와 독일로 가려고 조바심을 내는 것을 보고 있다. 칼레에서 천막생활을 하면서도 프랑스에 만족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영국으로 넘어가려는 수천 명의 난민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가난, 고토으 위험에 처한 인간은 최소한의 안전과 먹고살 여건만 만련되면 만족할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어렵고 힘들 수록 인간은 절대적 유토피아를 열망한다. 그러나 난민이 배우게 될 뼈아픈 교훈은 '노르웨이는 없다'는 것, 심지어 노르웨이 안에도 노르웨이는 없다는 것이리라. 

-현실에서 꿈을 쫓는 대신 현실을 바꾸는데 집중해야 한다. 


#3

문화는 우리가 실제 믿지 않고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행하는 모든 것의 이름이다. 

-산타클로스를 믿지 않지만 12월이면 집집마다 심지어 공공장소에도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우는 것이 문화가 아니고 무엇일까? 

-난민과의 감상적 연대,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우리' 스스로를 유죄로 단죄하는 잘못된 감상적 자기 비하가 그것이다. 우리의 실질적 과제는 오히려 '우리'와 '저들' 노동자 계급 사이에 가교를 구축하여 연대 투쟁을 하는 것이다.



이웃에 관한 소론

#1 애덤 코츠코 <소름끼침> (알라딘 링크) 

-소름 끼치는 낯섦이야 말로 오늘날 이웃의 기묘한 본질이라고 한다. 모든 이웃은 궁긍적으로 기이하다. 이웃은 '기이하게' 만드는 것은 이웃이 보여주는 기이한 행동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저런 행동을 하는지 속내를 알 수 없어서다. 


#2 사드 후작의 작품들 

-사드의 작품에서 소름이 돋는 것은 소름끼치는 장면이 나와서가 아니라 '왜 저런 짓을 할까?' 하는 물음이다. 그 변태행위를 통해서 이상하다는 혐의를 지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3 프로이트 

-이웃은 무엇보다 하나의 사물이며,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어떤 침입자이자, 우리를 훼방하며 우리의 익숙한 생활 방식을 혼란에 빠뜨리는 다른 생활방식(혹은 사회생활과 의례에서 드러나는 주이상스jouissance의 방식)을 지닌 사람이다. 그래서 너무 가까이 있는 이웃은 공격적 반응을 촉발시킨다. 우리는 불안한 침입자를 쫓아내려 하기 때문이다. 


#4 이스라엘군의 인도주의 이데올로기 전략 

-2003년 이스라엘 군이 테러리스트 혐의를 받는 한 남자의 집을 파괴했을 때. 군인들은 유독 친절한 티를 내며, 심지어 그 가족을 도와 집에서 가구를 들어내는 것을 도왔다. 그리고 불도저로 그 집을 깔아 뭉갰다. 

-한 이스라엘 병사가 테러리스트가 숨었다고 의심되는 팔레스타인 사람의 집을 수색했다. 이 때 어머니는 놀란 딸을 진정시키려 딸의 이름을 불렀고, 병사는 겁에 질린 소녀의 이름이 자기 딸의 이름과 똑같아 놀랐다고 했다. 감상에 사로잡힌 병사는 지갑을 꺼내 딸의 사진을 팔레스타인 어머니에게 보여주었다. 

#5 존 포드 감독 <수색자> 

-영화 끝부분의 주요 장면에서 어떻게 타니(곧 이웃)과 나 사이에 가로놓인 심연을 뛰어넘는 운동이 일어났는지 설명했다. 

-에단은 오랜 수색 끝에 마침내 소녀 시절 인디언에게 끌려간 조카 데비의 행방을 찾아내고 숙녀가 된 그녀를 구한다. 그런데 영화 내내 에단은 데비를 구출해 집으로 돌려보내려는게 아니라 죽일 생각이었다. 인종차별주의에 사로잡힌 에단은 오랜 세월 인디언과 함께 생활한 백인 처녀는 죽어 마땅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마침내 무방비로 쓰러져있는 데비를 발견한 에단은 그녀를 두 팔로 안아 올리고 포옹하며 집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심한다. 이런 태도 변화는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일반적 해석을 마지막 순간, 에단의 마음에 담긴 선함이 승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피핀은 이런 해석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가 보기에 정답은 잠깐 스쳐 지나가는 에단의 헝클어진 눈빛에 담겨있다. 

-그 눈빛은 홀연 되살아난 인간적 온기와 동정을 드러낸 것이 아니다. "눈빛은 무엇보다도 혼란, 곧 에단이 불현듯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돌연 자신이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다는 혼란을 보여준다." 이 헝클어진 눈빛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할 것은 틀림없다고 확신한 자신의 원칙이 부분적으로 허구와 상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깨달음이며, 에단이 백인으로서 품어온 정체성에 대한 회의이다. 우리(그리고 그)는 자신의 신념에 집착하지 않고 마침내 행동에 나설 때에만 비로서 그 신념의 폭과 깊이가 어느 정도였는지 깨닫는다. 

-에단은 데비를 마침내 이해해서 혹은 그녀의 감정 세계를 헤아리고 공감하는 통찰을 통해서 그녀를 살려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수 없다는 깨달음, 자신이 곧 타인이라는 깨달음으로 그녀를 살려주었다. 


#6 이집트의 속담 

"고대 이집트인의 비밀은 이집트인 자신에게도 비밀이다." 

-바로 그래서 이웃과 만날 때면 공감하거나 이해하려 시도하지 말고, 마음에도 없는 존중을 가장하는 대신, 너희나 우리나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구나 하며 낄낄대고 웃어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참고도서

-새로운 계급투쟁/ 슬라보예 지젝/ 자음과 모음/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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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협에 관한 소론

#1 우디 알로니 감독의 <정션48> 2016 

-난 이웃에 사는 여인들을 보호하려고 아랍어로 노래를 불러. 


#2 스파이크 리 감독의 <말콤 엑스> 

-대학에서 강연을 마친 말콤 엑스에게 한 백인 여성이 다가와 흑인해방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뭐냐고 묻는다. 말콤엑스의 대답은 "없소." 

-백인의 할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아니라 흑인 공동체 내부에서 시작되어야지 선량한 백인 진보가 선물하는 것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 


#3 무가베의 유엔연설  (허핑턴 포스트) 

-"우리는 게이가 아니다." 

-무가베는 동성애 운동이 글로벌 자본주의의 문화적 충격에 따른 현상이며, 전통적 사회ㅜㄴ화 양식을 위태롭게 한다고 이해했다. 

-이로서 반동성애운동은 반식민지운동과 같다는 논리로 성립 


#4 이슬람의 보코하람 (뉴스페퍼민트) 

-서구 교육을 금지한다. 

-특히 여성의 교육을 금지한다


#5 반투스탄 (브런치 블로그) 

-반투스탄은 흑인이 따로 모여 살도록 설정한 구역으로, 장기적 목표는 반투스탄을 독립시켜 아예 남아공에서 제외하는 것이었다. 


*위협을 바탕으로 민족성, 네이티비아nativia를 강조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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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할 사전

ㄱ : 김수영
김수영을 읽으면 뜨거워진다 자꾸 몸의 끝자리들이 타닥타닥 군불을 낸다 이토록 비루해서 아름다운 건 김수영뿐이다.

ㄴ : 노래
노래를 듣는다. 좋은 것들이 없다. 내가 좋지 않아서 이다. 케이팝 스타를 볼 때마다 절망에 가까움이 환희라는 걸 알아차린다. 모든 노래에는 가락이 있는데 이것이 문제다.

ㄷ : 도래
도래할 사전을 쓴다 언젠가 먼 길을 돌아온 자에게 건네주련다 오늘이 계속되고 있다는 믿음과 함께. 벤야민의 메시아의 문장이 될 것이다.

ㄹ : 록앤롤
록앤롤 앤드 엔드 록은 죽고 롤만 남아버린 때에 록은 부뢀한다


ㅁ: 미친 

어느 날 목욕탕에서 수음하는 사내를 본적이 있다 


ㅂ: 비비드 

늘 내게 너무나 선명해서 보기 싫은 것들이 몇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운동복이다. 


ㅅ: 슬픔 

이성복은 이렇게 남겼다. 

"유독 왜 슬픔만이 세상 끝까지 뻗쳐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기쁨 뒤에 슬픔이 오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어째서 슬픔뒤에 다시 슬픔이 남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재난 그 이후, 슬픔은 진화해나간다는 확신이 든다. 


ㅇ: 아가 

이 단순한 자음과 모음의 결합

세상 모든 말의 첫 시작으로서의 ㅇ (이응)과 

세상 모든 말의 첫 각도로서의 ㄱ (기역) 


ㅈ: 줄 

당신과 나 


ㅊ: 출근 

오늘의 뉴스 "월 200만원 벌면 1억 모으는데 42년?.."허탈" 


                                             < 표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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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전환이 도래하고 있다.
1
하나의 전환이 도래하고 있다. 그것은 이미 용산참사 이후로 시작된 시대적 질문들에 의해서 발진되었다.  이것이 무엇이냐. 도대체. 이해되지 않은/ 비현실적인 일들이 자행되었다. 초현실이 현실이 되는 스펙터클 앞에서 질문은 시작되었다. 후쿠시마 원전사태, 밀양송전탑, 강정해군기지, 콜트콜텍과 쌍용자동차, 그리고 4대강. '도대체'룰 붙이지 않고는 받아들이기는 힘든 사태가 습격했다.  질문은 시작되었지만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해결되지않음으로서 남는 절망과 무력들의 표정들은 쉽게 지치고 너저분해진다. 

2
이야기의 생명력은 '모르는 것'에 있다는 벤야민의 말처럼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사태들 앞에서 전환의 이야기들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아직도 우리는 모르고 있음으로. 모르는 것이 있음으로 탐구자들과 이야기꾼들을 불러모았다. 지하에 있던 이들이 돌아왔다. 그들은 결국 무엇에 도달할지 모르는 것에 달려들었다.  그 생명력은 희망버스를 불렀고, 지칠 줄 모르는 연대의 망을 낳았으며, 녹색당을  견고하게 했고, 시민으로서의 삶에 대한 반성을 하게 만들었다. 낡은 신념들은 모험과 실험 앞에서 늙어갔다. 이야기는 멈추지 않고 나아가고 있다. 

3
우리는 시를 잃었다. 누군가 아플 때 "할미 손은 약손"이라고 문질러 주던 그 시적인 것들을 몽땅 빼앗겼다. 이제 오직 구원은 병원에서만 가능하다. 진단과 집행의 최종권자인 의시와 병원은 전지전능한 '말'을 행사한다. 오직 독점이다. 권력의 독점과 자본, 문화, 소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독과점 구조가 완성형에 가깝게 이루어졌다.  향후 10년 뒤의 모습은 단일한 시장권역을 전 세계를갈라 놓을 것이다. 독점은 우리에게서 시적 가능성을 말살시켰다. 어떤 가능성으로서의 시적인 것들은 "그럴수 있다"의 세계다. 그러나 독점의 공간에서는 가능성이 아니라 오직 기능성에 의해서 가치매겨지는 지난한 삶의 굴곡들이 있을 뿐이다. 가능성을 잃은 세계에서 할미 손은 피해야 할 그 이상이 되지 않는다. 시를 잃었다. 

4
우리는 사회를 잃었다. 어딘가에 홍수가 났을 때 마을을 지키기 위해 삽으로 물을 퍼 나르던 '우리의 가능성의 능력'을 빼앗겼다. 전지전능한 국가의 명령을 복기하는 경찰, 군대, 국정원과 같은 국가기구들은 모든 가능성들을 차단하고/ 시장과 기업들의 폭격들은 철저히 우리를 고립시켜 각자도생의 윤리들를 가르치고 있다. 능력들의 가능성. 그것이 사회다. 그것은 '감히' 우리라고 말하게 하고 '감히' 서로를 드려다보게 한다. 우리는 사회를 잃었다. 

5
우리는 '자기'를 잃었고 '사랑'을 잃었으며 '아름다움'을 잃었고 그래서 '우정'을 잃었다. 이제 모든 걸 잃기 직전이다. 예감한다. 우리에게 남은 건 건강을 챙기는 것, 가족을 꾸리고 사랑하는 것, 행복과 웃음을 챙기는 것 뿐이다. 이것들은 최후의 마술. 열광시키는 최후의 술수. 마법과 술수에 잃어버린 것들을 세어본다. 잃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도 못한다. 애초에 역사란 무엇을 잃어 버리게 할 것인가에 대한 주석에 불과하다. 

6
그렇다면 전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그것은 생의 치받음, 시대의 치받음에서 시작된다. 절박해졌을 때는 도무지 견딜 수 없을 때이다. 안절부절이 아니라 단도직입로 나아가는 지점이 절박이다. 그것은 어떤 치받음에서 시작된다. 카프카의 모든 현실은 절박함에서 시작된다는 말도 그렇다. 바뀌지 않을 수 없을 때 전환은 가능하다. 전환과 혁명의 닮은 표정은 이 지점이다. 

7
새끼악어를 삼킨 비단뱀은 새끼 악어 등짝에 솟은 날카로운 돌기에 내장이 찢겨 죽었다. 자, 새끼악어의 저 날카로운 돌기에서 거대한 비단뱀은 다시 새끼 악어를 토했다. 무엇인가, 여기서 나는 희망을 간신히 빌견한다. 결국 집어 삼킬 것이다. 거대한 것들의 횡포의 주둥이가 나를 베어물고 유유히 젶어 삼킬 것이다. 그 때에 내 등에 돌기를 솟게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당신과 나의 무엇이 되어야 할 것인가. 

8
저기 지치지 않는 까마귀떼들이 보인다. 굶주려있고 부리들은 무언가를 쪼기 위해 희번떡하다. 빠른 속도로 우리에게 다가서고 있다. 이들은 용산참사 이후로 시작된 비현실적 초현실의 검은색으로 다가서고 있다. 희망적이지도 짙은 믿음을 기반으로 둔 것이 아니다. 그저 어쩔꺼야? 이런데도? 계속 그럴려고? 오히려 겁박한다. 우리는 희망이 아니라 그 보다 더 큰 절망을 만날 준비를 해야한다. 희망에서 시작하는게 아니라 절망에서 시작하는 지점에서 전환은 시작 될 것이다. 이것이 혁명과 전환의 다른 표정이다. 


9
"가능한 우리 자신이 주권자가 되어 작은 실험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가장 좋다." 니체는 말했다. 
여기서 '국가'라는 말은 빼버려도 좋을 것이다. 가능한 우리는 작은 실험들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작은 실험들을 도모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해소'의 지점이자, '전환'의 자리다. 
나의 비겁한 자리를 묻는다. 겁이 많아 뒷걸음 치기만 수십번에, 막상 판이 벌어지면 두려움에 가장 먼저 
휩싸여 판을 어지럽히곤 했다. 가장 먼저 나섰지만 가장 먼저 돌아서 나왔다. 치졸함의 전략들. 
이것들을 통해서 스스로를 괴롭히고 싶지는 않다. 괴로워야 할 이유도 특별히 없다. 그 때의 나는 
그 때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고, 최선의 전략이었음을 느낀다. 나도, 당신도 그럴 것이다. 
인간의 선택은 그 때의 최선, 살아온 만큼의 최선이다. 그 최선이 사람을 설명할 수 있다. 
그 최선의 무수한 선택들이 스스로를 폭로하는 것이다. 전환의 자리에 나의 선택이 폭로되는 순간 
'실험'과 '모험'이 터져나왔으면 한다. 그것이 존재의 최선이 될 수 있게 가능한 멀리 바라 볼 것이다. 

10
"삶의 얼굴은 죽지 못한 죽음들의 표정이다." 휘덜린이 미친듯 휘갈긴 이 한 줄에서 미래를 바라본다. 
 전환의 얼굴은 죽지 못한 실험들의 표정이다. 이렇게 바꾸어 불러도 좋으리. 
 조금은 믿어보기로 한다. 
 지금 보다 조금은 더 나아질 수 있기를. 
 지금 보다 조금은 더 낫게 될 수 있기를. 


<만화 빌리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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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 그 어둠의 짜세


2011. 4. 13
개구리 알을 뱗은 두꺼비의 심정

절망에 대한 생각이 절망이다.
봄날 살풀린 시냇가.
개구리 알이 고르르 눈알을 굴린다.
하얗게 자리잡은 두꺼비 개구리 알을 밟는다.
절망에 대한 생각은 절망을 불러일으킨다.
정확하게 절망에 대한 생각이 절망이다.
어미 개구리를 살핀다. 아비 개구리는 없다.
자, 두꺼비 다음 발을 떼지 않는다.
다음발을 때는 순간 몸의 무게가 실려
개구리 알이 터질지 모를 노릇이다.
두꺼비 단 한 번은 꿈벅임이 없다.
그 발바닥에 터진 올챙이 눈깔이 달려있을지
두꺼비 발바닥 온기에 온통 몽긍몽글해졌을지
오직 어미 개구리와 두꺼비만 안다
두꺼비 한참을 그 자리에 발 붙이고 서있다
절망을 불러일으키는 건 당신인가 나인가?

2012..4.5
사회학이라는 죄

사회학적 상상력에 영혼이 없다. 얼마전 읽은 베버의 글은 정확하게 그랬다. 어떤 여지 없이 몰아세우는 유지막심한 그 손가락질에 이제 사회학적 상상력을 믿지 않기로 한다. 그래도 이반 일리치가 있을 땐 이렇지 않았는데, 언어가 모욕스럽다. 영혼, 그 떨림없이 쓰는 글은 대부분 헛발질이고, 읽을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김현 선생은 이런 나를 두고 "천하의 바보노릇"하고 있다고 하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2013. 4. 9
문학은 주어지는가?

문제집 답안지를 펼친다
오답들을 쏟아낸다
답안지가 책 가장 끝에 있는건 부끄러워서다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아서 글자도 작은거다
그래서 진리의 세계가 허망한거다
도업을 이루고자 하는 그 허망한 스윙
자신을 버려야만 가능한 백스윙 앞에서 오히려
진리의 세계가 지혜의 세계로 건너온다
오답노트- 오답들의 108배, 여기서 지혜의
발바닥들이 문제들을 주욱주욱 그으며 치솟는다
문학은 그 뒤에 남는 하나의 상흔, 구멍일 뿐이다
그 구멍의 세계에서 가부좌트는 것,
무릎 파르르 떠는 것, 예술의 짜세


2014. 4.11
산책의 보폭

좋은 산문은 산책할 때의 걸음의 보폭을 지녔다.
산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산문을 잘 쓸 것임에 틀림없다.
그 리듬이 가져다 주는 문장은, 삶은 분명히
모든 것에 개입할 것임에 틀림없다.
패턴이 리듬을 만든다. 틀림없다.
오늘 이성복의 산문을 읽고나서
미쳤군, 미쳤어, 이런 미친 영감탱이

좋은 시는 산책의 보폭과는 다르다
그들은 땅을 계속 걷지 않는다
유령의 호흡, 부양하는 마이클 조단의 에어워크
땅에는 그림자 뿐이고 공중/허공/ 심연을
걷는/뛰는/춤추는/ 취한 걸음에 있다
그래서 미쳤군 미쳤어가 나오지 않는다
이미 미친 상태이기 때문이다.
좋은 시는 산책의 무위 그, 이후
그 다음, 그 너머에서 미치게 만든다
발화자와 독자가 동시에 미치게 만드는 맨발들
만선을 기원하는 무당들의 옷자락과 닮았다

2015. 4. 18
당신을 물어뜯고 싶다

핥고 빨고 쥐고 흔들어 놓고 싶다
그럴수록 난 더욱 구멍으로 말려들어간다
니체, 당신이 되고자 이리 애썼는데
어찌 단 한 번도 곁을 내어주지 않는겐가
간절한 열망, 습관적인 열망- 나는 무섭고
비겁하고 찌질해서 당신의 춤사위에 매번 눈감는 흙 아래의 짓, 짓, 짓
이제 확신 할 수 없다
당신을 만나고자 한 것인지
당신을 물고자 했던건지
에이씨 몰라 하고 오래된 농을 치고선
돌아서고 싶지만 돌아설 때 마다 당신은
허벅지 벌리고 나랑 한 번 하자고
나랑 한 판 붙자고 카톡한다, 카톡카톡
벌써 몇 년째 숫자1맨 바라보고 있다

2016.4.13
기도의 가능성

까만 닭, 까닭- 녹색당을 지지합니다. 이 단순한 말에 감동 받다니. 김종철 선생의 한겨례 칼럼을
읽고선 까닭도 없이 감동받다. 국가란 결국 합접적 폭력기구애 불과하다.
애궐복궐한 이유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대의 민주주의란 소수 엘리트들의 합법적 통치수단에 불과하다.
귀 기울일 만한 것이 전혀없다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선거는 이미 합법적인 불법이란 것이 여러 번 확인 되었고 이 불법의 파행은
여려 혁명들과 시민운동들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확인되었다.
별 수 없다는 말이 나오는건 어쩌면 정답. 불법적 생각, 어쩔 수 없음의 가장 강력한 알리바이.
믿음은 그래서 중요하다. 기도는 이제서야 중요해진다. 절망의 얼굴 앞에서만 기도는 가능하다. 기도하는 자세에서 시작되는 믿음으로 녹색당을 지지한다. 가능성은 언제나 기도에서 시작했기에.

포경수술을 할 때 어떤 독재릉 허용했다.
아버지라는 남성이라는 까닭없는 이미지에
다리를 벌렸다. 그 앞에서 지퍼를 내렸다.
가위질, 바느질을 하용했고
꼬추가 자지가 되던 날- 민주주의와 국가에 대해서 떠올렸다. 그리고 마취가 풀리고 아픔이
시작되었을 때 난 기도했다.
하느님 전 당신을 지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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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Abbas ,1980 >



세월호 이후 이유없이 쏟아지는 눈물은 모두 어디로 가는건지. 

이 몸뚱아리의 염분이 높아져버렸다. 

무엇이 어떻게 왜 라는 질문이 날아들기도 전에 슬픔은 온통 차오르기만 했다.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읽으면서도 자꾸 몸뚱아리에 썰물만 친다. 



슬픔과 우울증(Trauer und Melancholie)으로 정확하게 번역이 들어맞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래서 독일어 슬픔Trauer이라는 단어에는 ‘애도’의 의미가 겹쳐있다. 

프로이트 역시 글을 시작하기 전에 결론이 빈곤함을 드러내고 논의를 시작한다. 

“슬픔은 보통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 혹은 사라하는 사람의 자리에 대신 들어선 어떤 추상적인 것, 즉 조국, 자유, 어떤 이상 등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244쪽) 

사랑하는 것의 상실에서 시작된다는 슬픔은 누구가에게 ‘우울증’을 일으켜세운다.

슬픔이 깊어지면 우울증으로 찾아온다고 하지만 슬픔을 맞이하는 마음근육에 따라서 

슬픔의 색깔은 달라진다. 

“우울증의 특징은 심각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낙심, 외부 세계에 대한 관심의 중단,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상실, 모든 행동의 억제, 그리고 자신을 비난하고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을 정도로 자기 비하감을 느끼면서 급기야는 자신을 누가 처벌해 주었으면 하는 징벌에 대한 망상적 기대를 갖는 것 등으로 나타난다.“ (244쪽) 

▶정신분석학의 근본개념/지그문트 프로이트/ 열린책들/ 2004 



우울증의 특징들은 슬픔의 특징들과도 비슷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슬픔에서는 나타내지 

않는 자애심의 추락이다.” 자애심(독일어로는 어떻게 되려나...)의 추락이라. 

우울증은 자아는 쓸모없고, 무능력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아로 여긴다. 

자신의 과거들을 펼치며 “자기 비난을 과거로 확대시키만”(247쪽) 한다. 

이런 자기 비난은 자기를 폭로하며 “만족을 얻기 위해 집요하게 떠들어대는 속성(249쪽)”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몇 주전 나도 이와 비슷한 심리적 상황을 거쳤다. 

이 쓸모 없는 ‘나’를 향한 스스로 비난하며 내가 얼마나 무능력한지 

증명하기 위해 과거들을 헤집에 놓았다. 마침 그 때 몸이 좋지 않았는데 

되돌아 생각해보니...그래. 




라깡은 또 다른 의미에도 프로이트의 멜랑꼴리를 이해하기 위해 햄릿을 

불러 들였다. 햄릿은 아버지를 잃은 슬픔과 절망, 분노로 인해 오랫동안 

무기력한 우울의 상태에 있었다. “애도하지 못하는 주체, 즉 햄릿처럼 멜랑꼴리에 빠진” 

주체는 행위acte를 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애도되지 못한 죽음은 유령이 되어” 찾아

온 것이다. 오랫동안 추모와 애도의 시간을 가지지 못한 햄릿의 신체는 이미 무력하다. 

햄릿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삼촌과 결혼한 어머니의 욕망으로부터 분리 될 수 없었고 

심지에 어머니의 욕망에 참여하고 있었다. 애도하지 못하는 주체는 다른 욕망에 의존하며 

죄-책감을 통해 신체는 무기력해진다. 

“세월호 사건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우울과 죄의식, 절망을 경험하고 있다. 라깡의 햄릿 분석을 통해 이것이 세월호 사건과 관련된 우리의 집단적 멜랑꼴리에 대해 던지는 함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1) 어떤 경우도 납득할 수 없는 부당한 죽음의 경우 그것은 결코 개인 심리치료를 통해 해결될 수 없다. 물론 일정 정도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두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은 사회적 차원에서의 ‘정의 실현’을 통해서만 해결 가능하다.

(2) 이러한 차원을 망각한 심리치료는 종종 진리를 은폐하는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 살아 있는 인명구조에 그렇게 무심했던 정부와 행정관료들이 구조된 사람들의 심리치료를 위해서 그렇게 빠른 속도로 정신과의사를 배치할 수 있었던 그 기동력이 놀라울 뿐이다!

(3) 햄릿의 이야기는 멜랑꼴리 역시 권력과 외설적 쾌락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남편을 살해한 사람과 결혼한 왕비가 있다. 그리고 즉 어머니의 욕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아니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우유부단한 햄릿이 있다. 이러한 어머니의 욕망과 동일화했기 때문에 햄릿은 복수하지 못하고 멜랑꼴리에 빠진다.

(4) 햄릿의 멜랑꼴리, 즉 행위하지 못함은 권력과 외설적인 성적 쾌락에 무의식적으로 동참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햄릿이 행위하지 못하는 한 아버지는 유령으로 배회하며 햄릿을 계속 찾아올 것이다.

(5) 햄릿 드라마는 비극으로 끝나지만 멜랑꼴리를 진정으로 극복할 수 있도록 해준 마지막 단계가 무엇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행위이다. 그러나 행위하기 위해, 즉 진정한 애도작업을 할 수 있기 위해 햄릿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 했다. 레이티어스의 독이 묻은 칼에 맞아 죽어가면서 왕에게 독이 든 잔을 마시게 한다. 햄릿의 죽음의 순간을 은유적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멜랑꼴리 환자의 자살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햄릿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비운의 멜랑꼴리자가 아니다. 죽음의 순간에 그는 자신이 동참하던 사악한 권력과 외설스러운 쾌락과 진정으로 분리된다. 그리하여 그는 행위 할 수 있었고 진정한 애도작업을 수행할 수 있었다.

(6) 또한 『세미나 7권: 정신분석의 윤리』에서 라깡은 안티고네 사례를 분석한 바 있다. 안티고네는 독재자 크레온에게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죽임을 당한 오빠 폴리네케이스를 매장해준다. 반역죄를 저지른 안티고네는 동굴에 갇힌다. 햄릿 분석에 이어서 바로 이어서 행한 세미나에서 라깡이 <안티고네>를 분석한 것은 우연이 아닌 듯 보인다. 우리는 <안티고네>를 오빠의 죽음에 대한 애도에 관한 작품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안티고네의 행위는 반역적이다. 그럼에도 안티고네는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안티고네는 반역자인 오빠를 매장하고 장례식을 치루는 행위를 통해서만 진정한 애도가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안티고네의 애도 행위는 동시에 크레온에게 저항하는 정치적 행위이기도 하다.

(7) 멜랑꼴리에 대한 라깡의 분석은 개인과 사회는 분리된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이 두 작품과 이에 대한 라깡의 해석은 진정한 애도는 ‘궁극적으로’ 사회적, 정치적 행위라는 것, 그리고 이러한 행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권력과 외설적 쾌락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부당하게 죽은 사람들을 자신의 쉼터로 돌려보내지 못하는 무력한 멜랑꼴리자로 남게 될 것이다“


▶지젝 이론의 원천과 그 수용의 문제점, 그리고 신좌파 담론의 한계/ 홍준기

+애도는 슬픔을 마주하는 하나의 적극적인 행위acte이다. 이 행위들은 사회적, 정치적 

맥락을 빗겨갈 수 없다. 애도는 행위이다. 




내 아들이 없는데도 온 세상이 살판난 것처럼 들떠 있는 올림픽의 축제 분위기가 참을 수 없더니, 내 아들이 없는 세상 차라리 망해버리길 바란 거나 아니었을까. 내 무의식을 엿 본 것 같아 섬뜩했다. 아아, 천박한 정신의 천박한 꿈이여, 내 아들아, 어쩌면 에미를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만드니.


그러거나 말거나 오늘은 88서울 올림픽의 개막식 날이다. 

날씨는 쾌청하고 개막식도 잘 돼가는 모양이다. 딸, 사위, 손자들이 

텔레비전으로 그 광경을 시청하면서 연방 탄성을 지르며 즐거워하고 있다. 

그런 분위기를 훼방놓지 않을 만큼 대범해야 된다는 건 인내가 아니라 고투다.


그저 만만한 건 신神이었다. 온종일 신을 죽였다. 

죽이고 또 죽이고 일백번 고쳐죽여도 죽일 여지가 남아 있는 신, 

증오의 마지막 극치인 살의殺意, 내 살의를 위해서도 당신은 있어야 돼.


▶박완서/ 한 말씀만 하소서 / 1988년 9월 18일 일기



1988년 아들을 교통사고로 보낸 박완서 선생님의 일기들을 모은 책. 

벼랑 끝에서 쓰여진 문장들은 슬픔의 밀도는 가슴팍을 쿵하고 내리친다. 

삶이 바스라지기 직전의 절절한 슬픈 표정이 어린거린다. 

경험하지 않고서 말하지 말라. 이 말은 어느 정도는 진리이고 어느 정도는 독선이다. 

이미 우리는 경험했다.




▶몇 년전에 이 우울증과 관련된 책들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다. 세계의 빈곤과 

모멸을 선사하는 사회에서 일어난 붐이었다. 심리학 책들이 쏟아져 나왔고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는 불교와 명상, 영적 지혜들이 담긴 문장들이 팔려나갔다. 

우울증은 사회적 병리현상이자 문화적 자폐현상이다. 


▶슬픔을 건너는 지혜

정동의 정화(Katharsis), 기억과 망각의 기술, 파르헤시아(Parrhesia)라는 세

가지 치유의 언어를 발견할 뿐만 아니라 습관의 교정과 일상생활의 건강한 유지,

즉 자신의 영혼의 관리술을 또 하나의 처방으로 제시한다. 마지막 장에서는 니체적

치료술의 한 임상사례로서 무센브로크가 제시하는 철학상담적 임상을 다루었다.

니체에게서 치유의 길은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좋은 해석의 훈련이며, 부정적

의지를 긍정적 의지로 바꾸는 과정이자, 충만한 자기 관계의 훈련 속에서 삶을 아

름답게 이끌어가려는 창조적 의지를 실현하는 노력의 과정에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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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에 관한 소론

분위기를 만든다는 것에 대한 생각들이 든다. 

어떤 일을 할 때 분위기가 주는 '힘'이라는 것이 

무언가를 행하고 있고, 하려고 하는 '힘'보다 더 강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교실에 있으면서 더 느끼고 있는데 무엇을 학습할 것인가를 생각하기 이전에 

어떤 학습분위기를 만들 것인가하는 것이 더 중요할 것 같다. 

분위기를 안-팎으로, 나-세계의 것들과 끊임없이 교차하며 

엮이는 것.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까.  



 

기분지어진 공간

빈스방거인데, 그는 정신병리학에서의 공간 문제("Das Raumproblem in der Psychopathologie", 1933)에서 결코 인과관계로는 설명할 수 없는 <><바깥>의 불가분적인 통일을 <기분지어진 공간>(der gestimmte Raum)이라는 개념에 의해 표현하고 있다. 또한 슈트라서도 정서(Das Gemüt, 1954)에서 기분은 자아 감정임과 동시에 세계 감정이며, 기분과 분위기가 주-객의 구별을 넘어선 <초주관적 · 초객관적>인 차원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지적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현상학사전, 2011, 도서출판 b>

 

분위기라는 것이 초하는 것.

그러니까 자아와 세계를 넘나들고, 주와 객도 넘나들고,

모든 구별을 넘어선 자리에서 일어난다는 것.

그것이 영향을 준다는 것.

분위기의 공간성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걸 초-공간성이라는 건.......

칸트의 냄새가 조금 나기도 하고.

일단 주목할 부분은 세계 감정자아 감정동시에 드러난다는 것.

 

교육적 분위기

교육적 분위기(PädagogischeAtmosphäre)는 교육이 수행 되는 배경으로서의 감정적이고, 기분적인 상태 전체 및 공감과 반감의 관계 전체로 정의하고 있다(오인탁·정혜영,2005:91). 다시 말해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은 개개인의 다양한 삶으로의 확장 또는 발전이지만 그러한 과정으로 이행되기 위해서는 교육 작용이 이루어지고 있는 시점에서의 교육행위자 간에 주고받는 특별한 감정적 교류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Heidegger에게 있어 인간 존재의 이해는 이성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언제나 하나의 기분(Stimmung)’에 사로잡힌 존재라는 사실에서부터 출발한다(Heidegger,1983:10). 기분은 존재가 자신을 알리는 메시지이고,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한 가지 방식이며, 오래 전 과거로부터 존재해 온 현존재의 자기현시 방식이다(박근배,2012:26). 달리 말하면,‘세계--존재로 살고 있는 현존재의 존재가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 이성을 통해 그 메시지가 무엇인지 언어로 해독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기분을 통해 현존재는 이미 예민하게 그 신호를 수신하고, 반응하며, 해석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분위기는 인간의 심연에 자리하고 있는 기분에 근거하고 있다. 이와 같이 분위기는 기분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과 주위 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에서 한 개인이 자신의 주위 상황이나 환경으로부터 느끼는 기분을 분위기라고 정리할 수 있다

 

기분과 분위기의 관계는 하이데거에서 비롯되는데.

인간은 언제나 기분에 사로잡힌 존재인데.

그것은 세계--존재로서의 인간이 주위상황이나 주변환경으로부터 느끼는 기분.

그 기분을 분위기로 보고 있다.

분위기는 기분들의 네트워크.

기분의 자기현시-세계현시가 분위기 인 것이다.



한자어: 분위기

한자어로 분위기雰圍氣를 뜯어보면

은 비 와 분합쳐서 만들어진 말

비가 나누어진다는 의미이니 안개에 가까운 듯.

는 한계지어진 공간을 둘러싸고 있다.

분위기는 안개처럼 특정한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기운'을 말한다.

어떤 기운, 어떤 공간성, 어떤 안개같은 기운을 이야기다.

분위기를 나타내는 개념들 중에 가장 정확하고 명확한 개념인 듯 하다.

-희랍어: Hauch-Kreis

어떤 대상이 그것을 느끼는 사람에게 와닿는 숨결과 같은 오묘한 분위기.

희랍어에서의 분위기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와닿는'에 있다.

한자어에서의 분위기가 '둘러싸고'있는 것이라면 희랍어에서는 '와닿는'것이다.

이 두가지를 동시에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둘러서 와닿고 있는 것' 이것.

 

군대: 분위기 잡기

"야!"


군 복무시절 늘 분위기는 잡는 것이었다.

분위기란 풀어지면 안되고 늘 분위기는 잡아두는 것.

상병들과 병장들은 점호시간이면 엄숙함과 잔인함으로 분위기를 늘 잡곤 했다.

헤이해진 분위기를 낚아채서 분위기를 잡는 것.

"!" 이 한마디면 게임끝. 내무실을 '둘러싸고 있는' 분위기는

따로 사유하거나 성찰하지 않아도 그대로 '와닿는'.

이 분위기는 반드시 잡아야 하는 것,

움켜쥐고 흔들어야 하는 것. 만들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잡아채야하는 것으로서 도래한다.

 

-선배들: 분위기 만들기

고교시절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분위기라는 것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선배들의 어깨너머로 보았던 식구총회, 운동장 사용법, 교무실 점거하는 법 등등.

다양한 방법들을 분위기로 배웠다. 그 누구도 '이렇게 해, 저렇게 해'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만들어 놓은 분위기란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했다.

선배들의 행동과 말투, 분위기들을 떠올려 본다. 아무도 말을 하고 있지 않지만

들리는 것. 학교와 교실을 둘러싸고 있는 공기, 안개. 그것.

 

교실: 분위기 흐리기

어느 정도 집중된 분위기 속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 이런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마이쮸" 하다가 "마이쭈"하는 학생이 있다. 대체로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지만 짜증스러움의 기운이 교실을 가로지른다. 분위기가 흐려지는 것은 한 순간이다. 분위기는 결국 흐름같은 것인데,

그 흐름을 흩트리는 상황들은 늘 발생한다. 분위기는 때로는 반전된다.

기압들의 접속이 어떻게 날씨로 이어지는를 알면 이해하기가 쉬운 듯 하다.

저기압과 저기압이 만나 장마가 이어지는 것 처럼.

분위기의 반전, 전환은 지금의 흐름과는 다른(낯선)것과의 접속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분위기의 집합성

악이라는 것은 개인의 속성이 아니라 집단적 분위기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집단적 분위기. 아렌트의 분위기란 개별적이지 않다. 집단적, 공동체적 분위기는 개별자들과 타자들간의

모임, 접합된 상황속에서 분위기는 일어나는 것. 그래서 분위기란 언제나 사회적이다.

아렌트가 말하는 '' 뿐만이 아니라 '' 혹은 '정의'같은 것도 이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분위기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아우라

"어느 여름날 오후 휴식의 상태에서 휴식자에게 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먼 지평선의 산맥이나 나뭇가지를 보고 있노라면바로 이 순간 우리는 이 산과 나뭇가지가 숨을 쉬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이러한 현상을 우리는 산이나 나뭇가지의 분위기가 숨을 쉬고 있다고 말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벤야민은 분위기(aura)라는 말을 비평의 언어로 다듬은 사람이다.

구절을 끊어서 읽어보면 "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것들은 단순한 대상으로서의 타자가 아니다. 산맥과 나뭇가지들은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 던져진 그림자를 받아들이면서 "나뭇가지가 숨을 쉬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 그 느낌. 타자에게서 전달되는 "숨 쉬고 있음"을 느끼는. "아무리 가까이 있다고 느껴지더라도 먼 것의 일회적 나타남"이라고 벤야민은 정리하고 있다.

벤야민의 분위기. 비평의 언어로서 사용되는 것만이 아니라 인식론적 차원의 지평이 넓혀진다. 대상과 관계맺는 숨결과 시선들의 교차. 상호-교차하는 느낌. 느슨하지 않은 상태의 느낌. 어떤 것이 벌어지고 있는(생성되고 있는) 체험의 장. 교차하는 교감.

왕따 문제같은 경우. 그것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정한 분위기가 응축되어있다. 무시하는 이와 무시당하는 이. 너무 많은 것들을 읽어낼 수 있다. 사회적인 차원, 정신분석적 차원, 경제적 차원, 문화적 차원 등등. 잘 드러나지 않는 것과 교감을 나눈다는 것은 뭘까. 먼 지평성의 산맥과 나뭇가지가 던지는 그림자를 보는 것. 구체적인 사안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발현되고 있고, 펼쳐지고 있는 분위기로서 바라보는 것.

분위기는 단순한 기분상태, 미적인 환상이 아니라 사물과 사람/ 사람과 사람/ 주체와 타자와 같이 관계맺는 것들은 저마다의 삼투작용. , 서로를 침범하고 오염시키고 간섭한다는 것.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인상. 분위기는 확실히 공간적이고 사회적이다.

 


 

분위기를 정확한 개념으로 정리할 수 없는 개념으로 보인다. 합리적으로 설명되기 전에

문학의 공간에서 묘사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분위기는 조성되는 것이다.

분위기는 어떤 징조이고 어떤 것에 의한 영향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 분위기를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조성물들을

바꾸어나가는 것. 그 대상은 교감을 나누는 것.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는 기획과 연출에 의한 것이다.

분위기란 기운들의 네트워크이다.

이런 네트워크들이 만들어내는 공기의 조성은 '감응'에 가까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분위기를 만다는다는 것. 어떤 공간에 서려있는 무늬같은 것은 아닐까

교실의 무늬. 나의 무늬가 만들어내는 분위기라는 것은 어떻게 말해 볼 수 있을까.


 

 

<Peter Marlow,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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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에 관한 소론


<Olivia Arthur, 2012> 



(박남희 <혐오의 혐오? 여성혐오에 분노하기> 수유너머N 토론회 발제문 발췌 및 정리) 


'개'라는 접두사를 표현한 말들을 많이 쓴다. 

개좋아, 개싫어, 개짱나 등등. 이 정도 표현은 과장법으로 봐줄만 하다. 

그런데 개독교, 개보녀, 개저씨 등등. 이런 과격한 표현들. 

어느덧 나도 꼰대가 되어서 그래서?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일까. 

이러한 과격함이 향하는 곳은 다소 분명해 보인다. 

모로오카 야스코의 <증오하는 입>에서는 일본 재일한국인에 대한 혐오발언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혐오발언이란 넓게는 인종, 민족, 국적, 성별, 성적 지향 등의 속성을 갖는 소수자 집단이나 개인에게 

그 곳 속성을 이유로 가하는 차별 표현"이다. 그리고 혐오 발언의 본질은 소수자에 대한 '차별, 적대, 폭력의 선동' 

'차별을 선동하는 모든 행위'이자 표현에 의한 폭력, 공격, 박해이다. (모로오카, 2015:84)

 

과격한 표현이 등장하지 않더라도 사회적 약자에게 그들이 갖는 속성을 근거로 가하는 차별을 확대시키는 표현들은 

차별구조에 공모하는 문장 자체가 소수자에게 가하는 폭력이기 때문에 심각해지는 것이다. 


감정은 그저 개인들의 내적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 간의 관계 속에 그리고 개인과 그들의 사회적 상황 간의 

상호작용 속에 존재하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사회적 조건이 감정을 촉진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감정은 사회적 관계로 이해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바바렛 2007: 121) 



감정은 어떤 상황, 조건 없이 일어날 수 없다. 감정의 과정은 외부와의 접촉에 의해서 촉발된다. 

이 외부성은 사회적 환경, 문화적 풍경 속에서 일어나는 관계망 속에서 일어난다. 감정이라는 것이 

공통된 구조적 상황을 공유하면 집단의 수준에서 공통의 감정을 경험할 수 있다.  


역겨움. 마사 너스바움은 혐오는 오염물이 입을 통해 나의 신체 속으로 들어온다는 관념, 이로 인해 자신이 

오염 될 수 있다는 관념을 수반" 한다고 한다. 


"혐오는 사회적 차이와 무관하게, 자신이 유한하며 퇴화/부패하기 쉬운 동물적 존재라는 사실을 강하게 상기시키는 대상을 

섭취하기를 거부하고, 이러한 대상에 의해 오염되지 않으려는 감정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너스바움, 2015: 183) 



오염가능성은 혐오의 감정의 근저를 차지한다. 혐오는 혐오를 불어일으키는 대상의 성질에 의해 유발되기 보다는, 이 대상이 자신을 

오염시킨다는 주체의 인식에 의해 유발된다. 혐오가 실제적으로 오염을 불어일으키는 대상 뿐만 아니라, 상상적으로 오염을 불어일으킨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다른 대상으로 옮겨갈 수 있음을 시사한다. 오염되어 있기에 저열하다고 여겨지고, 오염되어 있기에 천하게 여겨진다. 



증오, 멸시, 비하, 혐오



"전통적인 형태의 여성혐오는 여성을 무시하는 태도인 여성멸시와 다르지 않았다. 흥미로운 것은 2000년대 이후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여성을 싫어하고 폄하하는 태도는 멸시라기보다는 혐오phobia의 형태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어느 정도 여성에 대한 사회적 ‘두려움’이나 ‘위협감’을 동반한다는 의미다."

-손희정,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문화과학/ 원문출처http://cultural.jinbo.net/?p=1256



혐오는  두려움과 위협감을 동반한다. 최근 유럽에서 불고 있는 시리아 난민을 둘러싼 혐오의 문제들이 번지고 있기도 하다. 

독일에서는 네오나찌들이 드러내놓고 혐오를 표현하고 있기도 하다. 


"불안의 판타지 안에서 여성은 꽃뱀 혹은 먹튀녀가 되거나 남성을 짓밟고 올라서서 얼마 안 되는 밥그릇을 강탈해갈 수 있는 권능을 지닌 경쟁자로 등극한다."

 -손희정, 우리시대의 여성혐오, 문화과학/ 원문출처: http://cultural.jinbo.net/?p=1023




이 불안은 비단 밥그릇(정치경제)만의 문제일까. 오히려 신체적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증오에는 혐오와 다른 가능성이 있다. 혐오가 어떤 범주(인종, 민족, 성, 계급 등등)를 통해 작동하는 것과 달리, 증오에는 어떤 개별적 경험에서 비롯되는 구체성과 정리되지 않은 감정을 지닌 신체성이 있다. 아직 무엇이 될지 알 수 없는 증오의 힘을 통제하고 어떤 범주 속에 고정시키는 것이 혐오의 기능이다. 유동적인 관계들과 결부되어 있기에 사랑으로 반전할 수도 있는 증오의 가능성을 혐오는 봉쇄한다. " 

-증오와 혐오 사이 / 후지이 다케시/ 한겨례/ 원문출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06581.html

증오와 혐오의 구분에서 무엇을 알아 볼 수 있을까. 
전통적인 의미에서 여성, 소수자들을 향한 것을 멸시였다.  '무시'하고 조롱하면 그만이었다.  여성비하, 장애인비하와 같이 이 전에는 
무시하고 간다는 맥락에서 읽혔다면 2000년 들어서는 멸시와 비하의 차원을 넘어선 혐오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의문과 질문들 
증오, 비하, 멸시, 혐오는 서로 비슷한 지점에서 발생한다. 나의 자리를 침법-가능성, 오염-가능성에 기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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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보다빠르게미래로달아나라 -이상,삼차각설계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