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청소년 입문서 간단리뷰

청소년들과 만나는 걸 준비하면서 페미니즘에 입문하기 위해 어떤 책이 좋을까 싶어 읽은 책들, 

 

 

<학교에 페미니즘을, 초등성평등연구회, 마티, 2018>

-초등학교 교사들이 자기-현장에 대한 기록. 

-요즘 어린이들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기록. 

-요즘 어린이들은 뭔가 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도 요즘 어린이들에게도 젠더 박스의 영향은 여전하다는 생각도 

 

<나의 첫 젠더 수업, 김고연주, 창비, 2017> 

-청소년성과 젠더성이 교차하는 지점(몸, 연애, 엄마, 성역할, 가족)에 대한 최적의 입문서. 

-청소년들이 겪을 수 있는 주변 세계에 대한 알맞은 높이의 해설서. 

-사회과학적 통계들, 연구논문들의 인용, 역사들과 이야기들까지 알맞은 눈높이를 맞출 줄 아는 글쓰기 

 

<소녀,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라, 정희진 외, 우리학교, 2017> 

-전체적인 리듬 구성과 기획에 있어서 조금 아쉬운 책. 

-문미정의 <주먹 꼭 쥐고, 배에 힘 빡 주고> 라는 챕터가 인상적임. 

 

<걸페미니즘, 양지혜 외, 교육공동체벗, 2018> 

-여성 청소년들의 다양한 국면(학교, 가족, 남자친구들 등등)에 대한 기록. 

-청소년성이 젠더성과 교차하는 지점에 대한 온도 높은 사례들과 그 경험들. 

-청소년들과 함께 읽기에 딱, 좋은 책. 

-타인의 경험을 ‘듣는 자리’에서 어떤 자세여야 할지 생각해보게 하는 책. 

 

<20대 남자, 천관율, 정한울, 시사인북, 2019> 

-사회과학적 징후 읽기 

-청년과 청소년 사이의 간극과 그 연속성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밝히는 책. 

-단행본으로 나올 정도는 아닌 듯. 

 

 

 

 

 

 

사랑 예찬(4장~결론). 알랭 바디우. 조재룡 역. 도서출판 길. 2016.

사랑 예찬. 알랭 바디우. 조재룡 역. 도서출판 길. 2016.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온갖 고독을 넘어서 세계로부터 존재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모든 것과 더불어 포획되는 것입니다." (113) 



7

아이의 지점 


바디우의 친구는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사랑이라? 그래 그것은 둘의 시련이지. 사랑은 둘의 선언이고, 영원이야. 하지만 하나라는 질서 속에서 그 증거를 만들어내야만 하는 어떤 순간이 있게 마련이지”라고 말이다. 즉, 아이가 태어나고 난 뒤로는 하나의 문제, 하나의 질서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디우는 사랑을 이렇게만 본다면 “불임 커플, 동성애 커플 등에게서 사랑의 특성을 부인하게 된다며” 바디우는 그의 견해에 반대한다. 그리고 바디우는 아이를 두고 “하나의 지점, 이라고 이름붙인 바로 그 자격으로 사랑의 공간에 속한다”고 한다. 하나의 지점이라. “하나의 지점,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 긴밀해지는 특이한 한순간이며, 그러나 한편, 이 순간에 사건은 변형되고 이전된 형태로만 다시 찾아오는 것과 마찬가가지로, 다른 어떤 면에서 보면 ”다시 선언“ 하도록 당신을 강제하면서 재연되는 것”이다. 바디우는 하나의 지점이란 “정치적이건, 사랑에 관해서건, 예술적이건, 학문적이건, 하나의 진리를 구축하는 과정들이 당신이 사건을 받아들이고 선언했던 최초의 순간에 그렇게 했던 것처럼 근본적인 선택을 갑작스레 다시 취할 수 밖에 없게끔 당신을 강제하는 그런 순간”을 말한다. 그래서 하나의 지점에 섰을 때 “나는 이 우연을 받아들이고, 그것은 원하며, 떠맡는다.고 다시 한 번 말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아이는 사랑에서 하나의 지점이라는 형태로 사랑의 과정에 속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적인 동시에 난관이기도 한 탄생 주위로 거개의 커플들에게 일종의 시련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해, 아이는 하나이기 때문에 결국 둘을 아이 주위로 재편성해야만 할 것입니다. 더 이상 둘은 이 지점에서 직면하기 이전에 그래왔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 세계에서 함께하는 그런 경험을 지속할 수 없게 됩니다.”


8

사랑과 정치 


“정치의 본질은 다음과 같은 질문 안에 들어 있습니다. 결집되고 조직되었을 때, 개인들은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결정할 수 있는가? 사랑에서는 두 사람이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를 창조적인 것으로 변화시켜갈 수 있는지의 여부를 알아보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정치에서는 다수로, 게대가 대중 속에서 우리가 평등을 창조해낼 수 있는지 그 여부를 알아보는 것이 문제가”된다.

바디우는 정치의 목표는 “공동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지, 권력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국가없이고 정치는 가능하다는 것. 사랑 역시 가족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의 목표는 “차이의 지점인 세계를 그야말로 하나하나 빠짐없이 경험해나가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바디우가 말하는 정치에서 ‘적’에 대한 개념은 중요하다. “정치에서 적과 맞선 싸움은 행동을 구성하는 요소입니다. 적은 정치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어서 “진정한 정치라면 모두 확실한 적을 구별해”낸다고 한다. 


9

지속되는 사랑 (충실성)

“기적적인 만남의 순간은 사라으이 영원성을 약속합니다. 하지만 저는 덜 기적적이면서 훨씬 더 ‘힘들여 노력하는’ 영원성의 개념, 다시 말해 단계별로 집요하고 끈덕지게 이루어진 시간적 영원성의 구축, 둘의 경험의 구축을 제안하고자 시도하는 것입니다. 저도 만남의 기적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만남을 고립시켜버리거나 매 지점에서 구축된 진리의 저 힘들여 노력한 미래로 그 방향을 돌려놓지 않는다면, 만남의 기적은 초현실주의 시학에만 속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힘들여 노력하는”이라는 말은 긍정적인 의미에서 취해졌습니다. 단지 기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는 주된 업무도 있는 것입니다. 늘 활동상태에 놓여 있어야 하며, 주의해야 하고, 저 자신이나 타자와 함께 결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하고, 행동하고, 변형시켜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힘들여 노력한 일의 내재적 보상으로서 바로 행복이 존재하게 됩니다.“(90) 

사랑은 끈질김의 체제 아래에 위치시킴으로서 사랑은 구축하는 것이라는 바디우의 말은 설득력있게 들린다. 사랑의 환상성에는 일상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벗어놓은 양말이 보이지 않는다. 사랑이 이루어지는 공간은 매끄러운 환상성을 공유하는 만남의 기적을 지나 사랑의 구축이 아니고서는 건널 수 없는 시간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을 건너기 위해서는 사랑의 반복 체제에 대해서 물어야 한다. “욕망이 즉각적인 힘이라면, 사랑은 정성과 재연을 요구합니다. 사랑은 반복 체제를 인식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줘“라든가 아주 빈번하게 ”더 나은 말로 사랑한다고 해줘“가 그것입니다.”(94) 


10 

대가를 지불하는 사랑 


“자유의 확연한 승리를 위해 사랑은 어떤 대가를 지불하였는가? (97) 



11

진리 생산으로서의 사랑 


바디우는 자신의 철학적 개념을 빌려온 사랑을 “진리의 절차”라고 말한다. 그것은 “어떤 형태의 진리가 구축되는 하나의 경험”이라는 것이다. “시련을 받아들이고, 지속될 것을 약속하며, 바로 이 차이에서 비롯된 세계의 경험을 수용해나가는 모든 사랑은 자기 고유의 방식으로 차이에 관한 새로운 진리 하나를 생산해냅니다.”(51) 그것은 모든 사랑에는 보편적인 것, “모든 사랑이 하나가 아닌 둘이 되는 것과 연관된 진리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제시한다는 뜻”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서로의 이익만을 챙길 단순한 교환처럼 인식되지 않으며, 미리 수익성을 기대하고 진행되는 투자처럼 장기간 계산되는 것도 아니므로, 사랑은 진정 우연으로 인해 발생한 믿음”(27)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 예찬(서론~4장). 알랭 바디우. 조재룡 역. 도서출판 길. 2016.

사랑 예찬. 알랭 바디우. 조재룡 역. 도서출판 길. 2016.



“사랑은 재발명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아르튀르 랭보, 착란1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니콜라 트뤼옹과 함께한 대담집. 이 대담은 2008년 7월에 이뤄짐. 


1

전사자 제로의 사랑 


“위험없는 사랑을 당신에게!”라는 프로파간다를 바탕으로 “사랑의 안전한 개념”을 부각시키고 있는 요즘. (16) 사랑의 위험과 우연성을 배제하는 방식의 사랑이 도입되고 있다. 하지만 “위험이 부재하는 체제”(17)에서 말하는 사랑은 프로파간다에 불과하다. 이것은 사랑에 드러워진 첫 번째 위협이다. 

사랑을 위협하는 두 번째. “바로 사랑에서 모든 중요성을 박탁해버리는 것”이다. 사랑에 있어서 중요한 “타자에게서 비롯되는 시련이나 심오하고 진실된 온갖 경험을 완전히 회피하려 한다”(18)는 것이다. 즉, 제한된 쾌락이다. “보험 계약서의 안전과 제한된 쾌락이 가져다주는 안락이라는, 사랑의 두가지 정적”(19)이 오늘날의 사랑을 위협하고 있다. 바디우는 말한다. “안전과 안락에 대항하여 위험과 모험을 다시 창안해야만 합니다.”(20) 


2

실존적 제안으로서의 사랑 


사랑에 관한 극단적인 두 입장. 우선, 쇼펜하우어. 두둥. 쇼펜하우어를 필두로 한 “반사랑의 철학”은 “특히 여성들이 사랑의 열정을 품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데, 하등 가치가 없는 이 인간이라는 종자가 여성을 통해서 존속 가능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와는 또 다른 관점으로 키르케고르같은 철학자들. 키르케고르는 심미적 단계의 사랑의 경험은 헛된 유혹을 반복하는 것. 윤리적 단계의 사랑은 사랑은 불변을 향하는 영원한 맹세. 종교적 단계로 까지 이어진다고 보았다. 쇼펜하우어와 키르케고르 같이 한쪽은 “합리적 의혹”과 다른 한쪽은 “종교적 도약”(25)에 이르면서 철학에서의 사랑은 엄청난 긴장 속에 자리하고 있다. 

“사랑에 드리워진 철학적 개념들에서 세 가지 원칙을 구별”하면서 1)낭만적 개념(만남의 황홀함) 2)상업적이고 법률적인 개념(최종적 계약으로서) 3)회의적 개념(사랑에서 환상을 만들어내는) 알랭바디우는 자신의 철학에 기반을 둔 4)진리구축으로서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하나가 아닌 둘에서 시작되어 세계를 경험하게 될 때, 세계는 과연 무엇일까요? 동일성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차이로부터 검증되고, 실행되고, 체험된 세계란 과연 무엇일까? 저는 사랑이 바로 이런거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성적 욕망과 그 시련들 (...) 차이의 관점에서 시련을 영위하는 것에 관여하게되는 바로 그 순간에서 시작”(32)되는 것이라고. 그래서 “사랑은 실존적인 제안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은 단순한 나의 생존 충동이나 내가 잘 알고 있는 이해관심에 비추어, 탈중심적 관점에서 어떤 세계를 구축하는 것”(34)이라고. 즉, 사랑은 차이(둘)에 의해서 실행되는 실존적 어떤 세계다. 이는 “양자의 차이의 프리즘을 거쳐 세상에 전개됩니다. 사랑은 나의 개인적인 시선은 가득 채우는 무엇에 국한되는 대신, 이 세계가 이루어지고 탄생한 결과 존재하게 되는 무엇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세계의 탄생을 목격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가능성이 사랑 안에 존재”(35)한다고 말한다. 사랑은 세계를 탄생시키는 한에서 존재하는 것. ‘나’라는 중심을 무너뜨리고 얼굴을 드러내는 것. 둘(차이)에 의한 관점에서 목격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공간이라는 것이다. 


3 

만들어가면서 되어가는 사랑 


사랑의 두 가지 출발점에서 대해서 바디우는 말한다. 우선 “분리나 구분”이 그것이다. “사랑은 어쨌든 두 가지 상이한 재현의 자세, 두 가지 형상과 직면” 한다. 그래서 “사랑은 우선 이 둘인 무엇에 관여”(39)한다. 다음으로, 사랑이 두 가지 상이한 분리를 전제하기 때문에 그것은 “새로운 방식으로 세계를 경험하는 바로 그 순간, 사랑이 불확실하거나 우발적인 어떤 형태를 취할 수 있다”(40) 바디우는 이것을 자신의 철학적 개념인 “사건”과 연결시킨다. 바디우에게 “사건”이란 “사물들의 즉각적인 법칙에 속하지않는 무엇에 사회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사랑의 놀라움들”은 “개인인 두 사람의 단순한 만남이나 폐쇄된 관계가 아니라 무언가를 구축해내는 것이고, 더 이상 하나의 고나점이 아닌 둘의 관점에서 형성되는 하나의 삶”(41)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디우가 계속해서 말하고 있는 “둘이 등장하는 무대”라는 의미이다. 


4

사랑의 지속을 향한 모험의 구축  


만남으로서의 사랑은 “기적의 범주에 속하는 어떤 것, 즉 존재의 강렬함, 완전히 녹아버린 하나의 만남이 도래”하는 것이다. 이러한 만남은 “서로를 통합해버리는 사랑 개념”(41)으로 “급진적이고 낭만적인 사랑개념”이다. 그래서 사랑은 “만남으로도 환원 도리 수 없는데, 이는 사랑이 구축이기 때문”이다. 만남으로서의 사랑은 “그 순간의 황홀감은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지속되는 하나의 구축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끈덕지게 이어지는 일종의 모험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모험적인 측면은 사랑에 필요한 거싱겠지만, 한편, 그렇다고 해서 사랑의 끈덕짐을 덜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최초의 장애물, 최초의 심각한 대립, 최초의 권태와 마주하여 사랑을 포기해버리는 것은 사랑에 대한 커다란 왜곡일 뿐입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공간과 세계와 시간이 사랑에 부과하는 장애물들을 지속적으로, 간혹은 매몰차게 극복해나가는 그런 사랑일 것이다.”(43) 

여기에서 사랑의 지속성이란 “삶에서 지속되고 있는 여러 가지 다른 방식을 사랑이 창출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44)고 말한다. 또 사랑은 “미지의 무엇을 지속시키려는 욕망”이리고 한데, 이것이 바로 “사랑은 삶의 재발명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재발명하는 것, 그것은 바로 이러한 재발명을 재발명하는 것입니다.”(44) 


5

선언하는 사랑 


“나는 너를 사랑한다, 는 타입의 선언은 만남이라는 어떤 사건을 확정해주기 때문에 매우 근본적이며, 또한 책임을 부여”한다. “선언된 사랑의 요소에서 욕망의 효과들을 생산해내는 것은 직접적으로 욕망이 아니라 바로 이 사랑의 선언”이다. (47)  사랑은 “사건의 구조 안에 등재되는 것이 바로 선언을 통해서 일어날 수 밖에” (53)없다. 사랑이 만남의 차원에 있을 때에는 그것은 “전적으로 우발적이고도 우연한 특성에서 시작”되는 것인데, 이러한 “우연은 어떤 주어진 한순간에 고정”된다는 것이다. “우연이 지속성을 촉발”하는 순간이 사랑의 선언이다. 이는 “단순한 만남으로부터, 둘이라고 해독되는 유일한 세계의 패러독스를 향해 이행”(54)하게 한다. 만남은 선언에 의해서 “끈질기게 지속됨으로써 보편저긴 의미를 생산”하는 진리의 절차인 탓이다. 말라르메는 “우연은 결국 고정된다”고 말하는데, 이 말을 바디우는 “사랑과 사랑의 선언”에 적용한다. 

“사랑을 선언하는 것은 ‘만남-사건’에서 진리 구축의 시작 단계로 이행하는 것이며, 만남의 우연을 시작이라는 형식 안에 고정 시키는 것”이다. “내가 알지 못했던 누군가와의 만남이라는 완벽한 우연이 결국 하나의 운명이라는 외양을 띠게 되는 것이지요. 사랑의 선언은 우연에서 운명으로 이르는 이행의 과정이고, 바로 이런 이유로 사랑의 선언은 그토록 위태로운 것이며, 일종의 어마어마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사랑의 선언은 필연적으로 단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길고 산만하며, 혼동스럽고 복잡하며, 선언되고 또 다시 선언되며, 그런 후에조차 여전히 다시 선언되도록 예정된 무엇일 수 있습니다.”(55) 이것이 바로 “나는 너를 사랑해”이다. 이는 “우연으로부터 내가 지속성, 끈덕짐, 약속, 충실성을 이끌어 낼 것”이라는 말과도 같다. 그래서 사랑의 만남은 선언을 통해서 “견고한 구축으로 이행함을 의미”(56)하게 된다. 



6

사랑의 충실성 


말라르메는 시를 두고 “낱말에 의한 낱말로 극복된 우연”이라고 했다. 바디우는 이를 두고 “사랑에서 충실성은 이러한 끈질긴 승리를 지칭합니다. 다시 말해 지속성의 고안 속에서, 한 세계의 탄생 속에서, 나날 이후의 나날로 인해 극복된 만남의 우연을 지칭”(57)하는 것이다. 



아내 가뭄(5장~끝). 애너벨 크랩. 황금진 역. 황금가지. 2016

아내 가뭄. 애너벨 크랩. 황금진 역. 황금가지. 2016




5장-9장 



1

훈훈한 아빠의 순간 


“남자의 경우 주방에서 보이는 무능력은 100퍼센트 면제 받는다. (...) 주방에서 남성의 무능력은 거의 권장사항이다. 여기서 침착하게 추론해보면 문제의 그 남성에게는 부엌일 말고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 여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반해서 “주방에서 여성의 무능력은 모자람이고 어딘가 인간성이 부족하다는 암시다.” 

“훈훈한 아빠의 순간은 우리를 현혹”시키는데 그것은 “남성들의 무능함을 사랑스럽게 포장하고 찬양”하기 일쑤다. “이런 짓궂은 사람 같으니!”라는 정도의 탄성을 자아낼 뿐이다. 훈훈한 아빠의 순간은 어떤 일을 ‘악’ 소리 나게 못해도 괜찮다. 사실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좋은 일이다. 이런 순간들을 숱하게 주변에서 일어난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아빠가 육아하는 장면들이 엔터테이먼트로 등장하게 되는 것 역시, 훈훈한 아빠들은 육아에 서툴러도 지적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집안일을 하려다 실패한 남자의 이야기가 여전히 웃음을 자아낸다는 사실은 집안일을 여성이 능력을 발휘할 영역으로 굳게 믿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빠의 능력 부족은 웃음의 주요 원천”이다. 

“리베카 마이젠바흐는 2009년 발표한 논문 <여성 생계부양자>에서 남편보다 소득이 높은 여성은 ‘비전통적인 방식’으로 가사 문제를 해결하고 있으면서도 강력한 여성성을 드러내기 위해 남편의 무능을 과장할 수도 있다는 이론을 조심스럽게 내놓았다. (,,,) 여성 생계부양자들 대다수가 집안일을 자신들이 계속 관리, 감독한다고 밝혔다. 이 여성들이 집안일을 자신이 직접 하거나 남편에게 할 일을 지시했다 그리고 남편에게 허드렛일을 시킨 경우에조차 남편이 그 일을 제대로 못했다며 여전히 불평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혹은 남자들이 얼마나 깔끔하지 못한지, 할 일이 있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하는지 등 전반적으로 지적할 권리도 가지고 있었다. 마이젠바흐는 이렇게 썼다. 남자들에게 특정한 집안일을 하라고 어떻게 명령 혹은 부탁해야 할지를 강조한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이들 여성 생계부양자들은 집 안과 아이들을 단속하는 존재로서 아내의 젠더 경계에서 자리신들을 끼워맞춘다. 마이젠바흐의 연구에서 주목할 부분은 여성들이 젠더로서 말할 수 있는 자리에 머물려고 한다는 것이다. 젠더로서 말하는 자리는 사실상 이미 정해져 있는 사회적 역할에 계속해서 머무르게 하면서 가사노동에 대한 책임을 지우는 제도적 무의식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세상이 그렇다. 남자에게 집안일에 무능하다고 하는 것은 괜찮다.” 그러나 여성이 집안일에 무능하다고 했을 때에는 비난이 따른다. “여성이 집안일을 못한다며 남성을 흉을 봐도 되는 다른 이유는 가사 영역이 규제가 거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가정 영역의 외부에는 성차별법이 발효되어 있고 사회적으로 합의되어있는 영역과 규제가 있다. 그러나 가정에서는 다르다. “남자란 족속은 더러운 빨랫감을 방치한다거나 치약 뚜껑을 안 닫는다거나 아이들 등교 준비를 못 시킨다며 끝도 없이 불평을 늘어 놓을 수 있다.” 

저자는 몇일간 집을 비우게 되어서 “축구 팀원이 먹이고도 남을 만큼의 볶음밥을 만들어” 놓고 집을 떠났는데, 이는 “남편을 샌드위치도 못 만드는 팔푼이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깔고” 있는 것이며, “권력을 쥐려는 마이젠바흐식 숨은 노력”때문이며, 엄마의 “부재가 곧 비상사태라는 그럴듯한 환상을 심어주려는 의도”에서 였다고 밝힌다. 끝에가서 저자는 결국 “모든 것은 나의 터무니없는 망상”이었다고 밝힌다. “엄마의 순간은 이런 식이 되기 쉽다. 과부하가 걸려 있어 언제 툭하고 끊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순간” 속으로 자신을 밀어넣는 것이다. 

“여성들은 일터와 집 양쪽 모두에서 흠잡을 데 없이 유능한 모습을 보여주려 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직장과 가정에서 하는 역할이 서로 영향을 주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구분 짓는 전략을 쓴다. (...) 하지만 이런 전략으로 얻는 것은 무엇일까? 대개는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있는지 자신 외에는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닫는 일이다. 그래서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사생활 영역에서 혼자 미쳐가는 특권만 누릴 뿐이다.” 이와 동시에 육아는 역시 “여자들이 더 잘한다”며 남성들의 무능을 전시하며 깔깔거린다. 



2

여자가 아기를 더 잘 돌본다는 환상 


“어떻게 여자가 아기를 더 잘 돌본다는 무언의 전제가 생겨났을까? (...) 육아 전문가도 나머지 다른 분야의 전문가와 다를 게 없다. 하다 보면 느는 것이다. 부모 중 한쪽에게 능력치를 쌓을 기회가 주어지면 그 쪽은 더 일찍 전문가가 된다.” 이러한 전통적인 접근법은 “오직 자신만이, 진심으로 이런 감정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게 아이가 생기면 보이는 가장 흔한 반응이다.” 남성들을 시작할 때부터 육아에서 배제되어 있다. “어머니에게 내가 더 잘한다는 생각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줄 것이다. 그런 생각이 없으면 여자는 실존적 두려움과 희열이 뒤섞인 호르몬의 바다에서 허우적댈지도 모른다.” 

노르웨이는 “1993년 남성 육아휴직 의무화를 도입”하였다. “1977년부터 유급 육아휴직제도가 있었다.(..) 오늘날 노르웨이의 아버지들 90퍼센트가 육아휴직을 쓰고 있다. (...)노르웨이 상황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선택권이 보장되고 장려책과 초보 부모일 때부터 육아에 참여할 기회만 주어지면, 남녀 모두 육아를 잘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물로 노르웨이가 갖추고 있는 완벽한 보육 시실도 도움이 되기는 했다. (...) 육아휴직의 발전이 스칸디나비아 모델보다 훨씬 더딘 오스트레일리아에도 아버지가 부모기 초기 단계에 휴직을 하면 장기적으로 볼 때 더욱 적극적인 부모가 된다는 증거가 있다. 자녀를 출산 할 즈음에 열흘 혹은 그 이상 휴가를 낸 오스트레일리아의 아버지들은 아기가 유아가 되었을 때 육아 관련 활동에 더욱 자주 참여했다. (...) 유급 육아휴직은 복지 수단이 아니라 다른 제도와 같은 고용 보장”이다. “상황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보면 어떨까? 유급 육아휴직을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육아 전문가가 될 기회를 동시에 주는 거라고 본다면? 우리 사회는 아버지들에게 육아에 젬병이 되도록 허용할 뿐만 아니라 젬병일 거라고 기대한다. 젬병이 되라고 권장한다. 그래서 막상 젬병이 아닌 아버지를 보면 매번 놀란다.” 


3

가사노동의 가치 

“보모, 요리사, 가정부, 영양사, 식품구매사, 접시 닦이, 세탁부, 재봉사, 간호조무사, 정비사, 정원사, 운전기사 등 가정주부가 하는 일”은 무수하다. 이러한 아내의 가사노동의 가치를 결정하기 위해 “대체모델”과 “기회비용모델”로 가사노동의 가치를 결정하려고 하였으나 이 둘 모두 노동의 질을 평가하는데 유효하지 않다. 그래서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아내의 노동가치는 남편의 노동 가치와 직결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내의 존재 자체가 남편을 이런저런 일에서 어느 정도 해방시켜 밖에서도 돈 버는 일에 전념하게 해주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며 “여자의 노동가치는 남자의 노동가치와 직결된다”고 한다. 



4

세상에 정말 운이 좋네요 


남편이 아내 역할을 맡게 되었을 때 여성이 흔히 듣는 말은 “세상에 정말 운이 좋네요”이다. 사람들은 남편을 두고 “무슨 여신이 아닌 남신이라도 된 것” 마냥 추켜세워준다. 

이와는 정반대로 아내 역할을 하는 남편을 사회적 패자라고 여기기도 한다. “바깥일을 하기 보다 집에 아이들을 돌보는 남자들은 굉장히 이상한 시선을 받는다. 그런 남자들은 찬바람 이는 소외를 당하거나 입김 뜨거운 과찬을 경험하며, 그 중간은 거의 없는 양극단의 지대에서 살아간다. (...)집에서 애보는 아빠라고 답하는 남자는 두 가지의 광범위한 반응을 접하게 된다. 첫째, 다른 남자들로부터 미심쩍은 눈초리 또는 심한 경우 경멸까지 당할 수 있다. 둘째, 그 자리에 참석한 여자들로부터 죽을 때까지 키스를 당할 위험천만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집에서 애를 보는 아빠들은 우선 “정말 훌륭한 아빠”라는 반응에 시달린다. “남자가 육아를 위해 잠깐 쉬는 걸 섹시하다고 생각하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확인 할 수 있다. 이러한 여성들의 벅찬 애정 가운데 애보는 남자들은 “남자들한테는 왕따”를 당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아내가 자기보다 저를 더 나은 아버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자들은 그런 남자를 두고 “당신 왕재수야, 당신 때문에 스트레스만 늘었다고”라며 불평한다. 

다음으로 “어떻게 된거예요? 취직이 안돼요? 직장에 오래 못 붙어 있어요?”같은 질문에 마주해야 한다. 애보는 남자들을 “얼치기라고 생각합니다. 좀 부족한 남자로 여기는 거죠. 직장에서 잘리고 다시 취직을 못한 남자라는 겁니다. 능력이 없으니 훨씬 안일한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죠. (...) 집에 있는 남자들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사람들이 무심코 저지르는 무의식적 차별일 뿐이다. 그러한 생각은 사람들의 뇌리에 아주 깊이 각인되어” 있다. 

“여기서 뭐하세요?”라는 무언의 질문을 시선을 통해서 전달받기도 한다. 특히 엄마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그렇다. 아이와 엄마들만의 공간을 침범받는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집안일을 하는 남자는 패자인가, 승자인가?” 이러한 아찍한 양극단 사이에 갇힌 아버지는 자신이 실제로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올바르게 파악할 수가 없다. “오스트레일리아의 강력한 남성 생계부양자 문화가 지닌 힘은 거세고 사납기까지 하다. 여성이 한 가정의 주요한 생계부양자 노릇을 하거나 아버지가 집에서 아이들을 보는 게 불가능하지도, 불법이지도 않아. 또한 아무 쓸모가 없는 것도 아니다. 다만 사회에 퍼져 있는 정형화된 형태의 중력이 너무 센 것 뿐이다. 

*

“전업주부 아빠들이 사회에서 추방당한 것처럼 보이고 또 그렇게 느낄겁니다. 전업주부 아빠들은 사회 연결망이 하나도 없어요. 플레이 그룹에서 시작해야 하는데, 전업주부 아빠들한테는 그게 없죠. 그리고 일하는 남자들은 일하지 않는 남자들에게 손을 내밀지 않습니다.”





5

여성들의 눈치보기 


여성들은 남편이 가사를 전담할 때에도 눈치를 본다. “가사와 육아를 남자가 할 일이 아니라고보는 가정이 많은 듯 하다. 남자는 아버지로서 양육을 주도할 뿐 남자로서 청소나 그 밖의 집안일에는 관연하지 않았다.” 특히, “성역할이 바뀔 때, 육아와 관련해서는 남편이 일을 맡을 수 있지만, ‘아내’가 해야할 일의 범위에 드는 그 박의 다른 일은 너무 무리한 요구라는 거죠. 아니면 남자들 스스로 그런 일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남성 ‘아내들’이 여성 아내들과 똑가은 식으로 일을 하지 않으면, 여성 생계부양자들도 남성 생계부양자들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 여성들은 특히 “남편의 민감한 부분을 가려주려고 의식적인 방어책”을 쓴다. 이것은 전 세계적인 분위기이기도 하다. “방글라데시의 남편들은 일하는 아내가 자신들을 바람난 아내의 남편으로 만들까 봐 걱정했다. 인도의 중산층 일부는 일하는 아내가 남편의 특권에 치명타를 입혔다고 보았다. 칠레의 남성들은 아내가 ‘여성 우월주의자’ 혹은 남성화 될까과, 그래서 친구들이 자신을 못난 남자라고 생각할까봐 걱정했다. 케냐의 남편들은 아내가 일을 하면 가장의 권위가 위협받을까 봐 걱정했다.” 그래서 “가사노동은 협상카드”로 주로 쓰인다. 


6

남성생계부양자 모델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을 그렇게 오래된 것이 아니다. 가족이 부모 중 한 쪽만을 유급노동에 내볼 수 있다는 생각은 아주 오래된 모델이 아니다.(...)그것은 산업혁명 이후”에 벌어졌다. 산업혁명 이후 장인들이 손으로 만들던 상품은 공장에서 대량생산하기 시작했고, 폭발적인 경제 성장을 촉발했다. 이런 경제 성장을 발판삼아 중산층이 등장했다. 20세기 중반 즘 대부분의 가정이 단독 생계부양자의 수입만으로도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 “표준 근무일에 매일 공장이나 사무실로 출근하는 남자들로 구성된 질서정연하고 일사불란한 노동 인력을 갖춘 선진 세계는 이상적인 남자란 어떤 남자인지에 대해 지배적이고 손쉬운 판단 기준 또한 확립했다. (...) 자녀가 있는 남자를 더 우수한 직원으로 여기며, 정규직 직장이 있으면 더 좋은 아버지 일거라고 아주 당연하게 믿어버린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남성들에게 강력한 동기 부여가 되어주었다. (...)노동과 생산의 본질이 바뀌면서 뒤이어 일어난 어마어마한 구조적 변화로 남자들이 가정에서 제거되었고, 그것이 거대한 패턴으로 굳어졌다(...산업혁명은...) 인간이 자신과 자신의 역할을 규정”했다. 

이후 “여성에게 지난 반세기는 어마어마한 변화의 시기였다. 학력상승, 핵가족화, 제조업의 쇠토, 서비스 경제의 부상, 이러한 발전이 이루어지는 동안 엿어들은 일을 떠맡고 완수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품고 있던 여러 가지 기대들이 극적으로 바뀌었다. 여성의 유급 노동은 확대되었다. 그러나 어머니에 대한 기대 또한 확대되었다.” 

쿤츠는 어떤 의미에서 “남자들은 30년 전의 여성들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말했다 (...) 50년전, 여자들은 여기아 네게 있어야 할 곳이다. 여기서 벗어나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많은 여자들이 엿어다운 것에 대한 구시대적 발상을 벗어던져도 좋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남자들도 남성다움에 대한 종래의 견해를 뛰어넘는, 그 외 다른 보람 있는 것들도 있다는 사실을 점차 깨달아 가고 있다. (...)남자는 온화해야 하지만 기꺼이 쥐를 죽일 수도 있어야 한다. 이렇게 남자들은 어떻게든 가족을 보호하고 돈도 벌어야 한다는 구시대의 역할뿐만 아니라, 요즘 요구하는 새로운 역할까지 포함된 남성성의 표준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계속 듣고 있다. 여러 가지 모순되는 기대들에 시달리는 것은 당연히 불편할 수 밖에 없다. 최근 아버지들에게 가해지고 있는 스테레스와 중앙감(자녀에게 좀 더 자주 얼굴을 보이면서 동시에 직장에서도 존재감을 주어야 한다는 기대)은 시대에 뒤떨어진 남성 버전의 두 마리 토끼 질문이다. 

어쩌면 이제 남자들이 달려져야 할 차례일지도 모른다. (...) 삶의 짜임새를 바꾸고 성공이란 무엇이며, 좋은 아버지란 무엇인지, 좋은 노동자가 되는 것은 무엇인지 등을 가늠하게 하는 새로운 방식을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평범한 남자가 행동을 바꾸려면 대개는 외부적 사건이 필요하다(...)  우리는 일터에서 벌어지느 일과 가정에서 벌어지는 일이 완전히 다른 영역인 것처럼 군다. 그래서 일터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만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토론하고 고민하는데, 그렇게 하면 우리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여성에게 적극적으로 나서라고 열심히 독려할 뿐, 남성에게 가끔 뒤로 빠져도 괜찮다는 확신을 주지 못했다. 이미 그렇게 하고 있는 남성들이 아마도 변화의 선봉장이 될 것이다. 지난 반세기를 돌아보면 여성은 환골탈태했지만 남성은 답보 상태였다. 이 시기는 모든 것이 서툴 수 밖에 없는 진화의 사춘기를 비추는 역사의 창으로 우리 기억 속에 남을 것이다.”    




아내 가뭄(서론~4장). 애너벨 크랩. 황금진 역. 황금가지. 2016

아내 가뭄/ 애너벨 크랩/ 황금진 역/ 황금가지/ 2016





+정희진 추천사 중

“인간성과 정치의식의 가장 정확한 바로미터는 ‘집안일’에 대한 관점과 실천이다.” 

-정희진 추천사 중




++쪽글 서론~ 4장


1 

문제를 완전히 잘못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애너벨은 “우리가 문제를 완전히 잘못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며 여성들의 사회적 변화를 하는 동안 “남성의 경우에는 달라진 게 별로 없다”고 한다. “변화라고 해봤자 임금이 올라갈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다는 정도”일 뿐. 그래서 애너벨은 “더 이상 여성을 피해자로만 보지 않고 남성이 기회를 놓친다는 입장에서 보면 어떻게 될까?”하고 질문한다. 기회를 놓치고 있는 남성들의 상황을 보면 “분명 비극이다. 대부분의 아버지들이 배제당한 채 그 세계를 경험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느끼는 여자들, 일터에 갇혀 있다고 느끼는 남자들”만이 우글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치 직업이 없는 사람처럼 아이를 기르면서 아이가 없는 사람처럼 일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는 엄마들과 마치 아이가 없는 사람처럼 일을 하고 있는 아빠들의 사회.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여성들을 일터로 끌어들이기 위해 온갖 캠페인을 벌이고 개혁 방안과 사상적 기반 등을 연구해왔다. 그런데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남성을 일터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라고 애너벨은 말한다. “구조적 문제는 여자를 일터로 끌어들이는게 아니라 남자들을 일터에서 끌어내는 데 있다면?(...) 남성들이 일터에서 나가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장벽은 없을까? 유리 비상계단이 있다면?”이라고 질문한다. 



2 

아빠들은 달라진게 없다 


“우리 사회는 아빠들에게” 출산 이후에도 “아무것도 달라진게 없다는 듯 계속 일할 것을 권한다.” 오히려 “아버지들은 첫아이가 태어나면 주당 근무시간이 5시간 정도 더 늘어난다.” 우리는 “우리 사회가 남성들에게 가사 노동을 별로 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남자들이 육아나 가사 노동에 뛰어든다면 소득의 상당 부분을 손해봐야 한다. (...)그러나 남자들이 놓치는 많은 일 중에는 멋진 일들도 꽤 많다. 예를 들면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 말이다. (...) 하지만 우리는 남자들에게 끊임없이 온갖 방법으로 그런 투자는 생각도 하지 말라고 권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특히 휴직과 관련해서 보면 더욱 그렇다. “지난 20세기 동안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수준에서 돌연사나 업무 능력 상실을 제외하고 남자들의 직장 생활을 방해한 주요 요인은 병역과 정리해고, 두 가지 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남자들이 이런 경험을 하려면 직장에서 쫓겨나야만” 한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에서는 대규모 정리해고가 실시되면서 “아버지 신드롬”을 낳았다. 미국에서 육아에 대한 관심이 전반적으로 확대된 것도 많은 남성이 해고를 당하면서 육아를 시작한 시기와 대략 맞아 떨어진다. 여자들이 출산과 육아를 이유로 노동시간을 조정한다면 “남자들은 아이 이외의 다른 압력이 있어야 직장을 떠났다. (...) 정리해고든 사고든 남자들을 일터에서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다른 뭔가가 필요하다.” 


3

남자들은 기대당한다. 


“요즘은 남자들도 자식에게 관심을 쏟아야 한다는 압박을 적잖이 받고 있다. (...) 남자들은 사랑해 마지않는 자식들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하지만 그러한 열망을 가로막는 요인들에 대해 남몰래 신께 감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남자들은 승진. 임금인상. 전망 좋은 사무실, 특별한 감투”를 요구하지만 “왜 육아휴직에서만 어려움을 느낄까? 그 이유는 모든 부분에서 남자와 여자에게 ‘더 많은, 더 높은’ 것을 향한 사회의 요구가 다르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보통 여자들이 출산 후 탄력 근무제를 요구하거나 복직 후 시간제 근무를 하리라 기대한다. (...하지만) 남자들이 그런 것을 요구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남자들 역시 요구하지 않는다. (...) 아이가 생겼을 때 남자들은 자신의 근무 방식을 바꾸는데 소극적이다. (...육아휴직 이후 복직한 남성들의 경우...) 임금 결정과 근무 조건, 업무 분장 등에서 불리한 대우를 받았다고 말했다. (...) 열 명 중 한 명은 실제로 사표를 냈다. (...) 누군가 가족 없나요? 왜 혼자 유난을 떱니까?(...) 성공하려면 가족과 주말만 보낸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지요.(...) 회사에서 가볍게 들볶이는 정도는 가족을 돌보려고 근무시간을 빼는 남자들한테는 아주 흔한 일이다. (...) 2013년 캐나다에서 중산층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실시했는데, 육아를 담당하는 아버지들이 전통적인 아버지들보다 직장에서 더 많이 시달린다고 한다. 일부 일터에서는 육아를 담당하는 어머니들보다 두 배 이상 시달리는 경우도 있었다. (...) 시달림에는 여러 유형이 있는데, 성별보다는 직장에서 구성원들이 전통적인 기대에 얼마나 부응하느냐와 관련 있었다. (...) 아이를 돌보고 있는 남성들은 유약하다고 여겼다. (...) 직장인이 일터에서 받는 가장 직접적인 피드백은 그보다 훨씬 낮은 수준에서, 훨씬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 바로 고용주와 동료들이 대하는 방식이다. 기획 회의 때 함께 가자고 하는가? 샌드위치를 먹으러 우르르 몰려 나갈 때 함께 가자고 하는가, 안하는가? 놀림을 당하는가? 상사가 미소를 지으면서 함께 농담을 하는가? 이런 것들이 바로 당신이 (직장) 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상태 지표들이다. (...)아이를 데리러 가느라 직장에서 일찍 나가는 것과 같은 행동을 할 때 직장 내에서 보이는 낮은 수준의 반응들은 후속 결정을 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물론 가금은 역경을 헤쳐 나갈 수도 있다. (...) 동료들의 놀림을 무시하는 찰리. 노려보는 상사와 눈싸움을 해야하는 브랜든. 노련한 대응으로 낮은 수준의 괴롭힘 정도는 깔끔하게 정리해버린 케이트. 하지만 인간은 인간이다. 인간은 대개 익숙한 것을 더 편하게 여긴다. 바로 그 때문에 지난 50년간 여성에게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는데도 남성에게는 아연실색할 정도의 아주 작은 변화만 일어난 것이다. 남자들은 아주 작은 변화만 일어난 것이다. 남자들은 여전히 일터에서 지나치게 많은 역할을 부여받고 가정에서는 지나치게 적은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이는 용납할 수 없는 돈과 권력, 영향력의 결합이 계속되는 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선택한 적 조차 없는 여러 기대들이 얽히고설킨 복잡한 거미줄 속에 꼼짝없이 갇혀버린 채, 아이들과 남자들 모두에게 비극이 지속되는 것이기도 하다.”  


4

아내라는 국가의 특별한 자원 


“아내란 국가의 특별한 자원이었다. 직업 세계에서 아내는 남자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아내는 가정을 안정적으로 꾸려나갔고, 남자들에게 이런저런 편의를 제공했으며 사랑스러운 아이들도 낳아주면서 남자의 노동 능력을 향상시켜주었다. 여기서 아이의 존재는 열심히 일하고 돈을 모으게 하는 강력한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결혼이라는 행위는 남자를 더욱 귀한 존재로 바꿔주며, 더욱 안정적인 직장에서 승진할 수 있는 탄탄한 도덕적 토대로 만들어주었다. (...) 반면 여자에게 결혼은 남자와 정반대를 의미했다. 남자나 여자나 똑같이 가정과 아이가 있지만 여성은 직장에서 믿음직한 인재로 인정받지 못했다. (..)남자에게 결혼은 소득 증가를 의미”하는 “결혼 프리미엄”이 붙는다. 이는 전세계적인 현상인데 “평균적으로 약 15퍼센트” 결혼 이후 남자들의 임금이 올라간다.  


5

가사노동의 전문화 


“여기서 전문화란 남녀가 결혼해서 함께 살게 되면 생활 속에서 일을 분담하게 된다는 의미다. 가령 한 사람이 요리를 담당하게 되면 상대방은 요리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다른 일을 능숙하게 익힐 시간을 벌 수 있다. (...) 이는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는 매우 효율적이다. (...그래서...) 남편들은 일터에서 더욱 잘나가게 되고 지루하고 고된 그 모든 허드렛일을 직접하지 않아도 된다. 그 대신 깔끔하게 정리된 가정에서 영양가 높은 음식, 깨끗한 옷, 안정감과 목표 의식, 아이들, 엘리베이터의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상사와 무리없이 나눌 수 있는 대와 주제 등을 모조리 얻는다. 그동안 합의를 통해 밥벌이에 나설 필요가 없어진 아내들은 아이들을 키우면서 학예회과 오늘밤인지 다음 주인지 알아두고, 우유가 떨어지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등 무급 노동에 능숙해진다. 

전통적인 생계부양자와 전업주부 모델을 옹호하는 이들은 유급 노동과 무급 노동을 각각 한 사람이 전담하는게 경제적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교환 협상’이라는 시스템으로, 한 사람(보통 남편)이 돈을 벌어 다른 한 사람을 부양하면 그 다른 한 사람(보통 아내)이 욕실 타일의 곰팡이나 부활절 모자 퍼레이드와 그 외 나머지 모든 일을 책임지는 것이다. (...) 전통적인 가족 구조에서 남자는 돈벌이에다가 추가로 잔디깎기, 또 추가로 이런저런 벌레 죽이기를 맡고 있다. 이 시간들을 모두 합해보면 여자가 요리, 청소, 육아에 들이는 시간과 거의 비슷할 것이다. 


6

나는 깨끗이 한다고 했다, 분명 


“가정 안에서 누가 무슨 일을 맡아야 한다는 식의 관습적인 행동 패턴은 남녀 모두를 괴롭힌다. 당연하게 그 일을 해야 한다고 정해진 사람만 괴로운 게 아니다. 남녀 모두에게 정해진 행동방식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일반적으로 여성이 집안일과 육아에 궁극적인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 여자들이 집안일에 압박을 받을 수 밖에 없는 현실적인 이유가 하나 있다. 집안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대부분 여자 잘못으로 몰아가기 때문이다. 아이가 보살핌을 제대로 못 받거나 집이 더러우면, 부주의하다면서 여성을 맹비난한다. 여성과 남성이 청결에 대해 서로 다른 기준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이유다. 남녀의 득실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남자의 경우 바닥의 청결도는 순전히 개인적인 편의와 실용성의 문제이다. 하지만 여자의 경우에는 남자와 미묘한 차이가 있다. 더러운 집을 보면 사람들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를 탓한다. 여자들은 이런 사회적인 인식에 본능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청결의 기준을 공동체가 정핸 대로 하거나, 아니면 믿을 수 없을 만큼 깨끗한 윗동네 친구 집을 기준으로 삼아 인위적으로 높인다. (...)한편 육아가 궁극적으로 엄마의 몫이라는 인식은 여자의 모든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잘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종종 군소리 없이 받아들인다.” 



+++ 본문 내 아내를 구하는 구직정보 


생기 넘치지만 종종 정신없기도 한 환경에서 활달한 소규모 팀을 이끌 분을 찾습니다. 팀원들이 가끔 갑자기 이랬다저랬다 변덕을 부리고 사회적 기술이 변칙적이며, 일부로 옹졸하게 굴고 대놓고 반항을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지원자는 어른스럽고 참을성이 뛰어나야만 합니다. 

또한 청소, 세탁, 학습지도, 가벼운 유지 보수에서 어려운 유지 보수까지, 온갖 조달업무, 안전과 보건, 작업 치료, 영양, 도덕적 지침과 상담, 교통 편의 제공, 기술 교육, 팀내 인적 자원 관리, 아웃소싱, 멘토링, 중재, 교육과 위생을 책임져야 합니다. 

탁월한 운동조절 능력과 침착한 성격이 필수조건입니다. 창의적인 경험과 실제 사용 가능한 획기적인 방법, 예를 들면 특히 뭔가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으면 좋습니다. 왜냐하면 기초적인 가정용품으로 10분 안에 그럴듯한 배트맨 의상을 만들어야 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혁명하는 여자들. 조안나 러스 외. 신혜경 역. 아작. 2016.

혁명하는 여자들. 조안나 러스 외.  신혜경 역. 아작. 2016. 


+단편선집 

sf소설선집. 페미니한 작품들이 몰려있다. 15편이 실려있는데, 그 중에 관심이 갔던 작품은 <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와 <가슴 이야기>를 흥미롭게 읽었음. 


++가슴 이야기_ 히로미 고토 

"전혀 제기되지 않은 질문들이 어저면 가장 중요한 질문들 일 것이다."(203)으로 시작하는 히로미 고토의 <가슴 이야기>는 작품 전반에 모유수유에 어려움을 겪는 주인공이 간호사, 남편, 시어머니와의 관계망 속에서 단순했던 수유의 어려움이, 모성의 어려움으로, 여성의 어려움으로, 점차 확전해나가는 줄거리다. 

출산 직후 모유수유를 하는 주인공에게 남편은 "뭐가 좀 나와?"하면서 느낌을 잘 모르겠다는 주인공을 두고 "무슨 말이야? 알 수 없다니? 네 몸이잖아, 아니야? 내 말은, 넌 분명 뭔가 느낄 수 있을꺼야."라며 압박을 가한다. 이에 간호사는 병실에 들어와 "아기를 혼자 두지" 말라며 "누구라도 그냥 쓱 들어와서 아기를 데려갈 수 있어요."라며 "12시간의 진통을 겪었고 28시간째 자지 못"하고 있는 주인공에게 말한다. 주인공은 간호사의 "그 말이 얼마나 부적절한 말인지 간호사에게 지적해줄 힘이 없"을 정도로 지쳐있다. 병원으로 시어머니가 방문해서는 "네 젖꼭지가 너무 잡작한 데다 아기가 그다지 잘 빨지를 못하네"라며 타박한다. 이제 막 출산을 마친 주인공은 "분노의 눈물이 차오른다."(204-206)

병원에서 집으로 온 주인공은 시리얼과 에너지바를 먹고 "다시 모유 수유를 시도한다. 고통은 날것이고 신선하다." 아기가 젖을 너무 빨아서 젖꼭지가 헐었다. 피가 나온다. 주인공은 걱정이 되어 친구에게 전화한다. 친구는 답해준다. "젖꼭지에 피가 맺힌 물집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 난관을 뚫고 모유 수유를 고수했다"며 떠들어댄다. 주인공은 친구의 그 "비극적인 젖꼭지 이야기를 이길 수 없다. 심지어 근처에도 못간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남편은 모유수유의 어려움을 겪는 주인공에게 "여자들은 여자들이 있었던 이래로 내내 모유 수유를 해왔어."라며 밀어붙인다. 남편은 "모유 먹는 아기들의 아빠를 위한 소책자"를 읽지도 않은채 모유수유가 인류의 여성들이 존재해왔던 이래로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쯤되면 제 정신으로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207-211) 

"대체 이 고통이 얼마나 오래갈 건지, 당신은 스스로 묻는다. 젖꼭지 고문과 모성 지옥을 겪은지 11일 째 되는 날" 주인공의 수유의 고통은 점점 더해져간다. "개처럼 누워서 아기에게 젖을 먹여보려"고 시도할 정도다. 헐어버린 젖꼭지를 바라보며 "난 그만 둘거야, 정말로. 내가 이 짓을 계속하다간 아기를 미워하게 될 것 같아."라고 항변한다. 이런 주인공에게 남편은 "아기한테는 모유 수유가 제일 좋은데, 넌 포기하겠다고, 그렇게 쉽게 말이야. 난 네가 더 강한 줄 알았어."라고 남편은 반격한다. (212-214) 

"잘 들어. 애한테 젖을 물려야 하는 사람은 나야. 당신이 코를 골며 자빠져 자는 동안 두 시간마다 일어나 젖꼭지가 찢어지고 피가 날 때까지 빨리는 건 나라고. 당신은 그 빌어먹을 도와주는 시늉이랍시고 저 썩을 기저귀 한 번 갈아주러 밤 중에 일어난 적 조차 없는데, 그래 내가 내 가슴을 뭘해야 하는지 나한테 말해 보시지 그래.(...) 그러니 그냥 입 닥치지그래. 그냥 입 닥쳐. 이 일은 너랑 상관이 없으니까 말이야. 이건 내 문제야!" (214-215) 

남편은 반격한다. "내가 젖을 먹일 수 있다면, 난 기꺼이 먹일거야!" 소설은 여기서 부터 결말을 준비한다. 주인공은 자신의 '젖'가슴을 오려 남편의 "거의 편평하고 작은 젖꼭지 위에 놓는다." 그리고 남편은 일어난다. 그는 일어나 앉아 "두 개의 비대해진 가슴을 내려다" 보며 "아 세상에"라고 신음한다. 주인공은 말한다. "걱정하지마. 다 괜찮아. 그냥 자연스럽게 닥치는 일을 하면 돼."라고 말하고 주인공은 "웃음을 짓는다. 어둑한 빛 속에서 얼굴을 빛낸다. 나는 등을 돌리고 누워 달콤하고 편안하게 잠든다." (215-217) 


++_1 

출산직후 산모는 쇼크상태다. 육체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극도의 긴장상태 이후에 절대적인 안정과 보살핌을 필요로 한다. 그런 산모는 출산을 하자마자 부터 "모성"이라는 이름이 거느리고 있는 희생과 인내를 감수해야 한다. 주인공을 둘러싼 남편의 말들이 그렇다.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나의 고통은, 참아야 하는 것. 견뎌야 하는 것으로 취급당한다. 이것은 "모성"이라는 것이 남성중심의 이데올로기속에서 여성을 어떻게 착취하고, 폭력에 노출시키고 있는지를 잘 확인 할 수 있다. 


++_2 

소설의 마지막에서 젖가슴을 남편에게 이식시켰을 때, 남편의 반응은 자신의 성기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젖가슴과 남근이 결합되는 이런 기이한 장면은 남근-남성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다. 이제, 남근-남성은 어떻게 되는가. 이 낯설과 이질적인 것과의 결합(실재와의 조우)은 남근-남성의 국면은 완전히 전환시켜 자신의 자리를 "모성"의 이데올로기 아래로 노출된다. 


++_3 

모유수유는 좋다. 아기에게 좋다. 이것이 남성중심의 가족 내에서 아기를 전적으로 돌보도록 "주부화"된 여성에게도 좋은가? 




질문 있습니다. 김현. 서랍의날씨. 2018.

질문 있습니다. 김현. 서랍의날씨. 2018. 


+어디서 보고 배웠겠습니까

<질문 있습니다>라는 글의 전문을 읽어보고 싶었는데, 계간지를 쉽게 구해서 읽을 수가 없었는데, 마침 단행본이 나왔다. 시인의 첫 작품집 <글로리홀>을 퇴근하는 버스 안에서 탐독하면서 도대체 이런 작품을 쓰는 사람은 누구일까, 어떤 삶의 서사를 가진 사람일까, 이 시인은 어디에서 세계를 조망하고 있는걸까. 궁금했었는데, 그의 산문집 <질문 있습니다>를 읽고 난 뒤, 난, 그를, 더 신뢰하게 되었다. 가령  자신이 "미쓰김"(12)이라고 불리며 수많은 남성-새끼들로 부터 "따먹히던"(13) 시절을 복기하며 "어디서 보고 배웠겠습니까"(13)를 반복하는 글의 구성은, 글쓰는 사람(작가)에 대한 신뢰가 마구마구 쌓였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군대, 그리고 문단에 널리고 널린 "씨발 새끼"(15)들은 1,2,3,4,5,6으로 이어지고 "1-1, 2-3, 3-5, 4-7, 5-9"(17)로 반복되면서 그야말로 "씨발 새끼"들의 "집"을 만들어냈다. 생각한 것 만큼 글이 길지 않은 글인데, 생각한 것 보다 더 여운이 남는 글이다. 


++선언하는 약력과 윤리로서의 약력 

"성폭력 해시태그 증언 운동을 어떤 방식으로든 기억하고 싶은 심정에서" 작가는 "페미라이터"(137)라는 이름을 쓴다고 한다. 작가는 이 "페미라이터"라는 이름을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임과 동시에 "행동/실천 양식"과 "권력을 질문하는 방법"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작가는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지면에서' 발견되는 페미라이터라는 말에 끊임없이 주눅 들길 바라며,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페미라이터라는 말 때문에 계속해서 지지받는 느낌을 받길 바란"(138)다고 한다. 작가는 "작품과 작가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한다고 하면서 "작품의 윤리는 작품이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는 "나는 작가의 윤리에 관심이 있다."(139)고 고백한다. 페미라이터라는 이름을 굳이, 고집하는 작가에게 "어디까지 갈래?"(143)라는 질문을 받는다고 한다. 사실, 위협을 느낀 쪽에서 보이는 흔한 반응 중 하나다. 어디까지 해야 성에 차겠어?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그만하고 글을 열심히 쓰라"(145)는 말을 자주 듣는다는 작가는 대답한다. 송구스럽다. 그러나 밝히고 싶다."고 대답한다. 정말 열심히 글을 쓴다는 작가는 자신의 페미라이터라는 약력을 두고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떳떳하게 밝혀 알리는 것" 그것이 약력이라고 말한다. 그 "약력에 작가의 윤리가 있다." 이 작가 읽으면 읽을 수록 신뢰가 마구마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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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스젠터 헤테로 cisgender (페미위키)






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 최승범. 생각의 힘. 2018.

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 최승범. 생각의 힘. 2018. 


<쪽글> 


1) 우리 때는 말야. 다들 그랬어. 더한 집도 많아. 
우리 때는 그런 거 없이도 애들 잘만 키웠는데 요즘 것들은 유난을 떤다고 나무란다. 그분들께 여쭤보고 싶다. 그래서 장성한 자식들과 사이가 좋으시냐고.(23). 여기서 '우리 때'라고 하는 것을 기준으로 '너희 때'를 평가한다. 우리 때에는 "월급봉투만 잘 가져다 주면 무슨 짓을 해도 좋은 남편 소리를 듣던 때"(23)이고 "퇴근한 아버지는 하루 종일 청소도 안하고 집에서 뭘 했느냐며 어머니께 화를 내"(23)도 별 이상할 것이 없던 때 였다. 그 때에 우리시대의 어머니들은 하나같이 "우리 집의 시시포스"(27)였다. 


2) 남성에게 묻지 않고 여성에게만 묻는 것
"무심코 아이는 지금 누가 봐주는지를 물은 것이다. 아차, 실수했다 싶었다. 여태껏 숱한 남성들을 늦은 밤에 만나왔지만 그들에게는 한번도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없다."(28) 

"일하려고 야근하면 '독한 년'이 되고 애가 아파 조퇴하면 '민폐녀'가 된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도 가는 길은 선악과를 떠올리게 하는 원죄의 시간이다. 맞벌이 부부지만 육아와 가사는 독박이 기본 값이다."(85)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며 아내에게 육아를 떠넘기지만, 직장에서 여자 동료가 육아휴직을 내면 이기적이라고 비난하는 남자들 여럿 봤다. 우리 집 청소, 빨래, 설거지는 아내가 다 해야 하지만 우리 부서 여직원의 퇴근이 빠른 건 기분 나쁘다는 남자들 많이 봤다. 학교에 여교사가 많아 남자아이들의 '올바른' 성역할 학습이 우려되지만, 집에서 엄마만 아이를 돌보는 건 남자아이 교육과 아무상관없다는 남자들 엄청봤다."(88)


3) 자상한 아빠가 되는 건 쉽다
"나쁜 아빠 되는 건 정말 어렵다. 애가 울거나 말거나 귀 막고 잠을 자도, 젖병 소독이며 목욕 한 번 안시켜도, 유모차 끌고 동네 한 바퀴만 돌면 금세 자상한 아빠로 소문난다. 백 가지 중 하나만 잘못해도 나쁜 엄마가 되는데, 백가지 중 하나만 잘해도 좋은 아빠가 되는 사회는 정상이 아니다."(33) 

+

"딸은 늙은 부모를 봉양하는 간병인쯤이었다. 최근에 딸을 선호하는 부부가 더 많다며 인식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비행기 태워주는 것은 딸이다' ' 늙어 부모 보살피는 건 딸뿐이다'라는 말처럼 봉양과 대접을 기대하고 달을 낳으려는 심리는 수천 년간 이어져온 여성 착취의 역사와 맥을 같이한다."(81)

"저항의 분위기는 오래전부터 물씬물씬 피어나고 있었다. 되바라진 여성들이 분란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 달라진 세상에 남성들이 적응하지 못하는 게 문제다."(138) 

"남자를 페미니스트로 만드는 첫 번째 지점은 엄마의 인생에 죄책감을 느끼는 데 있다고 믿으므로. 단, 그게 아내를 착취하는 '대리효과'의 방식으로 이어지지만 않는다면."(154)



<개념들> 

-호모소셜homosocial (페미위키)


<리뷰> 

1)남성과 남자
남자는 남성으로 존재하는 자. 남성-남근의 존재자를 남자라고 불러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듦. 하이데거는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짓는데, "존재(sein)"는 자신을 드러낼 특정한 장소를 발견하고 그곳에서 실현되어 특정한 형태를 갖는 것을 "존재자seiendes"라고 불렀다. 존재자는 항상 '거기da'라는 특정한 장소와 특정한 방식으로 현존재(dasein)한다. 현존재는 세계라는 공간과 시간에 의해 그 형태를 얻으면서 '세계-내-존재"로 자리한다. 성으로서의 남성이 자신을 드러낼 특정한 장소를 발견하고 그곳에서 남성을 실현하며 특정한 형태를 갖추면서 "남-자"로 자리하게 되는 것으로 구분해서 볼 수 있을까. 따라서, 성gender으로서의 남성이 특정한 방식으로 형태화되고, 장소를 가짐으로 인해서 '세계-내-남자'로 자리잡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책의 형식
한 가족의 내력과 한 개인의 구술사를 기본축으로 하여 삶의 서사 속에서 만난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 전개. 저자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읽다보면 흥미롭고, 신나게 읽힘. 1부,2부, 3부는 동일한 형식을 지닌다. 저자의 가족과 자신의 삶의 서사 속에서 발견(?)된 가부장-괴물/남자-괴물/ 혐오-괴물에 대한 묘사, 설명, 예시들로 나열된다. 개인의 서사를 정치적/사회적 맥락안에서 풀어내기 위한 형식을 갖춘다. 이러한 구성형식은 일상/삶의 촘촘한 폭력네트워크를 드러내기에 (전형적으로) 적합해보인다. 4부, 5부는 저자가 일하고 있는 교실-내-운동을 드러내는데, 1,2,3부와는 다소 다른 형식을 취하는데, 잘 모르겠다고, 리뷰는 남겨두자. 



3)무엇을 할 것인가?
남고에서 페미니즘을 가르친다는 저자. 수업을 통해 "은근히" 이루어진다는 페미니한 접근을 넘어선 다음 과제에 대해서 독자들에게 남겨주었다면, 여운이 생겼을 듯. 마르크스의 문장을 패러디하기까지 하면서 "페미니스트가 되자"라고 말하는 저자의 목소리가 책의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볼륨이 확 낮아진듯 도 한데... 어디까지 우리는 가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질문 할 때, "충분함"이야 말로 그 기준이 되어 줄 텐데, 저자는 얼마나 충분한가?, 라고 묻게 되기도 한다. 


4)남성-페미니스트 
남성으로서 페미니즘을 말하기 굉장히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 남성-페미니스트임을 선언하는 순간 '자기와의 긴장'관계를 지속시키는 것이 정말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 우리 사회의 제도적 무의식 아래서 길러진 남성이 페미니스트의 자리에서 삶을 꾸린다는 것은 거의 "목숨을 건 도약(헤겔)"에 가까울 정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 그러나 "불가능 속의 가능성(바디우)"을 구현하는 것이 혁명의 과정인지라, 저자의 도약에 박수와 갈채를 보내고 싶다는. 또, 나에게 돌아오는 질문. 나는 충분한가?. 



<관련자료링크> 

-강남 살인사건이 '여성혐오 범죄'인 이유 (한겨례)

-나도 메갈리안이다 (매일신문)




Saint-Just <13 Nov 1792>

  • POETRY-PUNX
  • 2014. 12. 1. 14:47

Viefville des Essars, On the Emancipation of the Negroes(1790)

  • POETRY-PUNX
  • 2014. 11. 24. 19:47
빛보다빠르게미래로달아나라 -이상,삼차각설계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