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가뭄(5장~끝). 애너벨 크랩. 황금진 역. 황금가지. 2016

아내 가뭄. 애너벨 크랩. 황금진 역. 황금가지. 2016




5장-9장 



1

훈훈한 아빠의 순간 


“남자의 경우 주방에서 보이는 무능력은 100퍼센트 면제 받는다. (...) 주방에서 남성의 무능력은 거의 권장사항이다. 여기서 침착하게 추론해보면 문제의 그 남성에게는 부엌일 말고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 여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반해서 “주방에서 여성의 무능력은 모자람이고 어딘가 인간성이 부족하다는 암시다.” 

“훈훈한 아빠의 순간은 우리를 현혹”시키는데 그것은 “남성들의 무능함을 사랑스럽게 포장하고 찬양”하기 일쑤다. “이런 짓궂은 사람 같으니!”라는 정도의 탄성을 자아낼 뿐이다. 훈훈한 아빠의 순간은 어떤 일을 ‘악’ 소리 나게 못해도 괜찮다. 사실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좋은 일이다. 이런 순간들을 숱하게 주변에서 일어난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아빠가 육아하는 장면들이 엔터테이먼트로 등장하게 되는 것 역시, 훈훈한 아빠들은 육아에 서툴러도 지적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집안일을 하려다 실패한 남자의 이야기가 여전히 웃음을 자아낸다는 사실은 집안일을 여성이 능력을 발휘할 영역으로 굳게 믿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빠의 능력 부족은 웃음의 주요 원천”이다. 

“리베카 마이젠바흐는 2009년 발표한 논문 <여성 생계부양자>에서 남편보다 소득이 높은 여성은 ‘비전통적인 방식’으로 가사 문제를 해결하고 있으면서도 강력한 여성성을 드러내기 위해 남편의 무능을 과장할 수도 있다는 이론을 조심스럽게 내놓았다. (,,,) 여성 생계부양자들 대다수가 집안일을 자신들이 계속 관리, 감독한다고 밝혔다. 이 여성들이 집안일을 자신이 직접 하거나 남편에게 할 일을 지시했다 그리고 남편에게 허드렛일을 시킨 경우에조차 남편이 그 일을 제대로 못했다며 여전히 불평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혹은 남자들이 얼마나 깔끔하지 못한지, 할 일이 있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하는지 등 전반적으로 지적할 권리도 가지고 있었다. 마이젠바흐는 이렇게 썼다. 남자들에게 특정한 집안일을 하라고 어떻게 명령 혹은 부탁해야 할지를 강조한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이들 여성 생계부양자들은 집 안과 아이들을 단속하는 존재로서 아내의 젠더 경계에서 자리신들을 끼워맞춘다. 마이젠바흐의 연구에서 주목할 부분은 여성들이 젠더로서 말할 수 있는 자리에 머물려고 한다는 것이다. 젠더로서 말하는 자리는 사실상 이미 정해져 있는 사회적 역할에 계속해서 머무르게 하면서 가사노동에 대한 책임을 지우는 제도적 무의식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세상이 그렇다. 남자에게 집안일에 무능하다고 하는 것은 괜찮다.” 그러나 여성이 집안일에 무능하다고 했을 때에는 비난이 따른다. “여성이 집안일을 못한다며 남성을 흉을 봐도 되는 다른 이유는 가사 영역이 규제가 거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가정 영역의 외부에는 성차별법이 발효되어 있고 사회적으로 합의되어있는 영역과 규제가 있다. 그러나 가정에서는 다르다. “남자란 족속은 더러운 빨랫감을 방치한다거나 치약 뚜껑을 안 닫는다거나 아이들 등교 준비를 못 시킨다며 끝도 없이 불평을 늘어 놓을 수 있다.” 

저자는 몇일간 집을 비우게 되어서 “축구 팀원이 먹이고도 남을 만큼의 볶음밥을 만들어” 놓고 집을 떠났는데, 이는 “남편을 샌드위치도 못 만드는 팔푼이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깔고” 있는 것이며, “권력을 쥐려는 마이젠바흐식 숨은 노력”때문이며, 엄마의 “부재가 곧 비상사태라는 그럴듯한 환상을 심어주려는 의도”에서 였다고 밝힌다. 끝에가서 저자는 결국 “모든 것은 나의 터무니없는 망상”이었다고 밝힌다. “엄마의 순간은 이런 식이 되기 쉽다. 과부하가 걸려 있어 언제 툭하고 끊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순간” 속으로 자신을 밀어넣는 것이다. 

“여성들은 일터와 집 양쪽 모두에서 흠잡을 데 없이 유능한 모습을 보여주려 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직장과 가정에서 하는 역할이 서로 영향을 주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구분 짓는 전략을 쓴다. (...) 하지만 이런 전략으로 얻는 것은 무엇일까? 대개는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있는지 자신 외에는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닫는 일이다. 그래서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사생활 영역에서 혼자 미쳐가는 특권만 누릴 뿐이다.” 이와 동시에 육아는 역시 “여자들이 더 잘한다”며 남성들의 무능을 전시하며 깔깔거린다. 



2

여자가 아기를 더 잘 돌본다는 환상 


“어떻게 여자가 아기를 더 잘 돌본다는 무언의 전제가 생겨났을까? (...) 육아 전문가도 나머지 다른 분야의 전문가와 다를 게 없다. 하다 보면 느는 것이다. 부모 중 한쪽에게 능력치를 쌓을 기회가 주어지면 그 쪽은 더 일찍 전문가가 된다.” 이러한 전통적인 접근법은 “오직 자신만이, 진심으로 이런 감정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게 아이가 생기면 보이는 가장 흔한 반응이다.” 남성들을 시작할 때부터 육아에서 배제되어 있다. “어머니에게 내가 더 잘한다는 생각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줄 것이다. 그런 생각이 없으면 여자는 실존적 두려움과 희열이 뒤섞인 호르몬의 바다에서 허우적댈지도 모른다.” 

노르웨이는 “1993년 남성 육아휴직 의무화를 도입”하였다. “1977년부터 유급 육아휴직제도가 있었다.(..) 오늘날 노르웨이의 아버지들 90퍼센트가 육아휴직을 쓰고 있다. (...)노르웨이 상황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선택권이 보장되고 장려책과 초보 부모일 때부터 육아에 참여할 기회만 주어지면, 남녀 모두 육아를 잘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물로 노르웨이가 갖추고 있는 완벽한 보육 시실도 도움이 되기는 했다. (...) 육아휴직의 발전이 스칸디나비아 모델보다 훨씬 더딘 오스트레일리아에도 아버지가 부모기 초기 단계에 휴직을 하면 장기적으로 볼 때 더욱 적극적인 부모가 된다는 증거가 있다. 자녀를 출산 할 즈음에 열흘 혹은 그 이상 휴가를 낸 오스트레일리아의 아버지들은 아기가 유아가 되었을 때 육아 관련 활동에 더욱 자주 참여했다. (...) 유급 육아휴직은 복지 수단이 아니라 다른 제도와 같은 고용 보장”이다. “상황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보면 어떨까? 유급 육아휴직을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육아 전문가가 될 기회를 동시에 주는 거라고 본다면? 우리 사회는 아버지들에게 육아에 젬병이 되도록 허용할 뿐만 아니라 젬병일 거라고 기대한다. 젬병이 되라고 권장한다. 그래서 막상 젬병이 아닌 아버지를 보면 매번 놀란다.” 


3

가사노동의 가치 

“보모, 요리사, 가정부, 영양사, 식품구매사, 접시 닦이, 세탁부, 재봉사, 간호조무사, 정비사, 정원사, 운전기사 등 가정주부가 하는 일”은 무수하다. 이러한 아내의 가사노동의 가치를 결정하기 위해 “대체모델”과 “기회비용모델”로 가사노동의 가치를 결정하려고 하였으나 이 둘 모두 노동의 질을 평가하는데 유효하지 않다. 그래서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아내의 노동가치는 남편의 노동 가치와 직결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내의 존재 자체가 남편을 이런저런 일에서 어느 정도 해방시켜 밖에서도 돈 버는 일에 전념하게 해주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며 “여자의 노동가치는 남자의 노동가치와 직결된다”고 한다. 



4

세상에 정말 운이 좋네요 


남편이 아내 역할을 맡게 되었을 때 여성이 흔히 듣는 말은 “세상에 정말 운이 좋네요”이다. 사람들은 남편을 두고 “무슨 여신이 아닌 남신이라도 된 것” 마냥 추켜세워준다. 

이와는 정반대로 아내 역할을 하는 남편을 사회적 패자라고 여기기도 한다. “바깥일을 하기 보다 집에 아이들을 돌보는 남자들은 굉장히 이상한 시선을 받는다. 그런 남자들은 찬바람 이는 소외를 당하거나 입김 뜨거운 과찬을 경험하며, 그 중간은 거의 없는 양극단의 지대에서 살아간다. (...)집에서 애보는 아빠라고 답하는 남자는 두 가지의 광범위한 반응을 접하게 된다. 첫째, 다른 남자들로부터 미심쩍은 눈초리 또는 심한 경우 경멸까지 당할 수 있다. 둘째, 그 자리에 참석한 여자들로부터 죽을 때까지 키스를 당할 위험천만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집에서 애를 보는 아빠들은 우선 “정말 훌륭한 아빠”라는 반응에 시달린다. “남자가 육아를 위해 잠깐 쉬는 걸 섹시하다고 생각하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확인 할 수 있다. 이러한 여성들의 벅찬 애정 가운데 애보는 남자들은 “남자들한테는 왕따”를 당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아내가 자기보다 저를 더 나은 아버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자들은 그런 남자를 두고 “당신 왕재수야, 당신 때문에 스트레스만 늘었다고”라며 불평한다. 

다음으로 “어떻게 된거예요? 취직이 안돼요? 직장에 오래 못 붙어 있어요?”같은 질문에 마주해야 한다. 애보는 남자들을 “얼치기라고 생각합니다. 좀 부족한 남자로 여기는 거죠. 직장에서 잘리고 다시 취직을 못한 남자라는 겁니다. 능력이 없으니 훨씬 안일한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죠. (...) 집에 있는 남자들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사람들이 무심코 저지르는 무의식적 차별일 뿐이다. 그러한 생각은 사람들의 뇌리에 아주 깊이 각인되어” 있다. 

“여기서 뭐하세요?”라는 무언의 질문을 시선을 통해서 전달받기도 한다. 특히 엄마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그렇다. 아이와 엄마들만의 공간을 침범받는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집안일을 하는 남자는 패자인가, 승자인가?” 이러한 아찍한 양극단 사이에 갇힌 아버지는 자신이 실제로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올바르게 파악할 수가 없다. “오스트레일리아의 강력한 남성 생계부양자 문화가 지닌 힘은 거세고 사납기까지 하다. 여성이 한 가정의 주요한 생계부양자 노릇을 하거나 아버지가 집에서 아이들을 보는 게 불가능하지도, 불법이지도 않아. 또한 아무 쓸모가 없는 것도 아니다. 다만 사회에 퍼져 있는 정형화된 형태의 중력이 너무 센 것 뿐이다. 

*

“전업주부 아빠들이 사회에서 추방당한 것처럼 보이고 또 그렇게 느낄겁니다. 전업주부 아빠들은 사회 연결망이 하나도 없어요. 플레이 그룹에서 시작해야 하는데, 전업주부 아빠들한테는 그게 없죠. 그리고 일하는 남자들은 일하지 않는 남자들에게 손을 내밀지 않습니다.”





5

여성들의 눈치보기 


여성들은 남편이 가사를 전담할 때에도 눈치를 본다. “가사와 육아를 남자가 할 일이 아니라고보는 가정이 많은 듯 하다. 남자는 아버지로서 양육을 주도할 뿐 남자로서 청소나 그 밖의 집안일에는 관연하지 않았다.” 특히, “성역할이 바뀔 때, 육아와 관련해서는 남편이 일을 맡을 수 있지만, ‘아내’가 해야할 일의 범위에 드는 그 박의 다른 일은 너무 무리한 요구라는 거죠. 아니면 남자들 스스로 그런 일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남성 ‘아내들’이 여성 아내들과 똑가은 식으로 일을 하지 않으면, 여성 생계부양자들도 남성 생계부양자들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 여성들은 특히 “남편의 민감한 부분을 가려주려고 의식적인 방어책”을 쓴다. 이것은 전 세계적인 분위기이기도 하다. “방글라데시의 남편들은 일하는 아내가 자신들을 바람난 아내의 남편으로 만들까 봐 걱정했다. 인도의 중산층 일부는 일하는 아내가 남편의 특권에 치명타를 입혔다고 보았다. 칠레의 남성들은 아내가 ‘여성 우월주의자’ 혹은 남성화 될까과, 그래서 친구들이 자신을 못난 남자라고 생각할까봐 걱정했다. 케냐의 남편들은 아내가 일을 하면 가장의 권위가 위협받을까 봐 걱정했다.” 그래서 “가사노동은 협상카드”로 주로 쓰인다. 


6

남성생계부양자 모델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을 그렇게 오래된 것이 아니다. 가족이 부모 중 한 쪽만을 유급노동에 내볼 수 있다는 생각은 아주 오래된 모델이 아니다.(...)그것은 산업혁명 이후”에 벌어졌다. 산업혁명 이후 장인들이 손으로 만들던 상품은 공장에서 대량생산하기 시작했고, 폭발적인 경제 성장을 촉발했다. 이런 경제 성장을 발판삼아 중산층이 등장했다. 20세기 중반 즘 대부분의 가정이 단독 생계부양자의 수입만으로도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 “표준 근무일에 매일 공장이나 사무실로 출근하는 남자들로 구성된 질서정연하고 일사불란한 노동 인력을 갖춘 선진 세계는 이상적인 남자란 어떤 남자인지에 대해 지배적이고 손쉬운 판단 기준 또한 확립했다. (...) 자녀가 있는 남자를 더 우수한 직원으로 여기며, 정규직 직장이 있으면 더 좋은 아버지 일거라고 아주 당연하게 믿어버린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남성들에게 강력한 동기 부여가 되어주었다. (...)노동과 생산의 본질이 바뀌면서 뒤이어 일어난 어마어마한 구조적 변화로 남자들이 가정에서 제거되었고, 그것이 거대한 패턴으로 굳어졌다(...산업혁명은...) 인간이 자신과 자신의 역할을 규정”했다. 

이후 “여성에게 지난 반세기는 어마어마한 변화의 시기였다. 학력상승, 핵가족화, 제조업의 쇠토, 서비스 경제의 부상, 이러한 발전이 이루어지는 동안 엿어들은 일을 떠맡고 완수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품고 있던 여러 가지 기대들이 극적으로 바뀌었다. 여성의 유급 노동은 확대되었다. 그러나 어머니에 대한 기대 또한 확대되었다.” 

쿤츠는 어떤 의미에서 “남자들은 30년 전의 여성들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말했다 (...) 50년전, 여자들은 여기아 네게 있어야 할 곳이다. 여기서 벗어나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많은 여자들이 엿어다운 것에 대한 구시대적 발상을 벗어던져도 좋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남자들도 남성다움에 대한 종래의 견해를 뛰어넘는, 그 외 다른 보람 있는 것들도 있다는 사실을 점차 깨달아 가고 있다. (...)남자는 온화해야 하지만 기꺼이 쥐를 죽일 수도 있어야 한다. 이렇게 남자들은 어떻게든 가족을 보호하고 돈도 벌어야 한다는 구시대의 역할뿐만 아니라, 요즘 요구하는 새로운 역할까지 포함된 남성성의 표준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계속 듣고 있다. 여러 가지 모순되는 기대들에 시달리는 것은 당연히 불편할 수 밖에 없다. 최근 아버지들에게 가해지고 있는 스테레스와 중앙감(자녀에게 좀 더 자주 얼굴을 보이면서 동시에 직장에서도 존재감을 주어야 한다는 기대)은 시대에 뒤떨어진 남성 버전의 두 마리 토끼 질문이다. 

어쩌면 이제 남자들이 달려져야 할 차례일지도 모른다. (...) 삶의 짜임새를 바꾸고 성공이란 무엇이며, 좋은 아버지란 무엇인지, 좋은 노동자가 되는 것은 무엇인지 등을 가늠하게 하는 새로운 방식을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평범한 남자가 행동을 바꾸려면 대개는 외부적 사건이 필요하다(...)  우리는 일터에서 벌어지느 일과 가정에서 벌어지는 일이 완전히 다른 영역인 것처럼 군다. 그래서 일터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만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토론하고 고민하는데, 그렇게 하면 우리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여성에게 적극적으로 나서라고 열심히 독려할 뿐, 남성에게 가끔 뒤로 빠져도 괜찮다는 확신을 주지 못했다. 이미 그렇게 하고 있는 남성들이 아마도 변화의 선봉장이 될 것이다. 지난 반세기를 돌아보면 여성은 환골탈태했지만 남성은 답보 상태였다. 이 시기는 모든 것이 서툴 수 밖에 없는 진화의 사춘기를 비추는 역사의 창으로 우리 기억 속에 남을 것이다.”    




빛보다빠르게미래로달아나라 -이상,삼차각설계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