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구 할아버지 커다란 손_ 윤제림

봉구 할아버지 커다란 손 

 

 

목수 일로 

우리나라 제일가던

봉구 할아버지는, 

먼 산 큰 절 

대웅전 처마를 고치시고는 

아주아주 하늘로 오르셨대요. 

 

나라 안에 꼽히시던 

그 솜씨 

하늘에서도 뽑히시어서, 

눈 다듬어 내리는 일 

맡으셨대요. 

 

뒷산 언덕에서 

나도 봤어요. 

아름다운 구름숲에서 

결 고운 나무로만 

먹줄 퉁퉁 일일이 금을 그어, 

똑 고르게 켜고 

꼭 알맞게 썰어 

부드러운 눈송이 지어 내리시는 

봉구 할아버지 커다란 손을. 

 

곱게 곱게 내려 쌓이는 

눈발 속엔 

봉구 할아버지 대팻날에 밀려나는 

구름나무 하이얀 속살이 보여요. 

 

저것 봐요, 저기 저 

봉구네 오동나무 가지 끝에서 

우리 집 지붕 언저리로 

하늘 땅 잇고 계시는 

봉구 할아버지 커다란 손을. 

 

봉구에게 물어보셔요. 

올겨울 하늘나라 창고엔 

얼마만큼의 눈송이가 

준비돼 있는지. 

 

 

<윤제림, 거북이는 오늘도 지각이다, 문학동네, 2018> 

 


#시적 인연 #인연의 시 #서사의 가능성

 

1

눈에 보이지 않는 ‘인연’이라는 것이 있다. 미세혈관처럼 모든 것이 보이지 않게 이어져있다는 불교의 연기설이 그렇고, 존재는 존재자의 우연에 의해 서로 기대어 존재한다는 랑시에르의 철학이 그렇다. 시에는 시적 인연이라는 것이 있다. 인연은 그 자체로 의미를 획득하지 못하고 오직 “사건 관계”(들뢰즈)를 통해서 의미를 확정하기에 시적 인연은 합리적 인과율이 지워져있는 신화, 몽상, 꿈을 근거로 하는 경우가 많다. 오직, 시만이 할 수 있는 인연의 영역이 있다.

 2 

윤제림의 시집 속에는 시적 인연을 맺어주고 있는 시편들이 있다. 「우리는 언제커서」 의 “작은 돌멩이”들과 “돌부처들”의 시적 인연을 이어주고, 「섬」의 “금강산 봉우리”와 “어린 섬 하나”의 인연을 만들어준다. 「나팔꽃은 나팔을 불지 않는다」의 “붐붐붐 소리를 내며 피는 꽃”이었던 나팔꽃과 그 “나팔꽃을 사랑한 어떤 청년”과 인연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따로 있을 때에는 그저 “작은 돌멩이”이고, “섬 하나”이고, “나팔꽃”인 대상들이 시적 인연을 맺게 되면서 시적 혈액으로 펄떡인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대상에게 목소리를 주기도 하고(우리는 언제커서), 서사를 부여하기도 하고(섬), 사연을 만들어주기도 한다.(나팔꽃은 나팔을 불지 않는다) 시적 인연을 이어주고자 하는 시인의 시선에는 그냥 놔두면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이 있다. 그래서 시적 인연의 자장 속에서 화자를 돌보고 있는 것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 「봉구네 할아버지의 커다란 손」 이다. 

3

 「봉구네 할아버지의 커다란 손」의 1행과 2행은 시의 도입부에 해당한다. 우리나라 제일가는 목수인 봉구할아버지는 “아주아주 하늘로 오르”셨는데 “그 솜씨/ 하늘에서도 뽑히시어서,/ 눈 다듬어 내리는 일/ 맡으셨대요.”라며 시의 서사를 구축한다. 3행, 4행, 5행은 도입부의 서사를 발판 삼아 이미지를 구축한다. “아름다운 구름숲에서 결 고운 나무”를 “꼭 알맞게 썰어/ 부드러운 눈송이 지어 내리시는” 3행의 눈 이미지. “눈발 속엔/ 봉구 할아버지 대팻날에 밀려나는/ 구름나무 하이얀 속살이 보여요.” 4행의 구름나무 이미지. “하늘 땅 잇고 계시는 봉구 할아버지 커다란 손” 5행의 손 이미지. 이 세 가지 이미지들은 모두 “나도 봤어요(3행), ”속살이 보여요“(4연), ”저것 봐요“(5행)로 모두 시각이미지로 집중하면서 시의 밀도를 높인다. 이렇게 쌓여진 시각 이미지들은 마지막 6행에 가서 이 모든 시적 인연의 중심에 있는 “봉구에게 물어보셔요.”라며 봉구를 불러들인다. 1행과 2행에서 화자는 “오르셨대요”, “맡으셨대요” 라며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임을 드러내는데, 그 누군가가 바로 봉구다. 할아버지를 잃은 봉구. 할아버지를 그냥 떠날 보낼 수 없는 봉구. 영영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슬픔을 받아 안고 있는 봉구. 영영 사라지지 않을 시적인연(할아버지와 눈)을 간신히, 잇고 있는 봉구. 그런 봉구에게 물어보라는 것이다. “올겨울 하늘나라 창고엔/ 얼마만큼의 눈송이가/ 준비돼 있는지.” 봉구는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의 질량만큼 대답해 줄 것이다. 많이. 아주 많이. 

 

 

 

 

<윤제림, 거북이는 오늘도 지각이다, 문학동네, 2018> 

'문학-기계 > 아동문학-넓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8 올해의 동시선집_ 동시마중  (0) 2019.12.01
첫 만남_ 안진영  (0) 2019.12.01
돌사자상에 비가 오면_ 이안  (0) 2019.12.01
빛보다빠르게미래로달아나라 -이상,삼차각설계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