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 그 어둠의 짜세


2011. 4. 13
개구리 알을 뱗은 두꺼비의 심정

절망에 대한 생각이 절망이다.
봄날 살풀린 시냇가.
개구리 알이 고르르 눈알을 굴린다.
하얗게 자리잡은 두꺼비 개구리 알을 밟는다.
절망에 대한 생각은 절망을 불러일으킨다.
정확하게 절망에 대한 생각이 절망이다.
어미 개구리를 살핀다. 아비 개구리는 없다.
자, 두꺼비 다음 발을 떼지 않는다.
다음발을 때는 순간 몸의 무게가 실려
개구리 알이 터질지 모를 노릇이다.
두꺼비 단 한 번은 꿈벅임이 없다.
그 발바닥에 터진 올챙이 눈깔이 달려있을지
두꺼비 발바닥 온기에 온통 몽긍몽글해졌을지
오직 어미 개구리와 두꺼비만 안다
두꺼비 한참을 그 자리에 발 붙이고 서있다
절망을 불러일으키는 건 당신인가 나인가?

2012..4.5
사회학이라는 죄

사회학적 상상력에 영혼이 없다. 얼마전 읽은 베버의 글은 정확하게 그랬다. 어떤 여지 없이 몰아세우는 유지막심한 그 손가락질에 이제 사회학적 상상력을 믿지 않기로 한다. 그래도 이반 일리치가 있을 땐 이렇지 않았는데, 언어가 모욕스럽다. 영혼, 그 떨림없이 쓰는 글은 대부분 헛발질이고, 읽을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김현 선생은 이런 나를 두고 "천하의 바보노릇"하고 있다고 하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2013. 4. 9
문학은 주어지는가?

문제집 답안지를 펼친다
오답들을 쏟아낸다
답안지가 책 가장 끝에 있는건 부끄러워서다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아서 글자도 작은거다
그래서 진리의 세계가 허망한거다
도업을 이루고자 하는 그 허망한 스윙
자신을 버려야만 가능한 백스윙 앞에서 오히려
진리의 세계가 지혜의 세계로 건너온다
오답노트- 오답들의 108배, 여기서 지혜의
발바닥들이 문제들을 주욱주욱 그으며 치솟는다
문학은 그 뒤에 남는 하나의 상흔, 구멍일 뿐이다
그 구멍의 세계에서 가부좌트는 것,
무릎 파르르 떠는 것, 예술의 짜세


2014. 4.11
산책의 보폭

좋은 산문은 산책할 때의 걸음의 보폭을 지녔다.
산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산문을 잘 쓸 것임에 틀림없다.
그 리듬이 가져다 주는 문장은, 삶은 분명히
모든 것에 개입할 것임에 틀림없다.
패턴이 리듬을 만든다. 틀림없다.
오늘 이성복의 산문을 읽고나서
미쳤군, 미쳤어, 이런 미친 영감탱이

좋은 시는 산책의 보폭과는 다르다
그들은 땅을 계속 걷지 않는다
유령의 호흡, 부양하는 마이클 조단의 에어워크
땅에는 그림자 뿐이고 공중/허공/ 심연을
걷는/뛰는/춤추는/ 취한 걸음에 있다
그래서 미쳤군 미쳤어가 나오지 않는다
이미 미친 상태이기 때문이다.
좋은 시는 산책의 무위 그, 이후
그 다음, 그 너머에서 미치게 만든다
발화자와 독자가 동시에 미치게 만드는 맨발들
만선을 기원하는 무당들의 옷자락과 닮았다

2015. 4. 18
당신을 물어뜯고 싶다

핥고 빨고 쥐고 흔들어 놓고 싶다
그럴수록 난 더욱 구멍으로 말려들어간다
니체, 당신이 되고자 이리 애썼는데
어찌 단 한 번도 곁을 내어주지 않는겐가
간절한 열망, 습관적인 열망- 나는 무섭고
비겁하고 찌질해서 당신의 춤사위에 매번 눈감는 흙 아래의 짓, 짓, 짓
이제 확신 할 수 없다
당신을 만나고자 한 것인지
당신을 물고자 했던건지
에이씨 몰라 하고 오래된 농을 치고선
돌아서고 싶지만 돌아설 때 마다 당신은
허벅지 벌리고 나랑 한 번 하자고
나랑 한 판 붙자고 카톡한다, 카톡카톡
벌써 몇 년째 숫자1맨 바라보고 있다

2016.4.13
기도의 가능성

까만 닭, 까닭- 녹색당을 지지합니다. 이 단순한 말에 감동 받다니. 김종철 선생의 한겨례 칼럼을
읽고선 까닭도 없이 감동받다. 국가란 결국 합접적 폭력기구애 불과하다.
애궐복궐한 이유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대의 민주주의란 소수 엘리트들의 합법적 통치수단에 불과하다.
귀 기울일 만한 것이 전혀없다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선거는 이미 합법적인 불법이란 것이 여러 번 확인 되었고 이 불법의 파행은
여려 혁명들과 시민운동들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확인되었다.
별 수 없다는 말이 나오는건 어쩌면 정답. 불법적 생각, 어쩔 수 없음의 가장 강력한 알리바이.
믿음은 그래서 중요하다. 기도는 이제서야 중요해진다. 절망의 얼굴 앞에서만 기도는 가능하다. 기도하는 자세에서 시작되는 믿음으로 녹색당을 지지한다. 가능성은 언제나 기도에서 시작했기에.

포경수술을 할 때 어떤 독재릉 허용했다.
아버지라는 남성이라는 까닭없는 이미지에
다리를 벌렸다. 그 앞에서 지퍼를 내렸다.
가위질, 바느질을 하용했고
꼬추가 자지가 되던 날- 민주주의와 국가에 대해서 떠올렸다. 그리고 마취가 풀리고 아픔이
시작되었을 때 난 기도했다.
하느님 전 당신을 지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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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市民)들이 시 쓰는 시민(詩民)이 됐으면 좋겠다” 황현산/진은영/ 박수연 대담

“시민(市民)들이 시 쓰는 시민(詩民)이 됐으면 좋겠다”

제922호
 
2012.07.30
등록 : 2012-07-30 19:08 수정 : 2012-09-03 18:25

시는 어떻게 정치적일 수 있는가. 2009년 용산참사 이후 한국의 젊은 시인들은 줄곧 이 지난한 화두와 씨름해왔다. 반세기 전 한 시인은 “모든 전위문학은 본질적으로 불온하다”(김수영)고 선언한 바 있지만, 이들의 탐색은 문학적 전위의 관심사였던 미학적 언어 실험에 머무르지 않는다. 선언문을 쓰고 성명을 내고, 첨예한 정치적 갈등 현장인 용산과 한진과 제주 강정으로 달려가 시민과 나란히 어깨를 겯는다. 이들이 갈구하는 시는 ‘직접적으로 정치적이면서 첨예하게 미학적인’ 시다. 7월24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21> 대회의실에서 문학평론가 황현산과 박수연, 시인 진은영이 만나 ‘시와 정치의 만남’과 ‘2000년대 한국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주제로 고민을 나눴다.

참석자: 황현산(문학평론가·고려대 명예교수), 박수연(문학평론가·충남대 교수), 진은영(시인·이화여대 HK연구교수)

문학평론가 황현산과 시인 진은영, 평론가 박수연(왼쪽부터)이 7월24일 <한겨레21> 회의실에서 시와 정치를 주제로 좌담을 나누고 있다. 한겨레21 탁기형

황현산(이하 황) : 한국문학이 ‘문학과 정치’라는 주제에서 한 번이라도 벗어난 적이 있을까. 일제 강점기는 물론, 해방공간에서도 정치가 문학을 압도했다. 4·19 혁명 전후해선 문학의 정치참여가 활발했고, 군사정권이 출현한 뒤 독재에 저항해 누구보다 끈질기게 싸운 것이 문학이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문학은 그 어느나라 문학보다 정치 훈련을 많이 쌓았다. 하지만 1990년대를 거치며 문학과 정치가 관계맺는 양상은 변했다. 명목상 민주화가 되고,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진 탓도 있겠지만, 문학의 정치 참여 자체가 피곤해진 측면도 있다. 최근 젊은 시인들을 중심으로 문학과 정치의 문제를 지금까지와 다른 방식으로 사유하게 된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시가 어떻게 정치를 다루느냐가 아니라, 시가 어떻게 근본적으로 정치적일 수 있는지를 묻게 된 것인데, 이렇게 질문 방식을 바꾸게 된 데는 1970~80년대의 정치적 훈련이 밑거름이 됐다고 볼 수 있다.


박수연(이하 박) : 1970~80년대는 독재와 외세의 이중적 억압 아래서 사회적 삶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억눌려있었다. 분단과 외세의 규정력이 강하게 작용했고, 산업화와 함께 첨예해진 계급 갈등이 70년대 억압기를 거쳐 80년대에 이르자 사회의 표면으로 분출되기 시작했다. 민중문학과 노동문학이 힘을 얻으면서 동시대의 거의 모든 문학을 정치적 문학으로 만들었는데, 당시의 문학이 주력한 것은 계급과 분단 같은 시대의 문제를 작품의 소재나 주제 차원에서 예각화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동구권 몰락과 의사(擬似) 민주화 과정을 거치며 문학의 존재 방식이 변했다. 주제나 소재의 영역에서 정치적인 것의 입지가 급격히 협소해진 것이다. 그렇지만 문학에서 정치적 요인을 강조하는 일은 이제 거리낌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게 70~80년대의 가장 중요한 영향일 것이다. 다만 한 가지 고려할 것이 있다면, 그 정치적 문학의 형식이 한국적 특이성을 얼마나 실현하고 있느냐다.

황 : 시만 보더라도, 1970~80년대의 시대 상황은 소재 자체를 다양화시켰다. 종래의 서정시가 감당하기 어려웠던 현실의 깊은 곳, 거친 곳까지도 시를 통해 미학화할 수 있게 된 것인데, 이점에서 70~80년대는 시의 역사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시대였다. 이 경험을 딛고 2000년대 젊은 세대들의 ‘문학의 정치’가 시작됐다고 본다. 2008년 계간 <창작과비평>에 시와 정치에 관한 글을 기고하면서 논의의 발화점을 제공한 게 진은영 시인이다.

진은영(이하 진) : 황 선생님의 진단은 내 경험과도 부합한다. 1980년대 후반 대학에 들어와 경험한 정치적 활동의 기억이 최근 고민의 바탕이 되었다. 2000년 등단한 뒤 그 시절의 고민을 문학적으로 계속 이어가는 일은 내 작품의 성향상 쉽지 않았다. 그러다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과거의 고민들이 격렬하게 신체를 찔러오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대학 시절 이래 줄곧 가져온 정치적 고민을, 등단 이후 10년 가까이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시기를 거치면서 다소 여유있게 벼려온 미적 감수성 속에서 어떻게 녹여낼 것인지를 모색하게 되었다.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진 동료 시인들과 비평가들이 여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시와 정치가 담론적으로 이슈화됐던 것 같다.

 : 앞선 세대로서, 용산 참사 이후 젊은 시인들이 현실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인터넷에 카페를 만들고 거기에 글들을 올리면서 뜻을 결집하고, 그 과정에서 6·9선언(편집자 설명 삽입)이 나오고. 진 시인도 그 과정에 상당히 깊숙이 관여했던 것으로 안다.

황현산 문학평론가
“우리 세대가 보기에도 놀라웠다. 전통적으로 정치 참여에 적극적이던 리얼리즘 진영이 아닌 쪽에서 그 움직임이 시작됐다는 점, 주축이 소설가가 아니라 시 쓰는 사람, 그것도 전혀 정치적일 것 같지 않은 젊은 시인들이라는 점에서 특히 그랬다.”

-황현산 문학평론가

 : 복잡하고 부담스런 과정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그 자체로 충격적인 사건이었기에, 다양한 정치의식을 가진 젊은 작가들이 작가선언이란 형식으로 모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당시 첨예한 이슈였던 용산참사나 보수언론 비판 등의 문제에 관여할 것인지를 두고 내부 논란도 있었다. 말하자면 어떤 주저함 속에서 그 곳, 용산까지 갔던 것이다. 무엇을 하겠다는 계획이나 정치적 확신도 없이. 그런데 거기서 현실을 감각적으로 경험하게 되자, 예술가의 속성상 그것을 산문으로든 시로든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황 : 나이 든 우리 세대가 보기에도 놀라웠다. 전통적으로 정치 참여에 적극적이던 리얼리즘 진영이 아닌 쪽에서 그 움직임이 시작됐다는 점, 주축이 소설가가 아니라 시 쓰는 사람, 그것도 작품의 경향으로 미뤄 전혀 정치적일 것 같지 않은 젊은 시인들이라는 점에서 특히 그랬다. 앞선 2008년 겨울, 진 시인이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정치와 미학에 관한 입론에 바탕해 2000년대 한국시의 정치적 가능성을 탐색하는 글을 계간 <창작과비평>에 썼는데, 그 글에서 논한 시의 내재적 정치성이란 게 실제 문학 현장에선 어떻게 경험됐는지도 궁금하다.

“시가 정치적으로 말할 수 있는 한계는 어디인가”

 : 2009년 작가선언 이후 용산과 두리반, 명동 마리 같은 공간에 결합하면서, 그 동안 내가 문학적 엄숙주의를 갖고서 문학과 정치의 문제를 사고했던 건 아닌지를 반성하게 됐다. 창비에 글을 쓰던 당시에도, 시를 발표하는 지면에 얼마나 정치적인 내용을 미학적으로 탁월하고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만 고민하고 있었다. 소박한 활동이긴 했지만 그런 정치적 활동에서 깨달은 건, 시의 정치성은 시를 짓고 낭송하는 행위가 어떤 공간과 결합하고 그 안에서 그 공간의 성격을 어떻게 바꿔나가는지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 있다는 사실이었다. 두리반 모임에서도 작가들은 정치적 메시지가 담긴 작품을 많이 낭송하지는 않았다. 강제 철거가 예정된, 들어가면 불법으로 처벌받을 수 있는 그 공간에서 작가들이 시를 읽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정치적인 활동이었다. 아늑한 카페에서나 읽혀질 법한 아름다운 텍스트를 어둡고 칙칙한 철거공간에서 낭송하면서, 한 단어가 그것이 있을 자리가 아니라고 규정된 곳에 불려나갔을 때 만들어지는 문학적이고 정치적인 효과를 실감할 수 있었다.

황 : 내 경험에 바탕해 얘기하자면, 한국에서 문학의 정치 참여가 적극적 양상을 띄게 된 건 박정희 시대부터다. 그 즈음 창비 같은 계간지를 통해 문학의 정치참여에 대한 논의도 활발하게 진행됐다. 아쉬웠던 건 그 과정에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극단으로 대립시키고 리얼리즘 문학의 정치성을 지나치게 특권화하면서, 모더니즘을 위시한 문학 일반이 갖는 정치적 힘의 상당부분을 망실시켜 버린 측면이 있었다는 거다. 이런 점에서 2000년대에 들어 시와 정치를 다시 접속시키려는 움직임이 태동한 것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대립관계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노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 그 문제는 한국 문학사 안에서 좀더 면밀하게 검토될 필요가 있다. 내가 볼 때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에 대한 대립적 인식은 나름대로 이해될 만한 구석이 있다. 리얼리즘의 급진적 분파들이 시대 상황 속에서 억압되다보니, 다른 문학 사조들이 더 많은 사회적 발언권을 획득했던 거다. 일례로 1930년대에 활약했던 모더니스트들이 해방공간이 열리면서 정치적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는데, 어느순간 일시적으로 정치적 억압이 사라지니 식민지 시절 언어의 영역에 집중됐던 문학적 에너지가 정치 영역에서 폭발적으로 분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000년대 들어 자신의 문학적 바운더리를 정치 영역으로 확장하려 했던 작가들이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결합시키는 방식을 취하게 된 것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본다. 사실 리얼리즘을 발본적으로 성찰할 것을 요구하면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회통(會通)’을 모색하는 움직임은 1990년대부터 있었다.·그게 담론상으로만 진행되다가 2000년대 시인들에 의해 실행의 차원으로 접어든 것인데, 문제는 그 실행이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로 이뤄지느냐다.

 : 2009년을 전후해 주변에서 정치적 이슈에 대해선 쓰지 말라는 조언이 있었다. 작품에 정치적인 것을 들여올 경우 언어 실험이 태만해지고, 이전의 미학적 성과마저 무너뜨릴 수 있다는 얘기였다. 굉장히 당혹스러웠다. 나는 시인은 무엇이든 다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과 자연에 대한 감각은 노래할 수 있는데, 왜 억압이나 분단 현실, 철거현장에서 느낀 것을 시로 쓰면 미학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미리 결론을 내버리는 것일까. 물론 시인은 언어 실험을 중단해선 안 된다. 그런데 그 실험을 반드시 계간지 지면에서만 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본다. 나는 진보신당을 지지한다. 정치적 발언을 하고 싶으면 거기 가서 하면 된다. 그런데 굳이 다시 문학의 장에서 정치적 문제를 고민하게 된 건, 나를 비롯해 미학적 아방가르드를 추구해온 젊은 작가들에게 일종의 자기쇄신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선언문의 형식으로 초현실주의의 자기순응에 대해 내적 비판을 가했듯이 말이다. 지난 10년간 많은 미학적 실험이 감행되었고, 문학이 특정 사태에 개입해 누군가를 교화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도 자유로워졌다. 그런 순간에 정치적 현실이 10년 이전으로 퇴행했으니 현실에 반응하는 시인의 미학적·정치적 태도도 다시 새롭게 모색돼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 진 시인의 글이 ‘정치적인 시를 첨예하게 미학적으로 쓰고 싶은데 왜 안 될까’라는 서두의 문제 제기에 응답하면서 내린 결론이 ‘삶-정치가 변하지 않는 한 시도 변할 수 없다’는 요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후 비평가들이 개입하면서 논의가 이상하게 흘러갔다. ‘그건 안 되는 거야. 문학의 정치는 문학의 독자성 안에서만 펼쳐질 수 있는거야. (진은영이 인용한) 랑시에르의 얘기도 마찬가지일걸?’ 하면서. 그런 점 때문에 진 시인은 2000년대 시인들과 다른 위치에 있음에도, 부당하게 그들과 함께 묶여 손해본 측면도 있었던 거 같다.

 : 손해라고 절대 생각 안 한다(웃음). 미학적 감수성이 비슷하고 친근감도 많이 느끼는 만큼, 그 친구들과 기꺼이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간혹 당황스러웠던 건, 20세기초의 미학적 아방가르드와 초현실주의를 예찬하면서도 미학적 실험에 충실하기 위해서 적극적인 정치 활동으로부터는 거리를 두겠다는 몇몇 이들의 입장이었다. 사실 서구 예술사에서 초현실주의만큼 정치와 삶의 영역에 적극 개입했던 집단이 어디 있었겠는가.

황 : 이 문제는 어디까지가 정치냐 하는 물음과 함께 가야 한다. 70~80년대 민주화 투쟁, 이건 전쟁이었다. 하루하루 전황을 발표하고, 작전지침 내리고, 싸움터 나가는 전사들 사기 북돋고. 이런 시절을 우리 세대는 통과해온 것이다. 당시 정치적 시는 눈앞의 현실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정치시를 요구한다면 어디까지가 정치인지, 시가 정치적으로 말할 수 있는 한계가 어디인지가 늘 고려 대상이 되어야 한다. 언어적 성찰을 강조하더라도, 시의 정치를 논할 때는 정치의 본질과 정치적인 것의 범위, 경계까지도 함께 성찰해야 한다는 얘기다.

 : 70~80년대 정치가 전쟁이었다는 말씀에 공감한다. 시인 황지우의 말처럼 단순해서 행복했던 시대였다. 전쟁에선 적이 명확하고, 도달해야할 목표도 분명하니까. 하지만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들어서고, 정치의 존재 방식이 변했다. 정치적인 것은 도처에 편재하고 잘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다보니 정치와 문학의 관계를 논하는 게 점점 복잡해진다. 시인들의 언어 실험이 중요한 의미를 획득한 것도 이런 현실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정치의 폭을 다시 좁혀 놓았다. 그러니 이전처럼‘이것도 정치, 저것도 정치’라는 방식으로 대응하기보다, 문학도 싸움의 폭과 대상을 좁힐 필요가 있다. 4대강 문제를 보자. 환경단체들이 말하는 녹색과 아름다운 삶을 MB도 똑같이 얘기한다. 차이는 담론의 언어와 형식이 아니라 내용에 있다. 이런 점에서 젊은 시인들의 고민도 달라져야 한다. 언어의 형식보다 내용에 깊이 천착해들어가야 한다는 거다. 정치적인 시는 소재 차원에서부터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황 : 전쟁시대의 언어는 충격적이어야 효과를 갖는다. ‘도종환 시 파동’을 계기로 교과서에 실린 시들을 두루 살펴볼 기회를 가졌는데, 교과서의 시 중에는 충격에서 해방시키거나 치료하는 게 아니라, 더 먹먹한 상태로 만들어버리는 것들이 많았다. 난 이게 최근의 문화 현상과도 관련이 깊다고 본다. 요즘의 문화는 섬세하게 바라보고, 작은 것에서 감동을 느끼게 하는 문화가 아니다. TV 연속극을 봐도 재벌을 등장시키지 않고선 얘기를 못 끌고 나간다. 이런 점에서 우리 시대만큼 삶을 미적 대상으로 만드는 데 실패한 시대는 없다는 말도 일리가 있다. 충격적인 방식으로만 미를 드러내려 했던 것의 결과라고 본다. 2000년대 젊은 시인들의 언어 운동도 비슷한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단어들 사이에 끊임없이 충격장치를 집어넣는다. 그 장치를 얼마나 치밀하고 세심하게 집어넣느냐로 문학적 역량을 평가받겠다는 듯.

진 : 깊이 공감한다. 요즘 시가 특정 방식의 실험에만 매몰되는 데는, 삶이 지나치게 천편일률화되어 가는 탓도 있을 것이다. 나 스스로 학교와 집 사이만 오가고, 시를 써서 발표하고, 때가 되면 시집으로 묶고. 한동안 다른 삶이 없었다. 그런 삶 속에서 실험되는 내 시가 존재의 총체성을 문제삼는 차원으로 나가기는 힘들 것이다. 결국 이 건조한 ‘시민적 삶’의 틀을 넘어서야 하는데, 그러려면 다양한 활동을 해야만 한다. 그래야 좋은 시들, 황현산 선생님이 말씀하신 삶을 예각화하는 섬세한 작품들이 나온다. 시의 정치라는 것 역시 ‘내용의 충격성이냐, 형식의 혁신이냐’의 이분법을 넘어서려면, 시인 스스로 ‘시민적 삶’과 ‘시인적 삶’ 사이의 경계 너머로 과감히 도약할 수 있어야 한다.

황 : 사실 난 정치적이지 않은 시인을 별로 안 좋아한다.(웃음) 그러나 시인들한테는 시를 쓸 때 정치 이야기는 되도록 하지 말라고 한다. 그렇게 시시하게 쓰지 말고, 다른 방식으로 쓰라고. 그런데 독재를 반성 않는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될 지도 모를 긴박한 상황, 쌍용차와 강정에서 저렇게 힘겹게 싸우고 있는 상황에서도 가만히 앉아있는 시인들을 보면 정말 화가 난다. 시는 어떻게 쓰든, 이런 중대한 사안이 있을 때는 자기 입장 밝히고, 정치적으로 발언해야 하는 것 아닌가.

 : 상황이 변한만큼, 넓은 의미의 정치보다 좁은 의미의 정치에 천착해야 하지 않겠냐는 박 선생님 말씀에 대해선 생각을 달리한다. 지금은 불행이나 고통을 증언하고 전달하는 방식이 다양해졌다. 70~80년대처럼 침묵하는 언론을 대신해 문학이, 시인이, 가장 선도적으로 말해야 하는 시대는 아니다. 그렇다면 불행이나 고통을 표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잘 표현해야 한다. 그 ‘잘’에 대한 고민이 보다 깊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은영 시인
“아늑한 카페에서나 읽힐 법한 아름다운 텍스트를 어둡고 칙칙한 철거 공간에서 낭송하며, 한 단어가 그것이 있을 자리가 아니라고 규정된 곳에 불려나갔을 때 만들어지는 문학적이고 정치적인 효과를 실감할 수 있었다.”

-진은영 시인

두리반에서 서정시를 읽으며 깨달은 효과

 : 그 ‘잘’이라는 걸 언어 실험의 차원에서만 고민하는 것 같아 걱정스러운 거다. 지금은 ‘새로움’이란 말 자체가 새롭게 사고되어야 하는 때다. 세계문학사의 차원에서 본다면, 새로움이 본격적으로 이야기된 것도 벌써 100년이 넘었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행위 자체가 낡은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1~2년도 안 돼 신형 휴대폰을 구매하게 만들 듯, 자본주의 체제는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새 것을 추구하도록 강박한다. 이때의 새로움이란 물건의 쓰임새나 내용이 아닌 상품 형식의 새로움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근대 자본주의 문명의 문제를 극복하려면 새로움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바라보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시인들이 새로움을 추구할 때도 마찬가지 고민이 필요하다고 본다.

 : 전형적인 것을 이미 존재하는 다른 것과 다른 방식으로 결합할 때도 새로움이 나올 수 있다. 철거 예정지인 두리반에서 시를 읽는 것을 생각해보자. 그곳에서 선동적인 시를 읽는 것은 전형적인 방식이다. 그것이 무가치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엄중한 공간에서 담소를 나누고 서정시도 읽었다. 그 공간에서 한번도 시도되지 않은 행위가 이뤄졌다는 점에서 그것은 새로움이었고, 금지된 공간을 더 많은 사람들로 붐비게 하면서 특정한 정치적 효과를 만들었다.

 : 그 새로움을 (특정 공간에서 특정한 시를 읽는 방식이 아니라) 시 자체로 드러내는 건 어려운가. 물론 진 시인의 시 중에는 성공적인 정치시가 있다.

 : 나 역시 특정한 시민적 삶에 매여 있다. 현안이 있는 곳에서 피케팅하고 시 한편 낭송하는 시간을 내는 일조차 쉽지 않다. 협소한 체험 안에선 아무리 시를 써도 책상 앞에서 하는 언어실험밖에 안 된다. 그 삶의 틀을 조금이라도 벗어나서 다른 감각적 자극을 받아야 한다. 우연한 기회에 제안을 받고, 나가서 보고 느끼고, 그러면서 새로운 언어의 시가 써진다. 책상에서 정치시 쓰겠다고 하면 안 나온다. 많은 분들이 담론으로만 논하지 말고, 정치시를 써서 ‘얼른’ 보여 달라고 한다. 작가로서 부담이 크다. 감각이 안 따라오니까. 물론 70~80년대 선배들 하던 대로 쓰면 된다. 정치시의 공식이란 게 있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한다. 지금 역시 그 시절만큼 급박하긴 하지만, 작가들이 가장 노골적으로 표현해야만 했던 그때만큼 문학의 선도성에 대한 요구가 급박한 것은 아니다. 그런 선도성은 인터넷 언론, SNS가 이미 하고 있다.

 : 70~80년대 현장시를 젊은 시인들한테 요구하는 게 아니다. 그런 시가 쓰여질 시대도 아니다. 흔히들 정치적인 시는 의미론적으로 가독성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정치시도 가능할 것이다. 현실의 소재를 활용하면서 다양한 정치적 가능성을 상상하게 만드는 시. 말하자면 애매한 이미지를 가진 정치시가 쓰여질 순 없는 걸까?

황 : 발터 베냐민이 말하는 알레고리가 그런 시의 방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시는 어떤 것이든 과거의 까마득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꿈, 소망을 담기 마련이다. 서정시든 정치시든 막론하고. 그런데 시란 어찌보면 실패의 장르다. 중요한 건 실패하면서도 계속해서 전진하게 만드는 힘 또한 그런 시의 속성에서 나온다는 사실이다. 지금 자본주의를 이겨낼 힘은 무엇에게도 없다. 뭐든지 만들어내면 자본주의가 다 상품화해버리니까. 자신에 대한 저주와 싸움까지도 모조리. 그럼에도 어떻게든 전진하려고 해야 한다. 2010년 김달진 문학상을 받은 중국 망명시인 베이다오가 이런 말을 하더라. ‘전 세계 사람들이 헐리우드 영화와 일본 만화, 한국 드라마를 보고 산다. 모든 게 자본주의화 됐다. 그럼에도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우리에겐 시가 있으니까.’ 듣고 보니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최근엔 시의 바깥으로 나와 정치적인 발언을 하는 젊은 시인들을 보면, 시의 행로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박수연 문학평론가
“1970~80년대 현장시를 젊은 시인들한테 요구하는 게 아니다. 현실의 소재를 활용하며 다양한 정치적 가능성을 상상하게 만드는 시. 말하자면 애매한 이미지를 가진 정치시가 쓰일 순 없는 걸까?”

-박수연 문학평론가

“비시민적 삶을 안을 때 진정한 시민성 드러나”

 : 젊은 시인들의 그런 행동을 보면서 생각한 건, 시인과 시민에게 구분되는 역할이 존재하냐는 거다. 개인적으론 구분되지 않으면 좋겠는데.

황 : ‘사람 못 되면 중 된다’는 속담이 있다. 나는 종종 ‘사람 못되면 시인 된다’는 말로 바꿔 얘기하곤 한다. 시민에겐 고유한 의무가 있다. 시인은 이 의무에 적응 못하고 늘 이의를 제기하는 측면이 있다. 동시에 시인은 시민의 권리와 행복을 위해 앞장서 근본적으로 발언하려 한다는 점에서 가장 적극적인 시민이기도 하다. 나는 시인의 경험을 가진 시민의 발언이 중요하다고 본다. 시가 정치 일변도로 나갈 경우 잃어버릴 부분이 너무 크다. 시적인 것이 없는 시인의 발언이란 게 무슨 힘을 갖겠는가. 시인이 말할 때 사람들이 귀기울일 수 있게 하는 힘을 시 속에서 확보하고, 삶의 여러 부분과 직접 닿아있는 구체적인 말로 발화하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 시인과 시민의 구분을 명확히 하자는 동료들이 있다. 시인으로선 미학적 실험에 집중하고, 급진적인 정치활동을 할 땐 시민으로서 하자, 그렇게 하는 게 예술가들의 정치 참여를 한층 활성화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냐는 거다. 하지만 난 시민과 시인의 구분보다는 ‘시인과 비시인’ ‘시민과 비시민’의 변증법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본다. 이런 일은 시인이 하는 것이고, 저런 일은 시인이 해서는 안 된다는 구분. 그런데 역사상 가장 시적인 작업은 늘 비시적 것들로 도약해서 그것을 시적인 것으로 만드는 계기들을 갖고 있었다. 20세기 미학적 아방가르드의 실험이 위대했던 건, 시에서 다루면 안 된다고 여겨진 것들을 다루면서 그 경계를 과감히 넘어선 데 있다. 시민과 비시민의 구분도 마찬가지다. 용산의 철거민들 편에서 싸우고 구호 외치는 것은 기득권층의 시선에서 보면 시민적 규범에 어긋나는 비시민적 행동이다. 그러나 시민이 자기 삶의 틀을 넘어 비시민적 삶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을 때, 진정한 시민성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 언젠가 한 시민강연에서 진 시인이 이런 말을 하는 걸 들었다. ‘내 꿈은 모든 사람들이 시를 쓰는 거다. 모든 사람이 시를 쓰면 세상이 착해질 거다.’사람들에게 진 시인의 말을 소개하하곤 한다. ‘착해진다는 건 억압을 없애기 위해 뾰족해지는 게 아니라 그 억압에서 해방되기 때문에 오는 결과다. 그게 시를 쓰는 과정 아니겠나.’ 나도 시민(市民)들이 시 쓰는 시민(詩民)이 됐으면 좋겠다. 시를 쓰는 일이 시민의 정치적 역할과 자연스레 합치되는 그런 사회. 그러려면 시인들이 배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황 : 모든 시민이 시를 쓰기는 어렵겠지만, 그들이 용산과 강정 같은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행동에 나선다면, 그 자체로 시인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 아니겠나. 장시간 좋은 이야기 많이 들었다.

정리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원문링크: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32604.html


추모에 관한 소론



< A. Abbas ,1980 >



세월호 이후 이유없이 쏟아지는 눈물은 모두 어디로 가는건지. 

이 몸뚱아리의 염분이 높아져버렸다. 

무엇이 어떻게 왜 라는 질문이 날아들기도 전에 슬픔은 온통 차오르기만 했다.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읽으면서도 자꾸 몸뚱아리에 썰물만 친다. 



슬픔과 우울증(Trauer und Melancholie)으로 정확하게 번역이 들어맞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래서 독일어 슬픔Trauer이라는 단어에는 ‘애도’의 의미가 겹쳐있다. 

프로이트 역시 글을 시작하기 전에 결론이 빈곤함을 드러내고 논의를 시작한다. 

“슬픔은 보통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 혹은 사라하는 사람의 자리에 대신 들어선 어떤 추상적인 것, 즉 조국, 자유, 어떤 이상 등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244쪽) 

사랑하는 것의 상실에서 시작된다는 슬픔은 누구가에게 ‘우울증’을 일으켜세운다.

슬픔이 깊어지면 우울증으로 찾아온다고 하지만 슬픔을 맞이하는 마음근육에 따라서 

슬픔의 색깔은 달라진다. 

“우울증의 특징은 심각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낙심, 외부 세계에 대한 관심의 중단,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상실, 모든 행동의 억제, 그리고 자신을 비난하고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을 정도로 자기 비하감을 느끼면서 급기야는 자신을 누가 처벌해 주었으면 하는 징벌에 대한 망상적 기대를 갖는 것 등으로 나타난다.“ (244쪽) 

▶정신분석학의 근본개념/지그문트 프로이트/ 열린책들/ 2004 



우울증의 특징들은 슬픔의 특징들과도 비슷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슬픔에서는 나타내지 

않는 자애심의 추락이다.” 자애심(독일어로는 어떻게 되려나...)의 추락이라. 

우울증은 자아는 쓸모없고, 무능력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아로 여긴다. 

자신의 과거들을 펼치며 “자기 비난을 과거로 확대시키만”(247쪽) 한다. 

이런 자기 비난은 자기를 폭로하며 “만족을 얻기 위해 집요하게 떠들어대는 속성(249쪽)”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몇 주전 나도 이와 비슷한 심리적 상황을 거쳤다. 

이 쓸모 없는 ‘나’를 향한 스스로 비난하며 내가 얼마나 무능력한지 

증명하기 위해 과거들을 헤집에 놓았다. 마침 그 때 몸이 좋지 않았는데 

되돌아 생각해보니...그래. 




라깡은 또 다른 의미에도 프로이트의 멜랑꼴리를 이해하기 위해 햄릿을 

불러 들였다. 햄릿은 아버지를 잃은 슬픔과 절망, 분노로 인해 오랫동안 

무기력한 우울의 상태에 있었다. “애도하지 못하는 주체, 즉 햄릿처럼 멜랑꼴리에 빠진” 

주체는 행위acte를 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애도되지 못한 죽음은 유령이 되어” 찾아

온 것이다. 오랫동안 추모와 애도의 시간을 가지지 못한 햄릿의 신체는 이미 무력하다. 

햄릿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삼촌과 결혼한 어머니의 욕망으로부터 분리 될 수 없었고 

심지에 어머니의 욕망에 참여하고 있었다. 애도하지 못하는 주체는 다른 욕망에 의존하며 

죄-책감을 통해 신체는 무기력해진다. 

“세월호 사건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우울과 죄의식, 절망을 경험하고 있다. 라깡의 햄릿 분석을 통해 이것이 세월호 사건과 관련된 우리의 집단적 멜랑꼴리에 대해 던지는 함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1) 어떤 경우도 납득할 수 없는 부당한 죽음의 경우 그것은 결코 개인 심리치료를 통해 해결될 수 없다. 물론 일정 정도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두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은 사회적 차원에서의 ‘정의 실현’을 통해서만 해결 가능하다.

(2) 이러한 차원을 망각한 심리치료는 종종 진리를 은폐하는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 살아 있는 인명구조에 그렇게 무심했던 정부와 행정관료들이 구조된 사람들의 심리치료를 위해서 그렇게 빠른 속도로 정신과의사를 배치할 수 있었던 그 기동력이 놀라울 뿐이다!

(3) 햄릿의 이야기는 멜랑꼴리 역시 권력과 외설적 쾌락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남편을 살해한 사람과 결혼한 왕비가 있다. 그리고 즉 어머니의 욕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아니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우유부단한 햄릿이 있다. 이러한 어머니의 욕망과 동일화했기 때문에 햄릿은 복수하지 못하고 멜랑꼴리에 빠진다.

(4) 햄릿의 멜랑꼴리, 즉 행위하지 못함은 권력과 외설적인 성적 쾌락에 무의식적으로 동참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햄릿이 행위하지 못하는 한 아버지는 유령으로 배회하며 햄릿을 계속 찾아올 것이다.

(5) 햄릿 드라마는 비극으로 끝나지만 멜랑꼴리를 진정으로 극복할 수 있도록 해준 마지막 단계가 무엇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행위이다. 그러나 행위하기 위해, 즉 진정한 애도작업을 할 수 있기 위해 햄릿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 했다. 레이티어스의 독이 묻은 칼에 맞아 죽어가면서 왕에게 독이 든 잔을 마시게 한다. 햄릿의 죽음의 순간을 은유적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멜랑꼴리 환자의 자살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햄릿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비운의 멜랑꼴리자가 아니다. 죽음의 순간에 그는 자신이 동참하던 사악한 권력과 외설스러운 쾌락과 진정으로 분리된다. 그리하여 그는 행위 할 수 있었고 진정한 애도작업을 수행할 수 있었다.

(6) 또한 『세미나 7권: 정신분석의 윤리』에서 라깡은 안티고네 사례를 분석한 바 있다. 안티고네는 독재자 크레온에게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죽임을 당한 오빠 폴리네케이스를 매장해준다. 반역죄를 저지른 안티고네는 동굴에 갇힌다. 햄릿 분석에 이어서 바로 이어서 행한 세미나에서 라깡이 <안티고네>를 분석한 것은 우연이 아닌 듯 보인다. 우리는 <안티고네>를 오빠의 죽음에 대한 애도에 관한 작품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안티고네의 행위는 반역적이다. 그럼에도 안티고네는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안티고네는 반역자인 오빠를 매장하고 장례식을 치루는 행위를 통해서만 진정한 애도가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안티고네의 애도 행위는 동시에 크레온에게 저항하는 정치적 행위이기도 하다.

(7) 멜랑꼴리에 대한 라깡의 분석은 개인과 사회는 분리된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이 두 작품과 이에 대한 라깡의 해석은 진정한 애도는 ‘궁극적으로’ 사회적, 정치적 행위라는 것, 그리고 이러한 행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권력과 외설적 쾌락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부당하게 죽은 사람들을 자신의 쉼터로 돌려보내지 못하는 무력한 멜랑꼴리자로 남게 될 것이다“


▶지젝 이론의 원천과 그 수용의 문제점, 그리고 신좌파 담론의 한계/ 홍준기

+애도는 슬픔을 마주하는 하나의 적극적인 행위acte이다. 이 행위들은 사회적, 정치적 

맥락을 빗겨갈 수 없다. 애도는 행위이다. 




내 아들이 없는데도 온 세상이 살판난 것처럼 들떠 있는 올림픽의 축제 분위기가 참을 수 없더니, 내 아들이 없는 세상 차라리 망해버리길 바란 거나 아니었을까. 내 무의식을 엿 본 것 같아 섬뜩했다. 아아, 천박한 정신의 천박한 꿈이여, 내 아들아, 어쩌면 에미를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만드니.


그러거나 말거나 오늘은 88서울 올림픽의 개막식 날이다. 

날씨는 쾌청하고 개막식도 잘 돼가는 모양이다. 딸, 사위, 손자들이 

텔레비전으로 그 광경을 시청하면서 연방 탄성을 지르며 즐거워하고 있다. 

그런 분위기를 훼방놓지 않을 만큼 대범해야 된다는 건 인내가 아니라 고투다.


그저 만만한 건 신神이었다. 온종일 신을 죽였다. 

죽이고 또 죽이고 일백번 고쳐죽여도 죽일 여지가 남아 있는 신, 

증오의 마지막 극치인 살의殺意, 내 살의를 위해서도 당신은 있어야 돼.


▶박완서/ 한 말씀만 하소서 / 1988년 9월 18일 일기



1988년 아들을 교통사고로 보낸 박완서 선생님의 일기들을 모은 책. 

벼랑 끝에서 쓰여진 문장들은 슬픔의 밀도는 가슴팍을 쿵하고 내리친다. 

삶이 바스라지기 직전의 절절한 슬픈 표정이 어린거린다. 

경험하지 않고서 말하지 말라. 이 말은 어느 정도는 진리이고 어느 정도는 독선이다. 

이미 우리는 경험했다.




▶몇 년전에 이 우울증과 관련된 책들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다. 세계의 빈곤과 

모멸을 선사하는 사회에서 일어난 붐이었다. 심리학 책들이 쏟아져 나왔고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는 불교와 명상, 영적 지혜들이 담긴 문장들이 팔려나갔다. 

우울증은 사회적 병리현상이자 문화적 자폐현상이다. 


▶슬픔을 건너는 지혜

정동의 정화(Katharsis), 기억과 망각의 기술, 파르헤시아(Parrhesia)라는 세

가지 치유의 언어를 발견할 뿐만 아니라 습관의 교정과 일상생활의 건강한 유지,

즉 자신의 영혼의 관리술을 또 하나의 처방으로 제시한다. 마지막 장에서는 니체적

치료술의 한 임상사례로서 무센브로크가 제시하는 철학상담적 임상을 다루었다.

니체에게서 치유의 길은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좋은 해석의 훈련이며, 부정적

의지를 긍정적 의지로 바꾸는 과정이자, 충만한 자기 관계의 훈련 속에서 삶을 아

름답게 이끌어가려는 창조적 의지를 실현하는 노력의 과정에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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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에 관한 소론

분위기를 만든다는 것에 대한 생각들이 든다. 

어떤 일을 할 때 분위기가 주는 '힘'이라는 것이 

무언가를 행하고 있고, 하려고 하는 '힘'보다 더 강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교실에 있으면서 더 느끼고 있는데 무엇을 학습할 것인가를 생각하기 이전에 

어떤 학습분위기를 만들 것인가하는 것이 더 중요할 것 같다. 

분위기를 안-팎으로, 나-세계의 것들과 끊임없이 교차하며 

엮이는 것.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까.  



 

기분지어진 공간

빈스방거인데, 그는 정신병리학에서의 공간 문제("Das Raumproblem in der Psychopathologie", 1933)에서 결코 인과관계로는 설명할 수 없는 <><바깥>의 불가분적인 통일을 <기분지어진 공간>(der gestimmte Raum)이라는 개념에 의해 표현하고 있다. 또한 슈트라서도 정서(Das Gemüt, 1954)에서 기분은 자아 감정임과 동시에 세계 감정이며, 기분과 분위기가 주-객의 구별을 넘어선 <초주관적 · 초객관적>인 차원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지적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현상학사전, 2011, 도서출판 b>

 

분위기라는 것이 초하는 것.

그러니까 자아와 세계를 넘나들고, 주와 객도 넘나들고,

모든 구별을 넘어선 자리에서 일어난다는 것.

그것이 영향을 준다는 것.

분위기의 공간성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걸 초-공간성이라는 건.......

칸트의 냄새가 조금 나기도 하고.

일단 주목할 부분은 세계 감정자아 감정동시에 드러난다는 것.

 

교육적 분위기

교육적 분위기(PädagogischeAtmosphäre)는 교육이 수행 되는 배경으로서의 감정적이고, 기분적인 상태 전체 및 공감과 반감의 관계 전체로 정의하고 있다(오인탁·정혜영,2005:91). 다시 말해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은 개개인의 다양한 삶으로의 확장 또는 발전이지만 그러한 과정으로 이행되기 위해서는 교육 작용이 이루어지고 있는 시점에서의 교육행위자 간에 주고받는 특별한 감정적 교류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Heidegger에게 있어 인간 존재의 이해는 이성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언제나 하나의 기분(Stimmung)’에 사로잡힌 존재라는 사실에서부터 출발한다(Heidegger,1983:10). 기분은 존재가 자신을 알리는 메시지이고,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한 가지 방식이며, 오래 전 과거로부터 존재해 온 현존재의 자기현시 방식이다(박근배,2012:26). 달리 말하면,‘세계--존재로 살고 있는 현존재의 존재가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 이성을 통해 그 메시지가 무엇인지 언어로 해독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기분을 통해 현존재는 이미 예민하게 그 신호를 수신하고, 반응하며, 해석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분위기는 인간의 심연에 자리하고 있는 기분에 근거하고 있다. 이와 같이 분위기는 기분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과 주위 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에서 한 개인이 자신의 주위 상황이나 환경으로부터 느끼는 기분을 분위기라고 정리할 수 있다

 

기분과 분위기의 관계는 하이데거에서 비롯되는데.

인간은 언제나 기분에 사로잡힌 존재인데.

그것은 세계--존재로서의 인간이 주위상황이나 주변환경으로부터 느끼는 기분.

그 기분을 분위기로 보고 있다.

분위기는 기분들의 네트워크.

기분의 자기현시-세계현시가 분위기 인 것이다.



한자어: 분위기

한자어로 분위기雰圍氣를 뜯어보면

은 비 와 분합쳐서 만들어진 말

비가 나누어진다는 의미이니 안개에 가까운 듯.

는 한계지어진 공간을 둘러싸고 있다.

분위기는 안개처럼 특정한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기운'을 말한다.

어떤 기운, 어떤 공간성, 어떤 안개같은 기운을 이야기다.

분위기를 나타내는 개념들 중에 가장 정확하고 명확한 개념인 듯 하다.

-희랍어: Hauch-Kreis

어떤 대상이 그것을 느끼는 사람에게 와닿는 숨결과 같은 오묘한 분위기.

희랍어에서의 분위기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와닿는'에 있다.

한자어에서의 분위기가 '둘러싸고'있는 것이라면 희랍어에서는 '와닿는'것이다.

이 두가지를 동시에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둘러서 와닿고 있는 것' 이것.

 

군대: 분위기 잡기

"야!"


군 복무시절 늘 분위기는 잡는 것이었다.

분위기란 풀어지면 안되고 늘 분위기는 잡아두는 것.

상병들과 병장들은 점호시간이면 엄숙함과 잔인함으로 분위기를 늘 잡곤 했다.

헤이해진 분위기를 낚아채서 분위기를 잡는 것.

"!" 이 한마디면 게임끝. 내무실을 '둘러싸고 있는' 분위기는

따로 사유하거나 성찰하지 않아도 그대로 '와닿는'.

이 분위기는 반드시 잡아야 하는 것,

움켜쥐고 흔들어야 하는 것. 만들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잡아채야하는 것으로서 도래한다.

 

-선배들: 분위기 만들기

고교시절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분위기라는 것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선배들의 어깨너머로 보았던 식구총회, 운동장 사용법, 교무실 점거하는 법 등등.

다양한 방법들을 분위기로 배웠다. 그 누구도 '이렇게 해, 저렇게 해'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만들어 놓은 분위기란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했다.

선배들의 행동과 말투, 분위기들을 떠올려 본다. 아무도 말을 하고 있지 않지만

들리는 것. 학교와 교실을 둘러싸고 있는 공기, 안개. 그것.

 

교실: 분위기 흐리기

어느 정도 집중된 분위기 속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 이런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마이쮸" 하다가 "마이쭈"하는 학생이 있다. 대체로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지만 짜증스러움의 기운이 교실을 가로지른다. 분위기가 흐려지는 것은 한 순간이다. 분위기는 결국 흐름같은 것인데,

그 흐름을 흩트리는 상황들은 늘 발생한다. 분위기는 때로는 반전된다.

기압들의 접속이 어떻게 날씨로 이어지는를 알면 이해하기가 쉬운 듯 하다.

저기압과 저기압이 만나 장마가 이어지는 것 처럼.

분위기의 반전, 전환은 지금의 흐름과는 다른(낯선)것과의 접속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분위기의 집합성

악이라는 것은 개인의 속성이 아니라 집단적 분위기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집단적 분위기. 아렌트의 분위기란 개별적이지 않다. 집단적, 공동체적 분위기는 개별자들과 타자들간의

모임, 접합된 상황속에서 분위기는 일어나는 것. 그래서 분위기란 언제나 사회적이다.

아렌트가 말하는 '' 뿐만이 아니라 '' 혹은 '정의'같은 것도 이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분위기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아우라

"어느 여름날 오후 휴식의 상태에서 휴식자에게 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먼 지평선의 산맥이나 나뭇가지를 보고 있노라면바로 이 순간 우리는 이 산과 나뭇가지가 숨을 쉬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이러한 현상을 우리는 산이나 나뭇가지의 분위기가 숨을 쉬고 있다고 말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벤야민은 분위기(aura)라는 말을 비평의 언어로 다듬은 사람이다.

구절을 끊어서 읽어보면 "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것들은 단순한 대상으로서의 타자가 아니다. 산맥과 나뭇가지들은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 던져진 그림자를 받아들이면서 "나뭇가지가 숨을 쉬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 그 느낌. 타자에게서 전달되는 "숨 쉬고 있음"을 느끼는. "아무리 가까이 있다고 느껴지더라도 먼 것의 일회적 나타남"이라고 벤야민은 정리하고 있다.

벤야민의 분위기. 비평의 언어로서 사용되는 것만이 아니라 인식론적 차원의 지평이 넓혀진다. 대상과 관계맺는 숨결과 시선들의 교차. 상호-교차하는 느낌. 느슨하지 않은 상태의 느낌. 어떤 것이 벌어지고 있는(생성되고 있는) 체험의 장. 교차하는 교감.

왕따 문제같은 경우. 그것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정한 분위기가 응축되어있다. 무시하는 이와 무시당하는 이. 너무 많은 것들을 읽어낼 수 있다. 사회적인 차원, 정신분석적 차원, 경제적 차원, 문화적 차원 등등. 잘 드러나지 않는 것과 교감을 나눈다는 것은 뭘까. 먼 지평성의 산맥과 나뭇가지가 던지는 그림자를 보는 것. 구체적인 사안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발현되고 있고, 펼쳐지고 있는 분위기로서 바라보는 것.

분위기는 단순한 기분상태, 미적인 환상이 아니라 사물과 사람/ 사람과 사람/ 주체와 타자와 같이 관계맺는 것들은 저마다의 삼투작용. , 서로를 침범하고 오염시키고 간섭한다는 것.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인상. 분위기는 확실히 공간적이고 사회적이다.

 


 

분위기를 정확한 개념으로 정리할 수 없는 개념으로 보인다. 합리적으로 설명되기 전에

문학의 공간에서 묘사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분위기는 조성되는 것이다.

분위기는 어떤 징조이고 어떤 것에 의한 영향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 분위기를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조성물들을

바꾸어나가는 것. 그 대상은 교감을 나누는 것.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는 기획과 연출에 의한 것이다.

분위기란 기운들의 네트워크이다.

이런 네트워크들이 만들어내는 공기의 조성은 '감응'에 가까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분위기를 만다는다는 것. 어떤 공간에 서려있는 무늬같은 것은 아닐까

교실의 무늬. 나의 무늬가 만들어내는 분위기라는 것은 어떻게 말해 볼 수 있을까.


 

 

<Peter Marlow,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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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ivia Arthur, 2012> 



(박남희 <혐오의 혐오? 여성혐오에 분노하기> 수유너머N 토론회 발제문 발췌 및 정리) 


'개'라는 접두사를 표현한 말들을 많이 쓴다. 

개좋아, 개싫어, 개짱나 등등. 이 정도 표현은 과장법으로 봐줄만 하다. 

그런데 개독교, 개보녀, 개저씨 등등. 이런 과격한 표현들. 

어느덧 나도 꼰대가 되어서 그래서?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일까. 

이러한 과격함이 향하는 곳은 다소 분명해 보인다. 

모로오카 야스코의 <증오하는 입>에서는 일본 재일한국인에 대한 혐오발언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혐오발언이란 넓게는 인종, 민족, 국적, 성별, 성적 지향 등의 속성을 갖는 소수자 집단이나 개인에게 

그 곳 속성을 이유로 가하는 차별 표현"이다. 그리고 혐오 발언의 본질은 소수자에 대한 '차별, 적대, 폭력의 선동' 

'차별을 선동하는 모든 행위'이자 표현에 의한 폭력, 공격, 박해이다. (모로오카, 2015:84)

 

과격한 표현이 등장하지 않더라도 사회적 약자에게 그들이 갖는 속성을 근거로 가하는 차별을 확대시키는 표현들은 

차별구조에 공모하는 문장 자체가 소수자에게 가하는 폭력이기 때문에 심각해지는 것이다. 


감정은 그저 개인들의 내적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 간의 관계 속에 그리고 개인과 그들의 사회적 상황 간의 

상호작용 속에 존재하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사회적 조건이 감정을 촉진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감정은 사회적 관계로 이해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바바렛 2007: 121) 



감정은 어떤 상황, 조건 없이 일어날 수 없다. 감정의 과정은 외부와의 접촉에 의해서 촉발된다. 

이 외부성은 사회적 환경, 문화적 풍경 속에서 일어나는 관계망 속에서 일어난다. 감정이라는 것이 

공통된 구조적 상황을 공유하면 집단의 수준에서 공통의 감정을 경험할 수 있다.  


역겨움. 마사 너스바움은 혐오는 오염물이 입을 통해 나의 신체 속으로 들어온다는 관념, 이로 인해 자신이 

오염 될 수 있다는 관념을 수반" 한다고 한다. 


"혐오는 사회적 차이와 무관하게, 자신이 유한하며 퇴화/부패하기 쉬운 동물적 존재라는 사실을 강하게 상기시키는 대상을 

섭취하기를 거부하고, 이러한 대상에 의해 오염되지 않으려는 감정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너스바움, 2015: 183) 



오염가능성은 혐오의 감정의 근저를 차지한다. 혐오는 혐오를 불어일으키는 대상의 성질에 의해 유발되기 보다는, 이 대상이 자신을 

오염시킨다는 주체의 인식에 의해 유발된다. 혐오가 실제적으로 오염을 불어일으키는 대상 뿐만 아니라, 상상적으로 오염을 불어일으킨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다른 대상으로 옮겨갈 수 있음을 시사한다. 오염되어 있기에 저열하다고 여겨지고, 오염되어 있기에 천하게 여겨진다. 



증오, 멸시, 비하, 혐오



"전통적인 형태의 여성혐오는 여성을 무시하는 태도인 여성멸시와 다르지 않았다. 흥미로운 것은 2000년대 이후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여성을 싫어하고 폄하하는 태도는 멸시라기보다는 혐오phobia의 형태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어느 정도 여성에 대한 사회적 ‘두려움’이나 ‘위협감’을 동반한다는 의미다."

-손희정,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문화과학/ 원문출처http://cultural.jinbo.net/?p=1256



혐오는  두려움과 위협감을 동반한다. 최근 유럽에서 불고 있는 시리아 난민을 둘러싼 혐오의 문제들이 번지고 있기도 하다. 

독일에서는 네오나찌들이 드러내놓고 혐오를 표현하고 있기도 하다. 


"불안의 판타지 안에서 여성은 꽃뱀 혹은 먹튀녀가 되거나 남성을 짓밟고 올라서서 얼마 안 되는 밥그릇을 강탈해갈 수 있는 권능을 지닌 경쟁자로 등극한다."

 -손희정, 우리시대의 여성혐오, 문화과학/ 원문출처: http://cultural.jinbo.net/?p=1023




이 불안은 비단 밥그릇(정치경제)만의 문제일까. 오히려 신체적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증오에는 혐오와 다른 가능성이 있다. 혐오가 어떤 범주(인종, 민족, 성, 계급 등등)를 통해 작동하는 것과 달리, 증오에는 어떤 개별적 경험에서 비롯되는 구체성과 정리되지 않은 감정을 지닌 신체성이 있다. 아직 무엇이 될지 알 수 없는 증오의 힘을 통제하고 어떤 범주 속에 고정시키는 것이 혐오의 기능이다. 유동적인 관계들과 결부되어 있기에 사랑으로 반전할 수도 있는 증오의 가능성을 혐오는 봉쇄한다. " 

-증오와 혐오 사이 / 후지이 다케시/ 한겨례/ 원문출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06581.html

증오와 혐오의 구분에서 무엇을 알아 볼 수 있을까. 
전통적인 의미에서 여성, 소수자들을 향한 것을 멸시였다.  '무시'하고 조롱하면 그만이었다.  여성비하, 장애인비하와 같이 이 전에는 
무시하고 간다는 맥락에서 읽혔다면 2000년 들어서는 멸시와 비하의 차원을 넘어선 혐오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의문과 질문들 
증오, 비하, 멸시, 혐오는 서로 비슷한 지점에서 발생한다. 나의 자리를 침법-가능성, 오염-가능성에 기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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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tin Parr, 2001> 



탁월하다는 것에 대해서 요즘 생각해본다. 

차이의 차이, 영원회귀하는 차이, N개의 차이 등등. 

탁월함의 근저에는 '차이있음'에 가닿아있다. 

무언가 다른, 무언가 뛰어난, 무언가 가닿는...

면모를 발휘 할 때 탁월함이 등장한다. 


#상황1

시인을 섭외해야해서 이메일을 한 번 보낸 적이 있었는데 

그 평범한 답장 속의 어휘는 정말 시적으로 탁월했다. 

또 한번은 한글학자를 섭외해야 해서 이메일을 보냈더니 

돌아온 답장 속에서 정갈하고 정확한 어순의 배치를 보고서 탁월함을 느낀 적이있다. 

무릎을 '탁'치게 만드는 탁월한 순간들을 만날 때면 

테크네(techne)와 아르테(arte)가 다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탁월함은 테크네와 아르테가 동시에 발현되었을 때 일어나는 것이다. 


탁월함의 속성으로서의 테크네와 아르테가 있다면 

탁월함이 드러나는 장소, 즉 자리에 따라서 탁월함은 또 다르게 변주된다. 

공적 영역에서 탁월함은  '품위' 속에서 드러난다. 

주변의 것과 어울림 속에서 드러나는 '품위'는 



#한나 아렌트 

인간 실존의 여러 조건에 대해 한나 아렌트는 ‘생물학적 삶 자체, 탄생성과 사멸성, 세계성, 다원성 그리고 지구’라고 지적하고 있다. 아렌트는 이러한 조 건과 한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근본활동으로 노동․작업․행위의 활동 적 삶을 제시하고 그 중에서도 행위의 우월성을 강조한다. 우월한 행위를 통해 인간의 탁월함이 발현될 수 있는 공간은 공적 영역으로, 아렌트는 그러한 공적 영역의 전형으로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를 들고 있다. 폴리스는 경제적으로 얽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 서로 동등한 상황에서 자신의 탁월함을 드러내는 공간이 었으며, 이성적인 말과 정의로운 행위가 드러나는 공간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좋은 사람’의 탁월함은 이상적인 시민의 삶을 전제하고 있다. 

정치적 동물로서의 인간. 

좋은 시민의 탁월함과 좋은 사람의 탁월함은 다를 수 밖에. 

좋은 사람이 좋은 시민이 되는 것.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상향이라고 말한다. 

그가 보기에, 가계 영역의 경제적 필요에 종속 된 사람은 좋은 시민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이 다.27) 앞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에 대해 규정한대로 그가 전제하고 있는 26)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책, p.42. - 18 - 것은 바로 ‘정치적 동물’로 규정된 인간이 자신의 개성을 유감 없이 발휘하 는 것이다. 그러한 정치성이 발현 가능한 공간은 종속된 관계로 고착된 가 계 영역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이 주어진 폴리스인 것이다.  물론 좋은 시민 탁월함과 좋은 사람의 탁월함은 다르다. 그리고 좋은 사람이면서 좋은 시민이 아닌 경우도 있다. 또한 나쁜 사람이 좋은 시민인 경우도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사 람이 좋은 시민일 수 있을 때가 가장 이상적인 경우이며 최선의 국가에서 그러한 경우가 가능하 다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위의 책, p.158.


-니체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 1장 "선과 악, 좋음과 나쁨"의 장에서  

노예의 도덕에서는 선함과 악함이 그 가치기준이 되고 

주인의 도덕에서는 탁월함과 열등함이 그 가치기준이 된다고 보고있다. 

희대의 썅놈으로 불리는 로대제국의 황제 카이사르를 주인의 도덕의 가치로 평가하며 

엄지손가락 희번덕스럽게 치켜세우는 니체의 모습에 약간은 어리둥절 해진다.  



-미생

드라마 <미생>에서 장그래의 초반 모습을 떠올려 본다. 

아무도 일을 시키지 않는 사무실. 그 곳에서 장그래는 온갖 잡무들을 

묵묵히 수행해가면서 폴더트리를 만들어보기도 하고, 잡문들을 고치기도 한다. 

그 시간, 자신의 탁월함을 만들어야 할 시간이었을 것이다. 


-플라톤 

플라톤이 말하는 탁월함arte는 조금 다른 차원이긴 하다. 


-신형철 

나는 누군가에게 경이롭도록 영웅적인 행위를 할 수도 있고, 내게 일어나는 경이로운 일을 체험할 수도 있다. 그 일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물음은 신들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하는 물음과 같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아레테(arete) 개념, 즉 삶에서의 탁월성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 호메로스 세계에서의 탁월성이란 결정적으로 감사와 경외의 느낌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다."(115쪽) 그렇게 신들에게 감사할 때 삶은 성스러워진다. 이와 같은 상태를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삶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은 애초에 떠오를 수조차 없을 것이다. 

요컨대 그리스적 삶의 핵심은 이것이다. 그들은 하이데거적인 의미에서 '퓌시스', 즉 '성스러움이 출현하는 순간'을 경험했고 그것에 자신을 겸허하게 내맡기면서 '아레테'의 상태, 즉 의미로 충만한 탁월한 삶의 상태 속에 머무를 수 있었다는 것. '퓌시스'와 '아레테'의 삶, 저자들이 말한 제3의 길은 결국 이 두 단어로 요약될 수 있다. 

"호메로스가 그려낸 올림포스의 신들은 그리스인들에게 성스러움에 대한 감각을 부여해준다. 진정으로 의미 있는 실존의 기쁨과 슬픔을 보증해주는 성스러움 말이다. 이 호메로스의 신들을 다시 불러내는 것이야말로 신이 죽은 이 시대에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다. 그것이야말로 일신주의의 몰락에서 우리를 살아남게 하는 방법이며, 허무주의적인 실존으로 추락하는 것을 막아주는 방법이다."(114쪽)



-아레테

고대 그리스 시대에 인간의 탁월성은 "아레테"(arete)라는 말로 표현했다.

 "아레테"는 "간청하다"(araomai)라는 동사에서 왔다고 한다. 

"즉 아레테는 인간이 스스로 이룰 수 있는 자질이 아니라, 어떤 실천적 상황을 해결하려고 할 때 신에게 청함으로써 가질 수 있는 능력이었다는 얘기다. 인간을 벗어난 초월적이고 전체적인 차원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레테"는 "virtue"보다 동양의 "덕"에 더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고대 그리스인에게 "아레테"는 반드시 "감사"와 짝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기도 했다. 아레테를 이룬 사람의 적절한 반응은 신께 감사하는 것이다. 동양의 "덕"이 반드시 "겸양"과 짝을 이루듯이 말이다. 이런 감사와 겸양의 태도에는 인간을 한계적인 존재로 보고, 더 큰 세상의 원리에 복속해야 한다는 세계관이 깔려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는 "덕"을 인간적 노력을 통해 이룰 수 있는 것이라고 흔히 생각한다. 서양의 virtue 이건 동양의 德 이건, 개인의 지혜와 실천을 통해 탁월함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선택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선택의 순간마다 나 자신이 가진 가치와 지혜에 의해 선택하고, 그 선택을 끝까지 책임지는 실천이 덕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고대의 아레테를 현대의 언어로 옮길 수도 있다. 신에게 청한다는 말은 곧 내 외부의 의미들을 간절히 원하고 몰입하고 받아들인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가족들에게 맛있는 저녁식사를 내놓기 위해 꼼꼼히 장을 보면서 맛을 뽑아내기 위해 신선한 재료들을 간절히 찾아내는 주부처럼 말이다. 그 주부는 그런 방식으로 시작해서, 불의 성질과 삶고 지지는 시간과 양념의 자질을 하나하나 얻어내서 마침내 요리의 아레테를 이룬다. 주부가 다행히 온 가족을 행복하게 하는 요리를 완성해서 내놓았다면, 그가 느끼는 마음은 감사와 행복감이다. 그것은 내가 만들어낸 무슨 가치이거나, 나의 내면적 원천에서 영웅적으로 솟아난 위대한 의미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세상에 밀착해서 살아가는 사람의 간절한 관심이해(interest)에 대하여 세상이 내려준 축복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경험을 일상에서 늘 갈고 닦은 사람들은 모든 삶의 순간에서 경이와 행복을 발견할 수 있는 예술가가 된다. 자기 확신에 빠져 모든 의미의 생성을 자기에게서 찾는, 일명 "재수없는" 인간이 되지 않는 법, 그리고 그와 반대로 모든 의미의 원천을 신이나 타인에게 맡겨버리는 나약하고 무력한 수용자가 되지 않는 법, 이러한 중간의 길도 우리에게는 충분히 주어져 있다." 

새벽에 눈을 떠서는, 최근 회사에서 만든 책을 다시 한 번 읽다가 또 공감의 마음을 못 참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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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로 남지 마세요”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강연 전문

원문링크: http://www.eroun.net/43377


혼자로 남지 마세요”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강연 전문

_이로운넷 공동대표이사/머니투데이 경제부 차장 | 2014/06/03 | 살림살이


  • 가장 중요한 액션은 인식 변화
  • 우리가 무엇을 원하지 않으며 무엇을 원하는 지 명확하게 말할 줄 알아야
  • 개인으로 남지 않고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주변 사람들과 모여야
  • 서로가 서로를 지지하고 정신적으로 지원하고 도와주면서 기쁨 만들어야 
  • 현재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이해하고 변화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자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사진제공=하자센터.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사진제공=하자센터.

     

우리가 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해서,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서 활동들을 할 때 도대체 우리가 스스로 무엇으로부터 보호하는지 확실히 하지 않곤 합니다. 우리는 (민주주의와 자연을) 다른 사람이나 다른 사람의 욕심보다도 비인간적인 제도로부터 보호해야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경제를 잘 알아야합니다. 그래야 핵심적인 문제인 ‘비인간적 제도’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언어학자로 한 마을에 갔다가 환경운동가가 된 사람, 1992년 발간 이후 전 세계 50여개 언어로 번역된 책 <오래된 미래>의 저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Helena Norberg-Hodge)가 이번 한국 강연에서 한 말입니다. 

5월 30일 하자센터에서 열린 강연&토론회 “세계화에 맞선 지역화 그리고 세상을 아끼는 사람들의 연대”에서 호지는 내가 필요한 것이 내가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다 있는, 그런 미래를 꿈꾼다고 말했습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지금은 프랑스와 미국을 오가고 부재중 전화도 많이 오는 삶을 살게 되었지만 말이죠. 

호지에 대해 조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1975년 방언 연구를 위해 라다크(인도 잠무 카슈미르 주의 히말라야 산맥 북서부와 라다크 산맥 사이에 있는 지역)에 간 그는 인도정부의 개방 이후 서구 문화와 가치관에 의해 파괴되어가고 있는 마을을 보게 됩니다.  거기서 그는 언어가 아니라 사람과 마을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죠.

그래서 세운 것이 ‘국제생태문화협회(ISEC)’.  그는 이 단체를 통해‘라다크 프로젝트(Ladakh Project)’를 시작합니다.  생태의 다양성과 공동체를 강화하는 프로그램으로 특히 지역식품과 농업을 살리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죠. ‘라다크 프로젝트’는 1986년 대안적 노벨상으로 불리는 ‘바른생활상(Right Livelihood Award)’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이번 강연&토론회에서는 김은진 원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한국의 상황과 문제를 공유하고 토론했습니다. 김 교수는 <유전 조작 밥상을 치워라> <세상을 담은 밥 한 그릇>(공저) 등 국내 농업과 먹거리 안전 문제에 대한 책을 낸 저자이기도 합니다. 하자센터의 도움을 얻어 이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 통역=이진아/속기 제공=하자센터 / 편집=이경숙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Helena Norberg-Hodge) 강연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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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나. 사진제공=하자센터

오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에 다시 와서 기쁘고 특히 하자센터에 와서 더 기쁩니다. 얘기하고 싶은 건 많은데 시간이 모자라서, 그것들 중 일부분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보통은 제가 전체적인 그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요. 그것을 짧은 시간 동안 이야기하다보면 구체적인 이야기를 못하게 됩니다. 40년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하게 되는데요, 그게 개인적 경험이 아니라 45개의 언어로 번역된 <오래된 미래>를 생각하며 45개의 문화를 대표해서 이야기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몽골, 미국, 버마, 동유럽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은 ‘당신이 하는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라다크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라고 입을 모아 이야기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다보면 저는 힘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보통 미디어에서 접하는 이야기와 다른, 정말 희망적인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심지어 학계에서 하는 이야기와 다른 희망적 이야기입니다.

그걸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은 원래 욕심이 많은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욕심많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렇게 여행을 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한가지 떠오르는 것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변화를 위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게 되고 조사해보게 되면 다양한 분야에서 -예를 들면 주변의 공원을 보호하는 활동이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지원하는 등의 굉장히 다양한 활동들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미국 같은 국가에서 이런 작은 변화와 활동들을 하는 사람들의 숫자와 이런 활동들의 후원금을 살펴보면 미디어에서 말하는 숫자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좀 더 건강한 세상을 위해서, 좀 더 행복한 세상을 위해서는 우리는 경제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 하구요, 제도적인 변화도 따라야합니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해서,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서 활동들을 할 때 도대체 우리가 스스로 무엇으로부터 보호하는지 확실히 하지 않는데, 다른 사람이나 다른 사람의 욕심보다도 비인간적인 제도로부터 보호해야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경제를 잘 알아야합니다. 그래야 핵심적인 문제인 ‘비인간적 제도’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좋은 소식 하나는, 제가 여행하는 과정에서 이런 경제적 제도의 변화가 일어나는 곳에서는 소규모로 바뀌는 곳, 인간이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볼 수 있는 곳에서는 서로 협동하고 자연과 협동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고 생각보다 많은 장소에서 목격됩니다.

전에 한국에 왔을 때도 이야기했는데, 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서 제도의 변화를 이야기할 때 영국에서 새들을 보호하기 위한 변화를 예로 들곤 합니다.

영국에서 새를 사랑해서 보호하고 싶은 사람들이 새를 관찰하고 새를 위한 환경을 만들면서 교육적 캠페인을 벌이면서 문제를 파악하게 됩니다. 화학비료 때문에 새들이 죽어가는 것이었는데 이것을 통해서 화학비료가 매매되는 시장과 그 국제적 규모까지 들여다보게 될 때 문제를 정확히 파악합니다. 이것이 경제적 관점에서의 리터러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게 단순히 상업적 농업에만 집중하는 게 부족합니다.

영국 또는 많은 정부는 규제완화를 위해서 다국적 기업들을 지원하고 WTO 등을 통해서 생산량은 엄청나게 늘어나는데 그것은 또 새에게 영향을 끼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새에서 산업적인 농업으로 포커스가 옮겨가고 WTO를 보게 되는데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보아야할 것은 로컬에서, 소규모 농장들로부터 구입하는 것이 새들을 구하는 중요한 활동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인식변화가 필요했습니다.

여기있는 많은 사람들은 로컬푸드의 혜택에 대해서 많이들 알고 계시겠지만, 하지만 이 로컬푸드의 다양한 많은 혜택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면 우리는 정부에 대해 무언가 요구할 수 있게 됩니다. 정말 우리가 이야기해야하는 것은, 길거리에서 알리고 다녀야 할 것은 다양한 소규모농장에서 생산하는 음식들이 사실은 엄청난 양이라는 것을 알려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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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브랜드. 사진=사용권저작자표시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 estenh님이 일부 권리를 보유함

혹시 영국코미디언인 러셀 브랜드(Russell Brand, 페이스북 가기)를 알고계신가요? 이 사람은 인터넷에서 유명한 사람이고 현재 책도 집필 중입니다. 러셀과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는데 그가 책에 꼭 넣고 싶어하는 메시지는 다양한 종을 키우는 소규모 농장들이 굉장히 많다는 사실입니다.

또 하나의 좋은 소식은, 유엔보고서인데요. 2013년에 나온 <더 늦기 전에 깨어나세요(Wake up before it’s too late)>라는 제목의 보고서인데 놀라운 사실은 보고서에서 소규모 유기농 농장들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고 WTO 같은 국제 통상 조약들이 얼마나 위험하며 때문에 우리는 그 반대방향으로 가야한다는 내용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산업화된 국가들의 청년들을 본다면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컴퓨터 앞에서 앉아있는 직장보다는 재밌게 몸으로 일하는 농장들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최근 <뉴욕타임즈>에서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일했던 사람의 인터뷰가 있습니다.‘미래는 지역에 있다’라는 인터뷰였는데 이처럼 지난 40~50년간 이러한 연구와 일을 해온 저는 큰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런 변화들에 대해서, 지역화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국적 기업, 대기업들은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지역화에 대해 왜곡하려 합니다. 월마트나 HSBC도 알고 있으면서 지역화를 왜곡시키려합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액션은 인식 변화입니다. 로컬이란 무엇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다양한 방법들이 있습니다. 책, 음악, 영화 심지어 만화책까지도요.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합니다.

이런 변화들은 다양한 사례가 있습니다. 뉴욕에서 ‘월스리트를 점령하라’ (Occupy Wall street) 운동이 있었을 때 맨해튼의 70%의 사람들은 이 운동을 지지했습니다. 이 운동이 경찰 등의 개입으로 끝나게 되고 사람들은 쉽게 우울하고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반복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은 변화를 원하고 그걸 위한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Beppe Grillo. 이탈리아의 코메디언이자 배우, 블로거. 5성 운동을 시작했다. 사진=사용권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Niccolò Caranti님이 일부 권리를 보유함

Beppe Grillo. 이탈리아의 코메디언이자 배우, 블로거. 5성 운동을 시작했다. 사진=사용권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Niccolò Caranti님이 일부 권리를 보유함

하나의 재밌는 운동은 이탈리아의 ’5성 운동(5 star Movement)’입니다. 혹시 알고 계신가요?  (편집자 주. 이탈리아판 ‘최효성’이라 할 수 있는 코미디언 출신 정치인 그릴로가 이끄는 정치운동. 물-환경-교통-개발-인터넷 등 5개 별을 개혁해야 민생이 개혁된다고 주장. 관련기사 보기)

하지만 희망적인 것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우리가 아는 것보다 많은 운동들이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모르는 이유는 대기업이 쥐고 있는 미디어에서 이러한 사실을 노출시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기업에 집중된 규제 완화등의 제도적 구조가 버티고 있음에도 사실은 엄청나게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중입니다.

이탈리아의 5성운동은 2006년에 시작되었는데 한 명이 시작한 운동이 900만 명이 함께하는 운동으로 바뀌었습니다. (편집자주. 선거 당시 정치권에서 상당한 의석을 차지.) 그들의 공통적인 정서는 정치는 썩어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사실 정부는 소규모 그룹보다는 대규모 기업에 모든 지원을 쏟습니다.

이 다음에 이 운동이 본 것은 어떤 제도를 우리가 원하고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아직까지 명확한 요구를 정리하진 않았지만 운동은 다음 단계로서 경제적 제도 변화에 대해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5성운동에서의 두 가지 포인트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이 운동이 어떻게 단기간에 성장하였는가 하는 겁니다. 이 그룹은 인터넷을 사용하였고 그것을 통해 소통하면서 지역적인 정치 운동이 가능하였고 관련된 모임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단체의 대표는 별다른 미디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이 운동의 성장 원동력은 지역적 모임들이었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 우리가 정말 명확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원하지 않으며 무엇을 원하는 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필요하고, 정말 많이 공부해서 이것에 대해 명확하게 말할 줄 알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싫은 것이어도 정말 다양한 NO가 필요하고 반대의 경우도 다양한 YES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대규모 운동을 만드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운동은 하나의 캠프, 또 다른 캠프를 만들고 통합된 반대를 만들었는데 우리는 각자의 특별함을 가지고 있고 계속 변합니다. 기존의 위에서 아래의 시스템이 아니라-자본주의는 다양한 시스템들을 무시하고 있는데 삶을 지지하는 다양성들을 잘 지켜나가야 합니다.

저는 전통적인 라다크 사회를 볼 수 있게 되어서,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굉장히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라다크의 한명 한명의 삶은 특별하고 영적이었습니다. 매일 다른 삶을 살았고 그것은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것을 되찾아야하는데 현대문명에서 우리는 편리함을 추구하며 이것을 읽었고 이제는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잘 보아야합니다.

제가 노래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인데요. 노래 제목은 ‘걸어갈 수 있는 미래(Walking distant future)’입니다. 내가 필요한 것이 내가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다 있는, 그런 미래를 꿈꿉니다. 이 노래를 꿈꾸면서 라다크를 경험한 이후에 저는 프랑스, 미국도 가고 부재중 통화도 많이 걸려오는 삶을 살게 되었지만, 이런 효율적이고 편리한 삶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비효율적이고 불편한 삶이 행복합니다.

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세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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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나. 사진제공=하자센터

첫째, 개인으로 남지 않고 혼자로 남지 않고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주변의 사람들과 소규모 그룹을 만들어야합니다. 가까운 친구나 가족 말고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을 찾아서 함께 해야 합니다. 

둘째, 새로운 문화를 만드려는 노력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지지하고 정신적으로 지원하고 도와주면서 기쁨을 만드는 겁니다. 즐거운 삶을 사는 건데요. 등산을 같이 갈 수도 있고 요리를 할 수도 있고 노래를 부를 수도 있습니다.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모든 문화에서 했지만 우리가 잊고 사는 것인데요. 같이 노래하고 춤을 추며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새로운 문화를 찾는 것입니다.

지금 지배적인 제도와 완전 반대로 가서-현재의 제도는 사람들을 외롭게 하며 자신감을 없애는데 그 반대로 우리는 서로를 두렵게 하는 것을 없애고 지지하며 살아야합니다. 그랬을 때 삶은 영적인 것이 됩니다.

세번째 단계는 현재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긍정적 변화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아야 합니다. 두 가지가 있는데요, 대규모의 시민운동을 일으키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아야 하며 지역화를 위한 운동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아야 합니다.

이 지역화 운동에 있어서 단순히 내가 개인소비자로서 협동조합에 가서 소비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의 로컬푸드를 어떻게 지원할 수 있는지, 지역농장의 농부들을 어떻게 지원할 수 있을지까지 갈 수 있어야합니다.

미국의 경우에 소규모 농장들이 모여서 협의체가 생기며 지역의 경제를 위해서 소규모 금융도 만들어지는 등 지역의 제도적 변화를 만들어 가야합니다.

이러한 지역화를 저는 ‘행복의 경제학’이라고 부르고 있고, 이러한 것이 인간적으로, 생태적으로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 감사하구요, 통역자인 이진아씨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사회자(황윤옥 하자센터 부센터장): 감사합니다. 속도와 시간에 구애받지 말자고 열심히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속도와 시간을 열심히 챙겨야하는 사회자는 좀 재미가 없기도 해요. 원래 조금 더 길게 이야기를 나눠주실 수도 있었는데 제가 앞에 앉아서 조금씩 시간을 챙겨가면서 주어진 시간 내에 맞추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께 이따가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가졌으면 했어서 그랬던 것이구요. 이어서 김은진 원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님의 우리나라 이야기를 들어보려 합니다. 헬레나 선생님께는 세계화라는 분명히 NO라고 해야 할 것에 어떻게 함께해야할지, 지역화라는 다양한 YES가 어떻게 존재해야 되는지, 또 우리가 무엇을 해야할 지를 들었다면 김은진 선생님으로부터는 한국의 상황, 토종씨앗, 텃밭 등 실제로 우리의 삶과 한국에서의 지역화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듣겠습니다.


어둠에 관한 소론

어둠의 질감, 어둠의 깊이, 어둠의 고도, 어둠의 시차, 어둠의 시간 등등 


어둠은 그 의미를 변곡하면서 드러낸다. 어둠의 농도 그 속에서 나는 쓴다. 


그 장소를 떠나기 위해 나는 쓴다. 






# 김광석/ 일어나 

" 어둠 한 가운데 서있어 /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어디로 가야하나 어디에 있을까/ 둘러봐도 소용없겠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눈 앞이 캄캄함. 어디를 둘러봐도 별 소용없는 어둠. 

길은 보이지 않고 인간 앞에 드러선 막연한 압도감. 무엇을 해볼 엄두도 나지 않을 정도의 부정의 압도감. 

그 어둠의 한 가운데. 희망이 지워진 자리에 절망으로만 남은 이들. 앞(미래)을 내려다 볼 수 없는 불안함이 

'낙담'한 채로 어둠 속에 있거나 '성급'하게 어둠을 헤쳐나가려고 신기루의 희망을 만들어 내거나. 

어둠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겨우 이거 뿐인가. 




#원피스 /어둠어둠 열매 

"어둠이란 곧 인력. 한 줄기 빛 마저도 놓치지 않는, 모든 것을 끌어당기는 힘" 


-끌어당기는 힘. 원피스 마샬 D 티치의 능력은 어둠어둠열매다. 

모든 것을 끌어당기는, 놓치지 않는 힘. 

어둠은 끓어당긴다. 두려움과 좌절과 절망들을 증폭시킨다. 
긍정의 요소들마저도 끓어다 놓는다. 모든 것을 폐허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는 것. 
그 압도감. 죄와 원한의 감정. 어둠은 단지 볼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정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끌어당김으로서 어둠은 존재하는 것이다.  




# 이계삼/ 교육의 불가능성

" 선생님의 어둠에 대하여. 결국은 불행함에 대하여. 선생님의 글을 읽을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었지요. 사람은 아는 만큼 비극적인 것인가? 그렇다면 지금의 내 행복은 무지의 선물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지금 내가 느끼는 이 행복감의 실체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 


-불행함. 불행감. 어둠은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불-가능성, 불-행함과 같이 말이다. 

 [각주:1]은 모든 것을 부정(아님)으로 변환시킨다. 이 글짜가 가지고 있는 언어적 질감이 어둠과 흡사하다. 

 부정의 블록(접두사)으로 어떤 단어나 글짜에 내려와 앉아 있는 것이 그렇다. 

 '不' 한 것들. 괴롭히고 빼앗은 不한당의 어미가 아닐까. 




#니체 /아침놀 

"이 사람은 구멍을 뚫고, 파내고, 파 엎는 일을 하고 있다. 그와 같이 깊은 곳에서 작업하는 모습을 보는 안목이 있다면, 그가 오랫동안 빛과 공기를 맛보지도 못하고 고생을 거의 입 밖에 내지도 않으면서, 얼마나 천천히 신중하게, 또 온화하지만 가차없이 전진해 가는 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암흑 속에서 그는 만족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어떤 신념이 그를 인도하고, 어떤 위로가 그 노력의 보상이 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은가?  어쩌면 그는 자기가 결국 무엇에 도달할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즉 자신의 아침, 자신의 구원, 자신의 아침놀에 도달하게 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긴 암흑, 그 이해하기 어렵고 비밀스럽고 수수께끼같은 것을 감수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틀림없이 그는 돌아온다." 


-니체는 김광석의 어둠과는 달리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이다. 어둠 속에서 작업을 하는 사람이다. 

어둠 속에서 한탄과 절망에 압도되어 있지 않다. 천천히, 신중하게, 온화하게, 대담하게 어둠 속에서 작업을 벌인다. 

그 암흑 속에서 그 어떤 위로와 보상도 없지만 니체는 알고 있다. 이 어둠 속에서 작업(사유)한다는 것은 결국 

구원과 맞닿아있다는 것에 대해서. 결국 도달하게 될 것이라는 것. 긍정의 긍정의 사유. 비밀스럽고 수수께기같은 

어둠 속에 구멍을 뚫고, 패내고, 파엎으며 그가 도달하려고 했던 구원과 해방의 루트. 결국 어둠의 잠수사, 어둠의 탄광 속에서 

그는 끊임없이 구멍을 뚫고 있는 현재, 지금, 그 과정 전체. 그것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선우 / 옆

"땅 밑 어둠속/ 옆에서 옆으로 번져간 뿌리줄기/ 자기 옆의 슬픔에 가만히 기댄 듯한, // 꽃을 본 적 없는데 꽃의 향내를 품게 된 내 캄캄한 당신의 옆" 


-땅 밑. 옆으로 옆으로 버져가는 뿌리(리좀)들. 땅 밑의 캄캄한 어둠 속에서 

 지상에 도래할 꽃의 향을 맡을 수 있는 그 옆자리. 니체가 어둠 속에서 사유하는 자라면 

 김선우는 어둠 속에서 향을 맡는다. 도래한다는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미래'와는 

 다른 것이다. 아직 꽃을 피지 않았지만 나는 냄새가 아니라 이미 꽃을 피기 시작했지만 

 아직 꽃이 피지 않은 때 이다. 꽃의 냄새는 미래(아직 오지 않은)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도래(이미 와있고 아직 피지 않은)하고 있는 향을 땅 밑 어둠속에서 바로 "당신의 옆" 자리에서 

 도래할 꽃의 향을 맡고 있다. 바로, 옆에서. 





아직 나는 어둠 속(김광석)에 있다. 

가끔은 그 압도감(어둠어둠열매)에 휩쓸려 우.두.커.니 한다. 

모든 감각과 사유들 앞에 不'(교육불가능성)이 붙으면서 게을러진다. 

그 어둠 속에서 천천히,신중히 공부하고 글을 쓰며 온화하고, 대담하게(아침놀) 어둠 속에서 기거한다. 

그러다보면 어느 덧 그 어둠 속에 뿌리를 내리고 아직 캄캄하지만 이미 피어나고 있는 꽃(옆)이 피어나고 있음을. 

거대한 희망, 즐거운 희망을 품기보다 이 어둠을 한 발자국씩 걸어가고 있는 

힘찬 두 다리, 번쩍이는 눈빛, 날으는 두 팔, 기울여듣는 귀의 체력을 키워나가는 일. 

그것이 마침내 도달(도래)할 아침놀을 맞이 할 수 있는 어둠-생활자의 필살기가 되어가기를 바래본다. 





<Antoine D’Agata>


  1. 접두사 ‘불-’은 ‘아님, 아니함, 어긋남’의 뜻을 더하는 접두 사로, ‘불가능’, ‘불경기’, ‘불공정’, ‘불규칙’, ‘불균형’, ‘불명예’, ‘불완전’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어떤 것을 부정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접두 사이다. 그러나 위에서 논의한 접두사 ‘반-’이나 ‘비-’가 비교적 그 용법이 분명하고 한정적임에 반해, 접두사 ‘불-’은 그 쓰임새가 상대 적으로 보다 다양하다. 즉, ‘반-’은 주로 반대 관계를 나타낼 때 사 용되고, ‘비-’는 주로 모순 관계를 나타낼 때 사용되나, 접두사 ‘불-’ 은 이 양자 모두에 두루 사용된다. ‘불경기’와 ‘호경기’ 그리고 ‘명예’ 와 ‘불명예’는 반대 관계이나, ‘불가능’과 ‘가능’ 그리고 ‘불규칙’과 ‘규 칙’은 모순 관계이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접두사 ‘미(未)-’의 용법은 그 사 용이 분명해 같은 계열의 다른 접두사들과 혼동의 여지가 없고 ‘불 (不)-’의 용법은 애매모호하여 맥락에 따라 그 의미를 따져보아야 함 을 알 수 있다. 이제 이것들과 같은 계열에 속하면서도 그 사용에 있 어 서로 혼동의 여지가 많은 ‘비(非)-’, ‘반(反)-’, ‘무(無)-’, 사이의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를 살펴보자. 이 과정에서 우 리는 새로운 부정 접두사 ‘항(抗)-’을 도입하게 될 것이다. -부정 관계에 관한 철학적 소고 /김 영 정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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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 보다 높은 인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보다 높은 인간 303p-314p> 


#3 

"인간을 내가 사랑할 수 있느 것은 인간이 하나의 과정이며 하나의 몰락이라는 점이다." 

"그대들이 절망하고 있는 것에는 존경할 만한 것이 많다. 왜냐하면 그대들은 

고분고분 순종한느 법과 함께 여러 가지 작은 잔꾀를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복족하기 보다는 절망하라! 그리고 진실로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그대들이 오늘날 

어떻게 사는가를 모르기 때문에 나는 그대들을 사랑한다. 그대들이야 말로 가장 훌륭한 삶을 산다." 


#4 

"그대들은 용기가 있는가? 오, 형제들이여! 그대들은 용감한가?독수리의 용기를 가지고 있는가? 

 용감한 자란 공포를 알면서도 그 공포를 정복하는 자다. 심연을 보고도 뒷걸음질치지 않는 자다.

 독수리의 눈으로 심연을 바라보는 자, 독수리의 발톰으로 심연을 움켜쥐는 자야말로 정말 용기 있는 자다." 


#5 

"모든 말이 누구의 입에나 어울리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미묘하고 심원한 것이다. 양의 발톱으로는 그것을 움켜쥘 수 없다." 


#6 

"나는 그대들의 행로가 더욱더 험악해지기를 바란다. 그렇게 되어야만, 그렇게 되어야만 

인간은 번갯불이 그들을 후려치고 그들을 때려부술 정도로 높은 곳까지 자라날 수 있다. 

나의 마음과 동경은 예사롭지 않은 것, 오래된 것, 먼것에 있다. 내가 보기에 그대들은 아직도 

괴로움이 부족한 사람들이다. 그대들은 자신에 댛서만 괴로워하고 있을 뿐 인간에 대해서는 괴로워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7 

"나는 이들 오늘날의 인간에 대해서 빛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 

빛이라고 불리고 싶지도 않다. 나는 '이들'을 눈멀게 하고 싶다. 

나의 지혜의 번개여! 그들의 눈을 후벼 파내라! 


#8 

그대들의 능력 이상의 것을 바라지 마라. 능력 이상의 것을 바라는 자 주위에는 사악한 속임수가 떠돌게 마련이다.

오늘날 나에게 정직보다 소중하고 쉬한 것은 없다." 


#10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를 원한다면, 자신의 발로 올라가라! 남의 힘으로 올라가서는 안되고, 

남의 등에 타지도 말고 남의 머리에도 올라타지 마라. 그런데로 그대는 말을 타고 가려 하는가? 

그렇게 하면 그대의 목표를 향해 빨리 올라갈 수 있는가? 좋다, 나의 친구여! 그대의 약한 다리도 그대와 함께 

말을 타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목적이에 도달하면 말에서 뛰어내리리라. 그대, 보다 높은 사람이여! 바로 그 때 

높은 곳에서 그대의 다리는 걸려 넘어질 것이다. 


#11 

"그대들의 이웃은 도대체 누구인가? 그대들이 이웃을 위해서 행동한 적은 있겠지만 '이웃을 위해서' 잉태한 일은 없다. 

그대, 창조하는 사람들여! 이 '위해서'를 잊어버려라. 그대들의 덕은 '위해서'라든가 '때문에'라든가 '이유로' 등과 

무관하기를 바란다. 그대들은 거짓투성이인 쓸모없는 말에 대해서는 귀를 막아 버려야 한다. 

이 '이웃을 위해서'는 소인대들의 덕일 뿐이다. … 그대들의 일, 그대들의 의지야말로 그대들에게 가장 가까운 '이웃'이다. " 


#14 

그대,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그대들이 도약에 실패한 호랑이처럼 수줍고 부끄럽고 어색해져 남몰래 옆길로 도망치는 것을 

나는 자주 보았다. 그대들은 주사위를 잘못 던졌던 것이다. 그대, 도박자들여! 그런 실패가 대체 어떻다는 말인가? 그대들은 

도박하는 자와 비웃자 자로서의 태도를 배우지 않았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의 거대한 도박과 비웃음의 책상에 붙어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대들이 큰일을 하다가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그대들 자신이 실패한 것인가? 또 그대들 자신이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실패했다는 것인가? 인간이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좋다! 자!" 


#15 

보다 높은 종에 속하면 속할 수록 성공률이 낮은 법이다. 그대들, 보다 높은 사람들이여! 그대들이 모두 완성된 자는 아니지 않은가? 

용기를 일지 마라! 그런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가능한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대들은 자신에게 비웃음을 던지는 법을 배워라. 

그대들이 불충분하게 만들어졌거나 절반만 만들어진 부족한 인간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대들, 반쯤 부서진 인간들이여! 그대들 안에서 인간의 미래가 몸부림치고 있지 않은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먼 것, 가장 깊은 것, 별처럼 높은 것, 거대한 힘들은 그대들의 항하리 속에서 서로 부딪히며 

거품을 일으키고 있지 않은가? 수많은 항아리가 깨지는 일은 당연하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듯 그대 자신들을 

비웃은 법을 배워라! 그대,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가느한 일들이 아직도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진실로 얼마나 많은 일들이 벌써 훌륭하게 이루어져 있는가! 이 대지는 작으면서도 훌륭하고 완전한 것, 제대로 된 것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 그대들 주위에 작지만 훌륭하고 완전한 것들을 아주 많이 놓아 두도록 하라! 

황금빛으로 무르익은 모습은 마음의 병을 치료해준다. 완전한 것들은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우리를 위로한다. 


#17 

훌륭한 일들은 모두 우회해서 목적지를 향해 접근해 온다. 그것은 고양이 처럼 등을 구분린 채 

가까워지는 행복을 바라보며 목청을 돋운다. 모든 훌륭한 것들은 웃게 마련이다. 사람이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 

어떤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나의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목저거지가 가까워지면 춤을 춘다. 

나는 동상이 되지는 않았다. 나는 또 기둥처럼 단단하게, 돌처럼 둥글게 서 있지는 않다. 나는 질주를 즐긴다. 

지상에 늪과 함께 깊은 슬픔의 수렁이 있다 하더라도 가벼운 다리를 가진자는 진흙탕을 뛰어넘어 

얼음판 위에서 춤추는 것 처럼 가볍게 춤춘다. 형제들이여! 그대들의 가슴을 높여라, 높이, 더 높이! 

그리고 그대들의 다리도 잊어버리지 마라, 춤 잘 추는 자들이여! 그대들의 다리고 들어올려라. 더 좋은 방법은 거꾸로 

서는 것이다! 


#19 

"불행한 나머지 바보가 되는 것 보다는 행복한 나머지 바보가 되는 것이 차라리 낫다. 절뚝거리며 걷는 것보다는 

잘 추지는 못하지만 춤추는 편이 차라리 낫다. … 그대들은 그대들의 다리로 춤추는 것을 배우도록 하라. 

슬픔의 피리를 이제 그만 불고, 천한 자들처럼 슬픔에 젖는 일을 떨쳐버려라! 오, 오늘날 천한 자들의 어릿광대는 얼마나 

슬프게 보이는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은 천한자들의 시대인 것이다. 


#20 

"쓸데없는 잡념투성이 머리, 시들어 버린 잎과 잡초들에게 적의를 품는 억세고 자유롭고 좋은 정신을 찬미하라. 

그것은 늪고 슬픔의 수렁 위에서도 푸른 잔디 위에서 춤추는 것처럼 춤춘다. 말라빠진 개들과 잘못 된 음산한 족속을 

증오하는 이 정신, 온갖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에 깃든 이 정신을 찬미하라. 그것은 비관론자와 궤양 환자들의 짓무른 눈 속에 

먼지를 불어넣는 웃음의 폭풍이다. 그대, 보다 높은 사람이여! 그대들에게 가장 나쁜 것은 그대들 모두가 춤추는 것을 

배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대들은 마땅히 배웠어야 했는데도 그대 자신을 뛰어넘어 춤추는 것을 배우지 않았다. 

그대들의 불충분한 미완성품이라 해도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 

얼마나 많은 일이 아직도 가능한지 모른다. 그러니 그대들 자신을 뛰어넘어 웃는 방법을 배워라! 그대들의 가슴을 높이 들어라! 

높이, 더 높이! 춤 잘 추는 자여, 잘 웃는 것도 잊지 말도록 하라! 

비웃는 자의 왕관, 장미꽃으로 장식된 왕관. 형제들이여, 나는 이 왕관을 그대들에게 던져주리라. 나는 웃음을 신성이라고 선언했다. 

그대, 보다 높은 사람들이여! 웃는 것은 꼭 배워라!"  





우리는 연결 될 수록 강하다


<David Hurn, 1978> 



"우리는 연결 될 수록 강하다."


이번 코리아퀴어축제에 갔다가 본 슬로건인데 

이 짧고 단순한 문장이 눈에 콱하고 들어왔다. 


연대와 연합에 대해서 가끔씩 생각해보고 한다. 

연대solidarity帶, 연합 unite合에 일단 '연'자의 글짜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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