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에 관한 소론


<Olivia Arthur, 2012> 



(박남희 <혐오의 혐오? 여성혐오에 분노하기> 수유너머N 토론회 발제문 발췌 및 정리) 


'개'라는 접두사를 표현한 말들을 많이 쓴다. 

개좋아, 개싫어, 개짱나 등등. 이 정도 표현은 과장법으로 봐줄만 하다. 

그런데 개독교, 개보녀, 개저씨 등등. 이런 과격한 표현들. 

어느덧 나도 꼰대가 되어서 그래서?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일까. 

이러한 과격함이 향하는 곳은 다소 분명해 보인다. 

모로오카 야스코의 <증오하는 입>에서는 일본 재일한국인에 대한 혐오발언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혐오발언이란 넓게는 인종, 민족, 국적, 성별, 성적 지향 등의 속성을 갖는 소수자 집단이나 개인에게 

그 곳 속성을 이유로 가하는 차별 표현"이다. 그리고 혐오 발언의 본질은 소수자에 대한 '차별, 적대, 폭력의 선동' 

'차별을 선동하는 모든 행위'이자 표현에 의한 폭력, 공격, 박해이다. (모로오카, 2015:84)

 

과격한 표현이 등장하지 않더라도 사회적 약자에게 그들이 갖는 속성을 근거로 가하는 차별을 확대시키는 표현들은 

차별구조에 공모하는 문장 자체가 소수자에게 가하는 폭력이기 때문에 심각해지는 것이다. 


감정은 그저 개인들의 내적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 간의 관계 속에 그리고 개인과 그들의 사회적 상황 간의 

상호작용 속에 존재하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사회적 조건이 감정을 촉진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감정은 사회적 관계로 이해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바바렛 2007: 121) 



감정은 어떤 상황, 조건 없이 일어날 수 없다. 감정의 과정은 외부와의 접촉에 의해서 촉발된다. 

이 외부성은 사회적 환경, 문화적 풍경 속에서 일어나는 관계망 속에서 일어난다. 감정이라는 것이 

공통된 구조적 상황을 공유하면 집단의 수준에서 공통의 감정을 경험할 수 있다.  


역겨움. 마사 너스바움은 혐오는 오염물이 입을 통해 나의 신체 속으로 들어온다는 관념, 이로 인해 자신이 

오염 될 수 있다는 관념을 수반" 한다고 한다. 


"혐오는 사회적 차이와 무관하게, 자신이 유한하며 퇴화/부패하기 쉬운 동물적 존재라는 사실을 강하게 상기시키는 대상을 

섭취하기를 거부하고, 이러한 대상에 의해 오염되지 않으려는 감정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너스바움, 2015: 183) 



오염가능성은 혐오의 감정의 근저를 차지한다. 혐오는 혐오를 불어일으키는 대상의 성질에 의해 유발되기 보다는, 이 대상이 자신을 

오염시킨다는 주체의 인식에 의해 유발된다. 혐오가 실제적으로 오염을 불어일으키는 대상 뿐만 아니라, 상상적으로 오염을 불어일으킨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다른 대상으로 옮겨갈 수 있음을 시사한다. 오염되어 있기에 저열하다고 여겨지고, 오염되어 있기에 천하게 여겨진다. 



증오, 멸시, 비하, 혐오



"전통적인 형태의 여성혐오는 여성을 무시하는 태도인 여성멸시와 다르지 않았다. 흥미로운 것은 2000년대 이후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여성을 싫어하고 폄하하는 태도는 멸시라기보다는 혐오phobia의 형태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어느 정도 여성에 대한 사회적 ‘두려움’이나 ‘위협감’을 동반한다는 의미다."

-손희정,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문화과학/ 원문출처http://cultural.jinbo.net/?p=1256



혐오는  두려움과 위협감을 동반한다. 최근 유럽에서 불고 있는 시리아 난민을 둘러싼 혐오의 문제들이 번지고 있기도 하다. 

독일에서는 네오나찌들이 드러내놓고 혐오를 표현하고 있기도 하다. 


"불안의 판타지 안에서 여성은 꽃뱀 혹은 먹튀녀가 되거나 남성을 짓밟고 올라서서 얼마 안 되는 밥그릇을 강탈해갈 수 있는 권능을 지닌 경쟁자로 등극한다."

 -손희정, 우리시대의 여성혐오, 문화과학/ 원문출처: http://cultural.jinbo.net/?p=1023




이 불안은 비단 밥그릇(정치경제)만의 문제일까. 오히려 신체적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증오에는 혐오와 다른 가능성이 있다. 혐오가 어떤 범주(인종, 민족, 성, 계급 등등)를 통해 작동하는 것과 달리, 증오에는 어떤 개별적 경험에서 비롯되는 구체성과 정리되지 않은 감정을 지닌 신체성이 있다. 아직 무엇이 될지 알 수 없는 증오의 힘을 통제하고 어떤 범주 속에 고정시키는 것이 혐오의 기능이다. 유동적인 관계들과 결부되어 있기에 사랑으로 반전할 수도 있는 증오의 가능성을 혐오는 봉쇄한다. " 

-증오와 혐오 사이 / 후지이 다케시/ 한겨례/ 원문출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06581.html

증오와 혐오의 구분에서 무엇을 알아 볼 수 있을까. 
전통적인 의미에서 여성, 소수자들을 향한 것을 멸시였다.  '무시'하고 조롱하면 그만이었다.  여성비하, 장애인비하와 같이 이 전에는 
무시하고 간다는 맥락에서 읽혔다면 2000년 들어서는 멸시와 비하의 차원을 넘어선 혐오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의문과 질문들 
증오, 비하, 멸시, 혐오는 서로 비슷한 지점에서 발생한다. 나의 자리를 침법-가능성, 오염-가능성에 기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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