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에 관한 소론



< A. Abbas ,1980 >



세월호 이후 이유없이 쏟아지는 눈물은 모두 어디로 가는건지. 

이 몸뚱아리의 염분이 높아져버렸다. 

무엇이 어떻게 왜 라는 질문이 날아들기도 전에 슬픔은 온통 차오르기만 했다.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읽으면서도 자꾸 몸뚱아리에 썰물만 친다. 



슬픔과 우울증(Trauer und Melancholie)으로 정확하게 번역이 들어맞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래서 독일어 슬픔Trauer이라는 단어에는 ‘애도’의 의미가 겹쳐있다. 

프로이트 역시 글을 시작하기 전에 결론이 빈곤함을 드러내고 논의를 시작한다. 

“슬픔은 보통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 혹은 사라하는 사람의 자리에 대신 들어선 어떤 추상적인 것, 즉 조국, 자유, 어떤 이상 등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244쪽) 

사랑하는 것의 상실에서 시작된다는 슬픔은 누구가에게 ‘우울증’을 일으켜세운다.

슬픔이 깊어지면 우울증으로 찾아온다고 하지만 슬픔을 맞이하는 마음근육에 따라서 

슬픔의 색깔은 달라진다. 

“우울증의 특징은 심각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낙심, 외부 세계에 대한 관심의 중단,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상실, 모든 행동의 억제, 그리고 자신을 비난하고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을 정도로 자기 비하감을 느끼면서 급기야는 자신을 누가 처벌해 주었으면 하는 징벌에 대한 망상적 기대를 갖는 것 등으로 나타난다.“ (244쪽) 

▶정신분석학의 근본개념/지그문트 프로이트/ 열린책들/ 2004 



우울증의 특징들은 슬픔의 특징들과도 비슷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슬픔에서는 나타내지 

않는 자애심의 추락이다.” 자애심(독일어로는 어떻게 되려나...)의 추락이라. 

우울증은 자아는 쓸모없고, 무능력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아로 여긴다. 

자신의 과거들을 펼치며 “자기 비난을 과거로 확대시키만”(247쪽) 한다. 

이런 자기 비난은 자기를 폭로하며 “만족을 얻기 위해 집요하게 떠들어대는 속성(249쪽)”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몇 주전 나도 이와 비슷한 심리적 상황을 거쳤다. 

이 쓸모 없는 ‘나’를 향한 스스로 비난하며 내가 얼마나 무능력한지 

증명하기 위해 과거들을 헤집에 놓았다. 마침 그 때 몸이 좋지 않았는데 

되돌아 생각해보니...그래. 




라깡은 또 다른 의미에도 프로이트의 멜랑꼴리를 이해하기 위해 햄릿을 

불러 들였다. 햄릿은 아버지를 잃은 슬픔과 절망, 분노로 인해 오랫동안 

무기력한 우울의 상태에 있었다. “애도하지 못하는 주체, 즉 햄릿처럼 멜랑꼴리에 빠진” 

주체는 행위acte를 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애도되지 못한 죽음은 유령이 되어” 찾아

온 것이다. 오랫동안 추모와 애도의 시간을 가지지 못한 햄릿의 신체는 이미 무력하다. 

햄릿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삼촌과 결혼한 어머니의 욕망으로부터 분리 될 수 없었고 

심지에 어머니의 욕망에 참여하고 있었다. 애도하지 못하는 주체는 다른 욕망에 의존하며 

죄-책감을 통해 신체는 무기력해진다. 

“세월호 사건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우울과 죄의식, 절망을 경험하고 있다. 라깡의 햄릿 분석을 통해 이것이 세월호 사건과 관련된 우리의 집단적 멜랑꼴리에 대해 던지는 함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1) 어떤 경우도 납득할 수 없는 부당한 죽음의 경우 그것은 결코 개인 심리치료를 통해 해결될 수 없다. 물론 일정 정도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두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은 사회적 차원에서의 ‘정의 실현’을 통해서만 해결 가능하다.

(2) 이러한 차원을 망각한 심리치료는 종종 진리를 은폐하는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 살아 있는 인명구조에 그렇게 무심했던 정부와 행정관료들이 구조된 사람들의 심리치료를 위해서 그렇게 빠른 속도로 정신과의사를 배치할 수 있었던 그 기동력이 놀라울 뿐이다!

(3) 햄릿의 이야기는 멜랑꼴리 역시 권력과 외설적 쾌락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남편을 살해한 사람과 결혼한 왕비가 있다. 그리고 즉 어머니의 욕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아니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우유부단한 햄릿이 있다. 이러한 어머니의 욕망과 동일화했기 때문에 햄릿은 복수하지 못하고 멜랑꼴리에 빠진다.

(4) 햄릿의 멜랑꼴리, 즉 행위하지 못함은 권력과 외설적인 성적 쾌락에 무의식적으로 동참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햄릿이 행위하지 못하는 한 아버지는 유령으로 배회하며 햄릿을 계속 찾아올 것이다.

(5) 햄릿 드라마는 비극으로 끝나지만 멜랑꼴리를 진정으로 극복할 수 있도록 해준 마지막 단계가 무엇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행위이다. 그러나 행위하기 위해, 즉 진정한 애도작업을 할 수 있기 위해 햄릿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 했다. 레이티어스의 독이 묻은 칼에 맞아 죽어가면서 왕에게 독이 든 잔을 마시게 한다. 햄릿의 죽음의 순간을 은유적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멜랑꼴리 환자의 자살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햄릿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비운의 멜랑꼴리자가 아니다. 죽음의 순간에 그는 자신이 동참하던 사악한 권력과 외설스러운 쾌락과 진정으로 분리된다. 그리하여 그는 행위 할 수 있었고 진정한 애도작업을 수행할 수 있었다.

(6) 또한 『세미나 7권: 정신분석의 윤리』에서 라깡은 안티고네 사례를 분석한 바 있다. 안티고네는 독재자 크레온에게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죽임을 당한 오빠 폴리네케이스를 매장해준다. 반역죄를 저지른 안티고네는 동굴에 갇힌다. 햄릿 분석에 이어서 바로 이어서 행한 세미나에서 라깡이 <안티고네>를 분석한 것은 우연이 아닌 듯 보인다. 우리는 <안티고네>를 오빠의 죽음에 대한 애도에 관한 작품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안티고네의 행위는 반역적이다. 그럼에도 안티고네는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안티고네는 반역자인 오빠를 매장하고 장례식을 치루는 행위를 통해서만 진정한 애도가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안티고네의 애도 행위는 동시에 크레온에게 저항하는 정치적 행위이기도 하다.

(7) 멜랑꼴리에 대한 라깡의 분석은 개인과 사회는 분리된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이 두 작품과 이에 대한 라깡의 해석은 진정한 애도는 ‘궁극적으로’ 사회적, 정치적 행위라는 것, 그리고 이러한 행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권력과 외설적 쾌락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부당하게 죽은 사람들을 자신의 쉼터로 돌려보내지 못하는 무력한 멜랑꼴리자로 남게 될 것이다“


▶지젝 이론의 원천과 그 수용의 문제점, 그리고 신좌파 담론의 한계/ 홍준기

+애도는 슬픔을 마주하는 하나의 적극적인 행위acte이다. 이 행위들은 사회적, 정치적 

맥락을 빗겨갈 수 없다. 애도는 행위이다. 




내 아들이 없는데도 온 세상이 살판난 것처럼 들떠 있는 올림픽의 축제 분위기가 참을 수 없더니, 내 아들이 없는 세상 차라리 망해버리길 바란 거나 아니었을까. 내 무의식을 엿 본 것 같아 섬뜩했다. 아아, 천박한 정신의 천박한 꿈이여, 내 아들아, 어쩌면 에미를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만드니.


그러거나 말거나 오늘은 88서울 올림픽의 개막식 날이다. 

날씨는 쾌청하고 개막식도 잘 돼가는 모양이다. 딸, 사위, 손자들이 

텔레비전으로 그 광경을 시청하면서 연방 탄성을 지르며 즐거워하고 있다. 

그런 분위기를 훼방놓지 않을 만큼 대범해야 된다는 건 인내가 아니라 고투다.


그저 만만한 건 신神이었다. 온종일 신을 죽였다. 

죽이고 또 죽이고 일백번 고쳐죽여도 죽일 여지가 남아 있는 신, 

증오의 마지막 극치인 살의殺意, 내 살의를 위해서도 당신은 있어야 돼.


▶박완서/ 한 말씀만 하소서 / 1988년 9월 18일 일기



1988년 아들을 교통사고로 보낸 박완서 선생님의 일기들을 모은 책. 

벼랑 끝에서 쓰여진 문장들은 슬픔의 밀도는 가슴팍을 쿵하고 내리친다. 

삶이 바스라지기 직전의 절절한 슬픈 표정이 어린거린다. 

경험하지 않고서 말하지 말라. 이 말은 어느 정도는 진리이고 어느 정도는 독선이다. 

이미 우리는 경험했다.




▶몇 년전에 이 우울증과 관련된 책들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다. 세계의 빈곤과 

모멸을 선사하는 사회에서 일어난 붐이었다. 심리학 책들이 쏟아져 나왔고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는 불교와 명상, 영적 지혜들이 담긴 문장들이 팔려나갔다. 

우울증은 사회적 병리현상이자 문화적 자폐현상이다. 


▶슬픔을 건너는 지혜

정동의 정화(Katharsis), 기억과 망각의 기술, 파르헤시아(Parrhesia)라는 세

가지 치유의 언어를 발견할 뿐만 아니라 습관의 교정과 일상생활의 건강한 유지,

즉 자신의 영혼의 관리술을 또 하나의 처방으로 제시한다. 마지막 장에서는 니체적

치료술의 한 임상사례로서 무센브로크가 제시하는 철학상담적 임상을 다루었다.

니체에게서 치유의 길은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좋은 해석의 훈련이며, 부정적

의지를 긍정적 의지로 바꾸는 과정이자, 충만한 자기 관계의 훈련 속에서 삶을 아

름답게 이끌어가려는 창조적 의지를 실현하는 노력의 과정에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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