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문학사 스케치 #3 <윤석중>

윤석중 

 

#공부할겸해서쓰는동시문학스케치 #윤석중선생님멋져욤 #코리아레전더리동시인  #내가조금만빨리윤석중을알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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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서울출생. 외할머 밑에서 자람. 이름 석중은 ‘돌처럼 무거워 날아가지 말라’는 의미로 지었다고 함. 뒤늦게(10세) 교동초등학교 입학. (교동초등학교는 서울 삼청동 근처에 있음. 교동초등학교 맞은편에 한국독립영화협회가 있었는데...지금도 있나 몰라.) 

 

_13세 

잡지 <신소년>에 ‘봄’을 발표. 

 

 

 

따뜻한 봄이오니 

울긋불긋 꽃봉오리 

파릇파릇 풀잎사귀 

 

 

 

_1925년, 15세 

<어린이> 잡지 공모전에서 윤석중의 <오뚜기>가  당선. 

 

오뚜기 

 

책상 위에 오뚜기 우습구나야 

검은 눈은 성내어 뒤룩거리고 

배는 불룩 내민 꼴 우습구나야 

 

책상 위에 오뚜기 우습구나야 

술이 취해 얼굴이 빨개가지고 

비틀 비틀 하는 꼴 우습구나야 

 

책상 위에 오뚜기 우습구나야 

주정하다 아래로 떨어져서도 

안아픈 체 하는 꼴 우습구나야 

 

 

_1926년 ‘조선물산장려회’ 주최 글짓기대회에서 당선 

(전문을 찾을 수가 없네...) 

 

 

조선의 동포들아 

이천만민아 

두 발 벗고 두 팔 걷고 

나아오너라 

우리 것 우리 힘 

우리 재주로 

우리가 만들어서 

우리가 쓰자 

-조선물산장려가 부분

 

_<굴렁쇠> 회람잡지 

서울의 윤석중-> 진주의 소용수-> 마산의 이원수-> 언양의 신고송-> 울산의 서덕출 -> 수원의 최순애... 이렇게 각자가 읽은 글과 자신이 쓴 글을 돌려서 읽음. (이런 멋진 우정이 다있나! 대박!) 나중에는 남북으로 굴러다녔다고 전해짐. 

_1927년 여름방학 

 

울산의 서덕출을 만나러 감. 서덕출은 척추장애가 있는 소년이었음. 서울에서 윤석중이 내려온 것은 안 ‘굴렁쇠’ 동인들(언양의 신고송, 대구의 윤복진)이 울산에 모여 한 소절씩 시를 쓰게 되는데 

 

슬픈 밤 

 

 

오동나무 비바람에 

잎 떠는 이 밤 

그립던 네 동무가 

모였습니다 

이 비가 그치고 

날이 밝으면 

네 동무도 흩어져 

떠나갑니다 

 

오늘 밤엔 귀뚜라미 

우는 소리도 

마디마디 비에 젖어 

눈물 납니다 

문풍지 비바람에 스치는 이 밤 

그리운 네 동무가 

모였습니다 

 

-서덕출, 신고송, 윤석중, 윤복진 공동창작 

 

 

(이런 이야기는 지나치게 아름다워서 거짓말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 정도로 아름다운 이야기라며 거짓말이라도 믿을래요) 

 

 

 

_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발발. 윤석중은 동참하지 못하고 졸업장을 받는게 죄스러워 <중외일보>에 ‘자퇴생의 수기’를 쓰고 졸업 며칠 앞두고 자퇴. (보통 인간이 아니야...) 

(이것이 원문인데...중외일보 원본인데...알아보질 못하겠음...)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1&itemId=npjo&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position=0&levelId=npjo_1930_02_27_x0003_1390

(원문링크)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주제분류문화,학술 > 예술/문학 > 문학 > 수필-감상문

db.history.go.kr

 


 

_1932년 <윤석중 동요집, 신구서림, 1932> 출간. 총 40편이 실릴 예정이었으나 5편은 조선총독부에 의해서 검열받아 총 35편이 실림. 우리나라 최초의 동요집. (이거 어디서 구할 수 없나?) 아래는 1932년 윤석중 동요집에 실린 동요작품들. 

 


도리도리 짝짝궁 

 

 

엄마 앞에서 짝짜꿍 

아빠 앞에서 짝짜꿍 

엄마 한숨에 잠자고 

아빠 주름살 펴져라 

 

해님 보면서 짝짜꿍 

도리도리 짝짜꿍 

우리 엄마가 웃는다 

우리 아빠가 웃는다 

 


퐁당퐁당 

 

 

퐁당퐁당 돌을 던지자 

누나 몰래돌을 던지자 

냇물아 퍼져라 널리 널리 퍼져라 

건너편에 앉아서 나물을 씻는 

우리누나 손등을 간질여 주어라 

 

 


맴맴

 

 

아버지는 나귀타고 장에 가시고 

할머니는 건너마을 아저씨 댁에 

고추먹고 맴맴 달래 먹고 맴맴 

 

 

 


우산 셋이 나란히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파랑 우산 검정 우산 

찢어진 우산 

 

좁다란 학교 길에 

우산 세 개가 

 

이마를 마주대고 걸어갑니다 

 

그 밖에도 온갖 명작들이 가득한 동요집!으로 동요문학사의 이정표가 되고 있음! 낮에 나온 반달 /휘파람 /산바람 강바람 /달 따러 가자 /오뚜기 /밤 한톨이 땍때굴 /저녁놀 /우리집 콩나물 죽 /우리가 크거들랑 

 


_1933년 <잃어버린 댕기> 출간. 한국최초의 동시집으로 기록. 창작동시 20편. 번역 동시 10편. 동화시 5편으로 구성. 창작동시 20편은 기존의  3. 4조, 4. 4조, 7, 5조의 음수율을 벗어나 자유동시의 내재율을 시도한 작품들. 

 

<잃어버린 댕기, 윤석중, 느티나무사, 1933> 


 

저 바다 

 

 

저 바다 

저 바다 

저 바다가 울언니를 잡아갔대요. 

 

고기잡이 배 타고 저 바다로 나간 지 

열 달이 되어도 안 돌아오는 울 언니. 

 

저 바다 

저 바다 

저 바다가 울언니를 잡아갔대요. 

 

울언니 내노라고 돌을 집어 때리면 

싱글싱글 웃고 내빼는 저 바다. 

 

저 바다 

저 바다 

저 바다를, 내, 메워 버릴테야. 

 

울언니 잡아간 저 바다를 

흙으로 흙으로 메워 버릴테야.....

 


 

기러기 떼 

 

달밤에 기러기 떼 

글씨 공부 하지요. 

 

아까 쓴 건 시옷자, 

시방 쓴 건 한 일자. 

 

기럭아 기럭아

내 이름도 써봐라. 

 

언니의 언니 

 

난 밤낮 울 언니 입고 난 

헌털뱅이 찌꺼기 옷만 입는답니다. 

 

아, 이거 조끼두 그렇죠 

아, 이 바지두 그렇죠 . 

그리구, 이 책두 언니 다 배우고 난 책이죠. 

이 모자두 언니가 작아 못 쓰게된 모자죠. 

 

어떻게, 언니의 언니가 될 순 없나요? 

 

 


 

담 모퉁이 

 

담모퉁일 돌아가다가 

수남이하고 이쁜이하고 마주쳤습니다. 

꽝! 

이마를 맞부딪고 눈물이 핑......

 

울 줄 알았더니 하 하 하. 

얼굴을 가리고 하 하 하. 

울상이 되어서 하 하 하. 

 

 

 

 

_1933년. <어린이> 주간.  “1934년에는 <조선중앙일보>에 들어가『소년중앙』,『중앙』등을 맡아 보았고, 1937년에는 조선일보사로 자리를 옮겨『소년조선일보』,『소년』,『유년』등을 맡아서 아동문학 발전과 아동문화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고려문화사>에서『어린이신문』을 창간하였고, 그해 12월에는 <을유문화사>에서 ‘아동문화협회’를 창설하여『주간소학생』과『소학생』을 주간하면서 아동도서 출판을 하기도 했다. 1947년에는 윤극영ㆍ정순철ㆍ한인현 등과 ‘노래 동무회’를 만들어 동요 창작과 노래 보급에도 앞장섰다.” 

(윤석중의 삶과 동요. 동시의 핵심정서, 노원호, 한국아동청소년문학학회 여름학술대회, 2011, 5쪽) 

 

_<소년 중앙> 창간. 1936년 조선일보사로 옮겨 어린이 잡지 <소년> 주간. 해방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주간지 <주간 소학생> 창간. 

 

_어린이날 노래, 졸업식 노래 지음. 

 

_1950년 한국전쟁. 부친과 새어머니를 비롯한 이복동생 모두를 잃음. 1951년 11월 11일에 윤석중 아동 연구소 설립. 

 

“전쟁으로 들뜬 마음을 달래면서 나는 다시금 어린이에게로 생각을 쏟았다.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릴 수도 없었다. 정부가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참을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부서진 서울에서 나 혼자 시작할 수 있는 일이 무어란 말인가? 

머리 속에 지어 쌓으면 된느 동요 짓기가 아니게쓴ㄴ가. 언제 휴전이 될는지, 언제 정전이 될는지, 언제 통일이 될는지 아득하기만 했지만, 피난 간 사람들과 편지를 주고받아 할 수 있는 일은 ‘아동 연구소’ 였다. (중략) 내가 나에게 다짐하여 빈 집에 차린 것이 ‘윤석중 아동 연구소’였다. (중량) 연구소를 차렸노라고 큰소리를 치고 나서 작은 일부터 시작했다. 전쟁을 겪은 어린이들의 글을 모아 책으로 낼 작정을 한 것이다.“ (우지현, 1950년대 아시아재단의 원조와 윤석중의 아동 출판물, 한국한연구 제 48집, 2018, 재인용) 

 

(이 책은 반드시 구해서 읽어봐야 겠음) 

 

_1954년 윤석중 아동연구소를-> 새싹회로 다시금 창립. 새싹회 산하에 어린이합창단, 어린이 합주단, 글짓기 교실, 애기회 등을 두었다고. 1,300편의 동시 창작. 그중 800편이 동요로 만들어짐. 우리나라 최초 창작 동요집 <윤석중 도요집>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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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환 아동문학독본을 엮는 윤석중은 방정환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일본 손아귀에 들었던 시절의 한글 운동이 곧 애국 운동이요 민족 운동이요 해방 운동이었던 것이나 마찬가지로, 1923년 소파 선생이 나서심으로 제 길로 들어선 우리 나라 아동문학 역시 문학 운동이나 예술 운동이기보다, 소년 운동이요 민족 운동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파 선생이 남기신 동화나 이야기나 소설이나 연극이나 그 밖의 글에서 그 정신만을 이어받으면 그만인 것이며, ”씩씩하고 참된 소년이 됩시다. 그리고 늘 서로 사랑하며 도와 갑시다.“고, 우리 나라 어린이를 향하여 줄기차게 외치신 피어린 다짐을 엮어 놓으신 것이 바로 이 책에 담긴 글이다.” -방정환 아동문학동본, 윤석중 엮음, 을유문화사,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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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중 아동문학독본을 엮은 피천득은 윤석중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는 40년 동안 동요를 생활하여 왔다. 동요를 꿈꾸고, 동요를 먹고, 동요로 숨쉬고 살아왔다. 그가 동요를 쓰는 것은 오락이요, 직업이요, 습관이요, 그의 생활이다. 그가 동요를 쓴다는 것은, 힘드는 일이 아니다. 구두직공이 구두를 짓 듯이, 그보다 훨씬 빨리 훨씬 수월하게 동요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는 타고난 동요장이요, 숙련공이다. 그러기에 그 수많은 여름의 노래, 그 수많은 자장가가 하나 하나 아름답게 지어지는 것이다. 어떤 한 작가에서 한둘의 아름다운 자장가를 본 일은 있다. 그러나 한 작가에서 이렇게 새록새록 자장가가 나오는 것은 본 일은 없다. 그의 동요의 근원은 마르지 않는 샘이라 할까? 언제나 넘쳐 흐르는 호수인가보다.” -윤석중 아동문학독본, 피천득 엮음, 을유문화사, 1964 

 


 

 

*참고자료들 

-네이버 윤석중 인물 만화 (훌륭함!)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685644&cid=47317&categoryId=47317

 

-윤석중 네이버 연보( 생각보다 정리가 잘 되어있네)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71971&cid=59019&categoryId=59019

-윤석중의 삶과 동요. 동시의 핵심정서, 노원호, 한국아동청소년문학학회 여름학술대회, 2011

-우지현, 1950년대 아시아재단의 원조와 윤석중의 아동 출판물, 한국학연구 제 48집, 2018

-윤석중의 고등학교 자퇴서 원본 링크: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1&itemId=npjo&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position=0&levelId=npjo_1930_02_27_x0003_139

-윤석중 동시에 대한 재인식, 김제곤, 한국학연구 제20집, 2009 

 


*스케치 코멘트 

-근대 동시/동요들을 모아 읽으면서 단연코 내 눈에 들어오는 작품들은 윤석중과 강소천, 권태응의 동시였다. 이 셋 중에서도 연배가 앞선 윤석중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잠깐 스케치 해둔다. 

 

 

빛보다빠르게미래로달아나라 -이상,삼차각설계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