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 어린이 세 번째 사람, 창비, 2017>

<김지은, 어린이 세 번째 사람, 창비,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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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든 어린이들이 남자답게 혹은 여자답게 행동하게 되는 배경에는 그들을 키우는 부모와 사회의 심리적 태도가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심리학자 낸시 초도로는 남녀 어린이들의 성격차이가 어릴 적 부모와 맺은 관계와 사회의 기대치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특히 주된 양육자인 엄마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가 중요하다. 그에 따르면 남자 어린이들이 툭하면 엄마의 손을 뿌리치고 뛰어다니는 까닭은 엄마들의 양육 방식과 관련이 깊다. 엄마들은 자신과 다른 신체적 특성을 지닌 아들을 키우는 일이 낯설다. 아들에게는 어서 엄마에게서 벗어나 아버지처럼 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딸들에게는 다른 태도를 보인다. 젖먹이 딸과 엄마는 비슷한 경험을 하면서 성장하고 엄마는 딸과 지속적인 공생 결속 관계를 맺는다. 이 덕부넹 딸들은 세상에 대한 관계 지향적 태도, 연결적 자아상을 갖게 되는 반면, 남자 어린이들은 일찍부터 자신을 독립적인 개체로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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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만 아니라 ‘남자다움’이라는 특성은 사회 정치적 필요 때문에 형성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서양의 경우 중세와 근대 초기까지 대부분의 남성들은 육체가 무기력해야 살아 있는 영혼이 깃든다고 믿었다. 근육질의 씩씩한 남성에 대한 사회적 기대가 없었던 셈이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남성성과 엿어성의 조화는 육체와 정신을 새롭게 보려고 했던 계몽주의의 등장과 관련이 깊다. 게다가 근대국가의 발생 전후로 현저하게 잦아지고 규모가 커진 전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야만적인 남성 전사가 필요했다. 남자 어린이를 씩씩하게 기르기 위해 <소년을 위한 체조>라는 책을 지었던 요한 구츠무츠는 남자다운 용기에 대해 말하면서 무모함과 비검함 사이에서 중간의 길을 찾고 약자를 보호하며 사고에서 희생자를 구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했다. 당시 사회가 원하는 ‘남자다움’이란 ‘고귀한 야만인’이라는 모순된 존재였다. 계몽주의와 전사 양성 요구가 빋어낸 기묘한 결합이었던 셈이다. 

남자다움이 애국주의와 결합하면서 소년들은 더 남자다워져야만 했다. 식민지 쟁탈전이 가속화되고 전장에서는 더 많은 남자가 필요했ㄷ. 전쟁터에 나가기에 아직 어린 소년에게는 전쟁과 모험 이야기를 안겨 주었다. 너도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위대한 모험을 토애 너의 사내다움을 시험해 보아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해서 아쉽다고 부추겼다. 모험심은 남자다움과 동일시되기 싲가했다. 

중산층 소년들의 관심이었던 ‘남자다워지기’는 잏 산업화 과정에서 모든 계급의 관심으로 확장되었다. 기업가들은 소년들의 육체 단련을 강조했다. 노동계급이 규범적인 남자다움을 갖추게 되면 생산성이 한결 높아지기 때문이다. 소년들은 생산적인 성년이 될 준빌르 해야 했다. 물론 소년들의 남자다움에 대한 독려가 모두 호전적이거나 산업 생산의 논리를 따른 것만은 아니었다. 19세기 말부터 독일 소년드에게 인기가 높았던 카를 마이(karl F. May)의 소년 소설은 북미 인디언들의 남자다운 모험에 대한 얘기였다. 가능함녀 싸움을 피하는 인디언 올드 셰터핸드의 이야기를 다룬 칼 마이의 책들은 평화주의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었다. 올드 셰터핸드는 어쩔 수 없이 싸워서 악인을 무찌르게 되면 반드시 그를 죽이지 않고 판사에게 데려오곤 했다. 

이렇게 성장한 전통적인 소년들은 각기 다른 편에 서서 남자다움을 발휘하게 된다. 파시스트와 그에 맞서는 저항군, 자본가와 자본가에 대항하는 사회주의자 양쪽은 모두 든든한 사내가 필요했다. 길고 큰 전쟁들으 허망하고 비참하게 끝나고 여권운동 진연이 목표를 차근차근 달설애 나가고, 다양한 소수자들이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 전까지 소년들의 질주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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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이전까지는 여자 어린이가 주인공인 동화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우리 어린이문학은 소년들의 독무대였다. 이른바 근대적 소년들은 일제강점기부터 민주화 과정에 이르기까지 우리 어린이 문학을 이끌어 온 주인공들이어싹. 그 겁 없고 당찬 소년 주인공들이 빌리처럼 자신의 소년다움에 대한 갈등을 겪기 시작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그런데 이들은 아주 빠르게 갈등을 마무리한 모양이다. 사내다움을 거부하는 문제로 부모와 다투는 어린이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동화 속에서는 온유하고 섬세하고 자상한 소년들이 속소 ㄱ등장했다. 사내 냄새 풀풀나는 녀석들은 놀라운 속도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이런 현상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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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자로 쫓겨난 어린이들 가운데 여자 어린이들의 자리는 더욱 외곽이다. 그 많은 어린이책 화자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잠재적 성이 여전히 ‘남성’이다. 수많은 남자아이의 눈은 여자아이게게 ‘너의 삶을 아름답게’라는 주문은 외운다. 그러나 여자아이는 ‘네가 말하는 너의 삶이 나의 삶인가, 아니면 누구의 삶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서ㅑ 비로소 자신의 왕국에서 사용할 주문을 찾아 나설 수 있다. 

이 시간에도 많은 여자 어린이는 소녀로, 여자 어른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는 아이의 성장을 다루고 있지만 그를 통해 여성의 세계가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보여 준다. 무엇이 여자아이를 둘러싼 것이며 걷어 내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그가 벌이는 성철작 탐구는 그림책이라는 ‘모호한 장르’를 통해서 끝없이 계속된다. -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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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이제 더 이상 하나의 권력에 복종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이 때로는 폭력적인 형태로 강요되었던 가부장 권력이든 아니면 사랑과 배려의 이름으로 칭칭 감겨들던 모성의 간섭이든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본래 부모의 권력으로 장악되는 존재가 아니다. 게다가 세상은 좀 더 민주적이고 다원적인 방향으로 힘의 중심이 흩어지는 추세다. 이것이 아버지의 권위가 사라진다는 식으로 접근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 이유다. 아이들의 마음은 아버지로부터 더나고 있다. 종종 아버지는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어른들은 희미해진 아버지의 존재를 아이들에게 강하게 되살려 주려고만 할 뿐 그들이 왜 아버지를 부인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귀 기울여 듣지 않는다.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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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들은 어린이가 균형 잡힌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존재’가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아버지가 없는 사람에 대한 공격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우리 옛이야기에 나오는 영웅담 가운데 많은 이야기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홀어머니가 정성껏 키운 아들들’의 얘기다. <조웅전>, <유충렬전>이 대표적이다. 세상은 아버지 없는 사람의 가능성을 쉽게 인정하기 않는다. 영ㅇ우이 되어야 비로소 인정해준다. 그런 아들을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어머니는 지나칠 정도로 헌신하고 희생하는 모습으로 과장된다. 존재하지 않는 아버지를 극복하고 그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목표는 아들에게 지나친 부담을 준다. 아버지가 눈앞에 없기 때문에 아버지를 더 크고 대단한 이로 상상하도록 부추기기도 한다. 

재미있은 것은 이런 식의 ‘아버지 없는 아들이 영우 되는 옛이야기’가 어린이들에게 남자다움에 대한 판타지를 심어준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 읽는 남성 영웅담은 남자 어린이들이 ‘거대한 아버지’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하도록 이끈다. 남성 영웅담에서는 실제 아버지의 초라한 얼굴이나 고민은 애써 감추려 든다. 이야기에는 ‘멋진 아버지 되려고 애쓰는 대단한 아들들’이 나오지만 그 이야기를 읽는 아이들의 마음 속에서 현실 속 진짜 아버지에 대한 이해는 사라져 버린다. 또한 어머니는 그 다짐을 실현하는 과정에 존재하는 보조자일 뿐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버지’가 도리 수 없는 여자 어린이들의 좌절에 대해서도 헤아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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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 어린이 세 번째 사람, 창비, 2017> 

빛보다빠르게미래로달아나라 -이상,삼차각설계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