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구, 해묵은 동시를 던저버리자, 창비,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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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인이 어린이를 만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먼저 자기 자신 속의 어린이 즉 자신의 어린 시절이나 지금 내면에 가고 있는 어린이가 있고, 둘째로 가족이나 이웃의 어린이, 셋째로 어린이글을 통해 만나는 어린이가 있다.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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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화자 논쟁은 동시 장르의 본질적이며 예민한 속살을 건드린 것이었는데, 어린이 화자 문제는 창작 주체 개인이 손쉽게 바꿀 수 있는 창작 방법의 선택으로 해소되기 어려운 것임을 우선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한국 문학사에서 동시라는 형식은 어린이가 읽기에 적합한 시가 아니라 그 자체로 독특한 미적 양식이다. 동시는 어린이를 핵심 독자로 삼지만 독특한 미적 자질을 갖고 있으며, 이러한 장르의 원리를 나는 “아이들을 향해 조율된 목소리‘로 말해진 시와 노래가 바로 동시.동요”라고 설명한 바 있다. 그런데 이렇게 어린이 독자를 향해 목소리를 조율할 때 흔히 선택되는 것이 어린이와 눈높이를 맞추는 방식이며 이를 위해 종종 어린이 화자가 설정된다. 이렇게 어린이 화자가 발화하는 방식은 동시 장르의 형성기부터 조성된 오래된 관습으로 동시 장르의 탄생과 그 역사를 같이 한다. 

화자가 어린일 때 어린이 독자가 느끼게 될 생소함과 불편함을 불식하고 어린이 독자가 친근하게 느끼고 내용에 공감하기 쉽도록 어린이 화자나 어린이 같은 목소리를 설정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화자나 목소리가 늘 공감의 효과를 불어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발화된 내용만이 아니라 화자를 주목하게 하는 효과를 발생시키는 예가 허다하다.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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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는 어린이 독자와 얼마나 가까이 있을까. 아이들이 성장하는 시기에 맑고 깊은 동시를 읽고 가슴에 품어서 어른이 되어서도 청아하고 간결한 마음을 유지하며 여전히 동시를 읽고 즐길 수 있다면 그런 인생은 출복일 것이다. 그런데 다양하고 자극적인 매체들이 어린이의 이목을 사로잡는 시대이니만큼 동시를 일상적으로 읽고 노래 부르는 수용문화를 기대하기는 매우 어렵다. 어린이 도자가 보통 40~70편에 이르는 작품이 수록된 동시집을 제대로 읽는 것은 상당히 예외적인 경우일 듯 하고, 동시가 어려 매체와 결합하여 어린이와 마날 수 있게 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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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어떤 정신을 어떤 형식에 담을 것인가, 그리하여 자신의 길을 찾아갈 수 있는 신인이라면 한국 동시사에 의미 있는 자기 목소리를 보탤 수 있을 것이다.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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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이후 현재까지 출간된 주요 동시집을 대부분 읽어 보았지만, 몇몇 작품집을 뺴고는 대부분 시적 긴장과 완성도가 떨어져 시를 읽는 즐거움을 얻지 못하였다. 동시도 기본적으로 시를 읽는 즐거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시’를 추구하다가 ‘동(아이)’을 놓쳤거나, ‘동’시가 돼야 하는데 시에 머물렀다거나 하는 것은 형식논리로는 성립할 수 있어도 해심을 비켜난 접근이다. 최고의 동시가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최고의 시가 돼야 한다. -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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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과 가능성을 가진 많은 시인들이 해묵은 관습에 얽매여 낡은 동시의 틀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다. 낡고 타성에 젖은 동시의 관념을 털어버리지 않는 한 재미없는 동시가 계속 나올 수 밖에 없고, 동시단은 생동감을 잃고 자기회로를 맴도는 어리숙한 동호인들의 자기만족을 위한 마당으로만 남아 있게 될 것이다. -208 

 

동시는 그 본질상 어린이를 의식하고 쓰는 시다. 그런데 그 어린이는 어떤 어린이인가? 흔히 ‘혀짤배기 동시’라고 지적되는, 어른의 유치한 아이 흉내는 패턴화한 작품은 이제 그다지 많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여전히 동시가 의식하고 있는 어린이는 좁은 사고와 제한된 경험, 제한된 희로애락의 감정을 지닌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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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중의 위와 같은 자기검열- 어린이 인식은 1950년대 이후 주류 문단의 동시 인식과 동궤에 놓이는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그리고 이런 어린이 인식, 어린이 관념은 수십 년을 경과한 21세기에도 여전히 동시 문단을 지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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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어린이의 살아 있는 모습을 느낄 수가 없다.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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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표현되어 있다. / 착상의 전개도 시인의 이름을 가렸을 때 누구만의 표현이라고 생각될 만한 개성을 보여 주지 못한다. / 소재를 보는 상상력이 발랄하지 못하다. 

 

+그러나 낡아빠지고 감동 없는 교훈성 구절과 착한 어린이표, 아름다움표 표현을 구사한 작품도 여러 편 같이 실려 있어서 이 신인들이 동시에 대한 자의식을 갖지 모사고 해묵은 동시 관념에 젖어 있음을 드러내 준다. 또한 거의 모든 작품이 압축적인 표현을 찾는 데 소홀해서 언어의 경제성을 보여 주지 못한 것도 커다란 약점이다. 이런 상황은 두 권의 작품집에 실린 여덟 명의 시인에게 별 차이없이 공통으로 드러난다. -221 

 

+시인이 사물의 본질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주체의 관념을 투사해버린다. 시인이 그려내는 사물은 궁극적으로는 시인의 주관으로 해석한 대상일 수 밖에 없다 할지라도, 그것은 대상의 본질에 도달하기 위해 몇 번이고 두드려 보기를 반복한 결과로서의 해석이어야 한다. 이때의 본질은 물론 자연과학적 또는 사회학적 사실과는 다른 시적 진실의 추구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의 관습은 사물의 본질을 발견하기 앞서서 서둘러 주관을 투사하기 일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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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가 어린이를 의식하고 씌어져야 하는 것은 밥을 지으려면 쌀을 구해 와야 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때 의식되는 어린이가 기존의 동시들이 그려 내던 어린이상이거나 사회 통념으로 퍼져있는 어떤 어린이상이라면 그 동시가 가질 수 있는 시적 매력은 반감된다. 뛰어난 시인은 주어진 어린이상을 받아들여 가공하지 않고 매번 새롭게 어린이를 발견해 한 편 한 편에 살아있는 어린이의 모습을 담아내려 한다.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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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눈으로 보고 아이의 마음을 담고 아이에게 즐거움을 주려는 시인의 시도가 편편이 배어있다.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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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뛰어난 시적 성과를 보여 준 역량 있는 시인들이 살아 있는 어린이를 담아내고 어린이 마음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치열하게 정진한 결과가 이렇게 제한적인 결실에 다다르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동시에 대한 이해나 체득이 미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어린이 존재를 제한적인 인격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어린이는 유한하다. 어린이는 그 존재의 조건으로 인해 지식도 경험도 감정도 유한하다. 이를 개념적으로는 부정하더라도, 두 시인에게는 이런 어린이상이 내면화되어 있어 어린이에 집중할수록 더욱 이러한 어린이상을 구현한 동시를 창작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창작과정을 통해 시인의 역량이 극대화되고 시의 파장이 무한히 넓어지거나 깊어지는 결과를 얻어 내지 못하였다.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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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학교>의 작가 김진경은 최근 어떤 문학잡지의 좌담에서 “지금은 근대가 만들어 낸 아동이라는 개념 자체가 무너지는 과정이 아닌가 싶”다고 발언하였다. 이는 좀 더 본격적으로 검토해 볼만한 논제인데, 김진경은 ‘작은 어른’으로 간주되던 아동의 개념이 근대 산업사회로 넘어오면서 “일하는 어른들과는 구분된느, 근대 학교 시스템에 수용되어 국가가 요구하는 교육을 받는 일정한 연령까지의 아이들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바뀌었고, 따라서 아이들에게 지식 정보를 연령대별로 통제할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그렇게 해왔다고 지적한다. 이런 맥락에서, 지금의 어린이책 시장에서는 아동문학을 “철저하게 근대 아동 개념에 입각해서 보고 있”고 ‘이렇게 보면 아동문학의 지위가 정말 낮아져 버린다“고 진단한다. 그의 문제의식은 지식 정보에 대한 무차별적인 접근성, 핵가족의 해체, 소비사회 진입 등으로 인해 근대의 아동 개념이 붕괴될 정도로 아이들의 모습이 달라지고 있고, 따라서 어린이문학은 ”아이들이 가장 첨예하게 변하고 있는 지점을 정확하게 포착해서 그것들의 사회적 의미를 자꾸 작품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탈근대의 아동의 출현을 보면서 탈근대에 걸맞은 아동관이 필요함을 지적한 것인데, 매우 논쟁적인 문제제기다. 어린이를 미성숙한 존재이면서 독자적인 인격체로 보는 근대 어린이문학의 아동관은 지금도 여전히 어린이문학을 지배하는 관념인데,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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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노래 / 페터 한트케

 

아이가 아이였을 때

팔을 휘저으며 다녔다.

시냇물은 하천이 되고 하천은 강이 되고

강은 바다가 된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자신이 아이라는 걸 모르고

완벽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세상에 대한 주관도, 습관도 없었다

책상다리를 하기도 하고 뛰어다니기도 하고

사진 찍을 때도 억지 표정을 짓지 않았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질문의 연속이었다.

왜 나는 나이고 네가 아닐까?

왜 나는 여기에 있고 거기에 없을까?

시간은 언제 시작되었고 우주의 끝은 어디일까?

 

태양 아래 살고 있는 것

내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이

모였다 흩어지는 구름조각은 아닐까?

악마가 존재하는지, 악마인 사람이 정말 있는 것인지

내가 내가 되기 전에는 무엇이었을까?

지금의 나는 어떻게 나일까?

과거엔 존재하지 않았고 미래에도 존재하지 않는

다만 나 일 뿐인데 그것이 나 일수 있을까?

 

아이가 아이였을 때

시금치와 콩, 양배추를 억지로 삼켰다

그리고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모든 것을 잘 먹는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낯선 침대에서 잠을 깼다

그리고 지금은 항상 그렇다

옛날에는 인간이 아름답게 보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옛날에는 천국이 확실하게 보였지만

지금은 상상만 한다

허무 따위는 생각 안했지만

지금은 허무에 눌려있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아이는 놀이에 열중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열중하는 것은 일에 쫓길 때 뿐이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사과와 빵만 먹고도 충분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딸기만 손에 꼭 쥐었다

지금도 그렇다

덜 익은 호두를 먹으면

떨떠름했는데 지금도 그렇다

산에 오를 땐 더 높은 산을 동경했고

도시에 갈 때는 더 큰 도시를 동경했는데

지금도 역시 그렇다

버찌를 따러 높은 나무에 오르면 기분이 좋았는데 

지금도 그렇다

어릴 땐 낯을 가렸는데 지금도 그렇다

항상 첫눈을 기다렸는데 지금도 그렇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막대기를 창 삼아서 나무에 던지곤 했는데

창은 아직도 꽂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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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동시단은 어린이를 너무 의식했다. 그 어린이는 시인의 몸 안이 아니라 바깥에 있었다. 기성 동시가 터를 두고 있는 어린이는 깡그리 잊어버려라. 몸에 배어 입만 열면 흘러나올 것 같은 해묵은 구절들도 우주로 펑펑 날려 버리자. -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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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기의 소멸>을 쓴 닐 포스트먼은 인쇄 매체의 보급과 교육 대중화에 따라 ‘발명’된 아동기가 전자매체 시대에 접어들어 흔들리고 있다고 본다. (.....) 아동기의 소멸을 보는 ‘어두운 절망’과 전자매체 시대의 새로운 자율성을 찬양한는 ‘낙관적 전망’ 사이에서 그 나름대로 균형을 잡아 보려고 한ㄷ. 버킹엄은 거대 글로벌 미디어 기업이 생산하는 서사와 이미지, 상품에 흠뻑 빠져든 현대사회의 아이들이 처한 상황을 ‘미디어 아동기’라 부르면서 현대의 아동기가 전자매체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생겨나고 규정되는 점을 주목한다. 근대와 탈근대가 교파하는 이 시대에 과연 어린이는 어디에 서 있는가? 우리 아이들에 대한 사회문화적 보고와 함께, 예민한 문학적 감수성으로 포착한 생생한 모습들이 풍부하게 나와 줘야겠다. -260 

 

 

<김이구, 해묵은 동시를 던저버리자, 창비, 2014>  

 

빛보다빠르게미래로달아나라 -이상,삼차각설계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