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명효과-들뢰즈의 문학론, 서동욱, 철학사상연구소

원문출처: http://philinst.snu.ac.kr/thought/27/05.pdf



Ⅰ. 들뢰즈 문학연구의 한 성격


 들뢰즈는 비철학적인 것의 중요성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강의에서 나는 얼마나 철학이…비철학적 이해, 지각들(percepts)과 정서들(affects) 을 통해 작동하는 이해를 필요로 하는지 파악했다.”1) 들뢰즈가 ‘철학’ 이라는 말을 통해 이해하는 바가 무엇이며 이 말을 통해 어떤 것들을 가리키는지 따져 묻는 것은 그 자체로 대단한 논의거리가 될 것이다. 여기서 밑 빠진 독 같이 연구자의 기력을 죄다 빨아들여 벌이는 이런 문제를 상대할 수는 없겠다. 욕심을 버리고 그 큰 논의덩어리에서 단지 최소한 필요한 만큼만 떼어내 이해를 구해보자면, ‘비철학적인’ 것이란, 특정 계열의 고전 철학 일반이 공유하는 “주관적이며 암묵적인 전제”2) 를 벗어나는 길을 가리킨다. 이런 비철학적인 ‘지각과 정서’가 우리가 철학을 가지고 몰두해 왔던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들뢰즈 사상의 정체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왜 그가 특정한 작가들에 대해 그토록 몰두하며 이들 문학의 도움 없이는 어 째서 쩔뚝거리게 되는지 알게 해준다. 어떤 뜻에서 그런가? ‘주관적이 며 암묵적인 전제’ 없는 사유의 정체란, 이 전제에 각종 본유 관념들 및 선험적 원리들이 포함되는 한에서 ‘경험론’이 될 수밖에 없다. 그 리고 경험론에 남겨지는 것은 경험에 앞서는 전제들에 매개되지 않는 ‘지각과 정서’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런 지각과 정서만 을 가지고, 철학이 몰두했던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는 길로 안내해주는가? 그들이 바로 들뢰즈가 자기 책의 수많은 페이지들을 할애 한 프루스트와 카프카 같은 예술가들이다. 프루스트는 이렇게 이야기한 다. “이제 나는 진리의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표현이 아닌 표식들만을 중요시하게 되었다. 나는 말을 해석할 때도, 당황했을 때 얼굴이 벌겋 게 달아오르는 것을 해석하거나 혹은 갑작스레 밀려온 침묵을 해석할 때와 마찬가지로 접근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말 자체는 나에게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3) 여기서 프루스트는 ‘진리의 이성적 표현’과 ‘표식들(témoignages)’을 구별하고 표식들만을 인식의 원천으 로 삼는다. 이성적인 것과 다른 표식들이란 물론 ‘내 눈으로 확인한 바에 의하면(si j'en crois le témoignage de mes yeux)’ 같은 표현에 서 보듯, 그리고 프루스트가 예로 든 “당황했을 때 얼굴이 벌겋게 달 아오르는 것” 같은 경우에서 보듯 감성적 원천을 가지는 것이다. 이 러한 ‘감성적 원천’의 중요성을 들뢰즈는 (좀 다른 맥락에서이긴 하지 만) 카프카에게서도 역시 발견한다. 카프카의 관심을 끄는 것은 “형태 자체를 붕괴시키는 ‘표현 기계’”,4) “언어 안에 이방인처럼 존재하는 것”(K, 48), 단적으로 말해 ‘형태 없는 음성적 질료’로서, 말 그대로 ‘감성적 원천’을 가지는 것이다. “카프카의 관심을 끈 것은 순수한 음 성적 질료이다”(K, 11). 가령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라. “그레고르는 자기의 대답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 대답 소리는 틀림없이 자 기 목소리였는데, 거기엔 저음 같기도 한 어떤 억제할 수 없는 고통 스러운 찍찍하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그 찍찍거리는 소리는 하고 있 는 말을 다만 처음 순간에만 명료하게 할 뿐, 그 여운은 분명치 않아 서 상대방이 똑바로 알아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5) 그런데 비이성적인 지각과 정서를 주는 이 감성적인 것이 출현하는  특집 방식 가운데 하나가, 저 프루스트의 문장 속에서 ‘표식’이라 표현되기 도 한 ‘징후’ 또는 ‘기호(signe)’이다. 어떤 의미에서 들뢰즈에게 예술 일반이란 이 징후에 대한 연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징후 학(symptomatologie)이란 언제나 예술의 일거-리다.”6) 누가 징후학으 로서 예술의 모범을 보여주는가? 가령 프루스트이리라. “프루스트의 경우 그가 탐구한 것은 기억이 아니라 기호의 종류들이다. 그는 기호 들의 환경적 본성과 방사 방식, 질료, 체제 등을 발견해야 했다. 잃 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는 일반기호학, 세계의 징후학이다”(P, 195). 이 제 이 글을 시작하며 읽었던 저 첫 문장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알았 고 무엇을 과제로 떠맡게 되었는가 정리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지성 의 암묵적 전제를 고발하는 철학은, 그 전제들의 임의성을 밝혀야 하 며, 그 전제들에 매개되지 않은 정서와의 만남을 기술하는 경험론일 것이다. 그런 정서의 도래는 기호와의 마주침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기호와의 마주침이라는 것은, ‘암묵적 전제들’에 기반한 철학 일반과 경쟁하며, 철학의 오래된 문제들에 나름의 답을 내놓으려고 하는데, 그 가운데 중심이 되는 한 가지는 앞서의 프루스트의 구절(“나에게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이 암시하듯 ‘앎의 문제’이다. 즉 경 험을 구성하는 개념들의 출현 문제이다. 누가 이 문제에 맞닥뜨려, 본 유적, 그리고 선험적 원리들에 빚지지 않고 감성적 기원으로부터 경 험 구성적 개념의 출현을 설명하는가? 다음과 같이 경험에서 배움의 원천을 찾는 이가 그렇다. “순수 지성이 만들어 낸 관념들은 논리적 진리, 가능한 진리밖에 가지지 못한다. 이 관념들은 임의적으로 선택 된 것이다. ‘우리 지성에 의해 씌어진 문자 (caractères tracés par nous)가 아니라’ 사물의 형상이라는 문자 (caractères figurés)로 된 책 이 우리의 유일한 책이다. 우리가 만들어 낸 관념들이 논리적으로 옳 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그 관념들이 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는 것이다”(RTP, Ⅲ, 878-880). 이 구절은 지성 개념을 경험을 독해 가능하게 해주는 문법으로 내세우는 칸트의 다음 구절에 맞서고 있다. “지성의 순수 개념은 현상들을 말하자면 문자로 철자화해서 경험으로 읽을 수 있도록 하고자 사용될 뿐이다”( 형이상학 서론 , Ⅳ, 312). 지 성에 의해 쓰여진 문자가 아니라, 사물의 형상으로 쓰여진 문자, 즉 경험적 원천을 지니는 문자로부터 어떻게 앎의 문제는 해답을 얻어내 는지, 들뢰즈가 그렇듯 프루스트가 만든 길을 따라가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도출된 과제와 더불어 들뢰즈의 문학론은 주제로서 필연성과 제한성을 얼마간 얻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학론이 주제로서 필연성을 얻는다는 것은, 들뢰즈가 다루는 문학이 필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형태, 가령 ‘서사(narration)’가 모종의 필연성을 얻는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그리고 이 필연성의 규명은 문학이 가질 수 있는 지위에 대한 해명이기도 하다. 우리의 탐구는 문학(더 정확히는 서사) 의 이 지위를 규명하는데서 마치게 될 것이다.



1) G. Deleuze, Pourparlers, Paris: Éd. de Minuit, 1990, 191쪽(약호 P). 이 글의 모든 인용에서 원저자의 강조는 ‘ ’로, 인용자의 강 조는 고딕체로 표기한다. [ ] 안의 말은 대체 가능한 번역어나 뜻을 잘 통하게 하기 위해 인용자가 임의로 집어넣은 것이다. 인 용은 본문 중 인용문 뒤 괄호 안에 약호 표시와 쪽수를 써 주는 방식으로 하고 ‘쪽’이라는 표기는 생략한다. 

2) G. Deleuze, Différence et Répétition, Paris: PUF, 1968, 170쪽(약호 DR).

3) M. Proust, 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 Paris: Gallimard(Pléiade 문고), 1954, Tome. Ⅲ, 88쪽(약호 RTP). 

4) G. Deleuze & F. Guattari, Kafka: Pour une litterature mineure, Paris: Éd. de minuit, 1975, 51쪽(약호 K). 

5) 프란츠 카프카, 단편전집: 변신 , 이주동 옮김, 솔, 1997, 112쪽. 

6) G. Deleuze, Présentation de Sacher-Masoch, Paris: Éd. de Minuit, 1967, 11쪽.

빛보다빠르게미래로달아나라 -이상,삼차각설계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