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 거짓말 하는 어른, 문학동네, 2015

슬프지 않은 어린이, 슬픔을 말하는 아동문학 

 

 

1. 저게 슬퍼요? 

 

"뿔논병아리야, 바다쇠오리야, 가마우지야, 논병아리야!" 구슬픈 이름을 불러본다. 2007년 12월 7일 태안 아파다에서 일어난 원유 유출사고로 영문도 모르고 스러진 야생 조류들의 이름이다. 끈적이는 검은 기름을 온몸에 뒤집어 ㅇ쓰고 살아보겠다고 갯벌 위에서 버둥대던 그들은 줄줄이 숨을 놓았다. 굴을 까서 하루 벌이로 손자 손녀를 키워온 할머니는 "할무니, 제발 죽는다는 말만 하지 마."라고 매달리는 손녀 앞에 주저앉아 통곡한다. 손녀가 일기장에 그린 바다는 파도도 물고기도 새도 온통 먹빛이었다. 

 

슬픔은 어떻게 느끼는 걸까. 누군가는 슬프면 이마다 뜨끈해지면서 눈이 뻑뻑하다 하고, 또 누구는 슬프면 턱 밑에 무거운게 걸린 듯 입에서 말이 만들어지지 않느다고도 한다. 어떻든 슬픔은 일시적으로 확 치솟아오르는 것이기보다는 스르르 적셔드는 감정이다. 문제의 그 사고가 난 날, 동네 식당에서 텔레비전 뉴스로 현지 소식을 보고 있었다. 기름이 엉켜붙은 부리를 힘겹게 저으며 하늘로 고개를 치켜드는 뿔논병아리의 모습을 보는데 절로 눈물이 고였다. 이를 어찌할까. 몇 안되는 식당 손님들은 같은 기분이었는지 잠시 수저를 멈추었다. 이때 건너편 식탁에서 이 장면을 보며 밥을 먹던 어린이의 한마디에 귀가 번쩍 뜨였다. 

 

"엄마, 저 새 열라 까맣다." 

 

"저 얼마나 슬픈 일이니."

 

"에이,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뭘. 엄마는 저게 슬퍼?" 

 

 

2. 슬픔(sadness), 화(anger), 의분(indignation) 

 

어린이들이 좀 처럼 슬퍼하지 않는ㄷ. 어린이들은 눈물을 흘리는 대신 욕설을 한ㄷ. 눈물을 흘리면 지는 거다. 이 치열한 경쟁의 악다구니에서 패배하는 거다. 아동문학도 요즘은 슬픔을 잘 말하지 않는다. 슬픔을 ㅁ라하면 때 지난 신파같고, 문제의 본질을 외면하는 것 같아 마뜩잖다. 작가들은 주인공의 눈물 대신 냉소에 젖거나 의분에 찬 어린이들이 겪는 환상과 도전을 그린다. 

 

사실 어린이들의 생활에서 슬픔의 자리를 '화'가 차지한 지는 꽤 되었다. 슬픔이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는 감정이라면 화는 밖으로 표출되는 감정이다. '슬픈 사람은 약한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슬픔을 권하는 사람은 드물다. 되든 말든 일단 화를 내고 나면 "그 녀석 똥배짱이다."라는 말이라도 듣지 않는가. 얼핏 눈물이라도 비쳐서 상대에게 만만해보이는 것보다는 똥배짱이 되는 것이 나은 세상이다. 흐느끼는 어린이는 별로 없고 떼쓰고 울부짖는 어린이들로 가득하다. 약육강식이 인간의 규칙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슬픔은 화가 지니지 못한 힘을 갖고 있다. 자기 안으로 깊숙하게 슾퍼본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다. 슬픔은 다차원적인 공감 능력이기도 하다. 나에게 특별한 직접적 불행이나 실패가 없어도 어떤 상황에 대해서 비애를 느낄 수 있다. 가을에 찻길을 뒹구는 낙엽 한 장이 우리를 슬픔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누군가의 감정을 보면서 강렬한 비통함을 느낄 수도 있다. 그 사람과 같은 이유 때문은 아니지만 나도 몹시 슬퍼보 적이 있고, 그순간을 되돌아보면 지금 그의 슬픔이 고스란히 느껴지기 때문이다. 

 

공감하는 능력은 윤리적 배려로 나타난다. 슬픔을 아는 사람은 다른 이의 어려움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비웃지도 않는다. 내가 르렇게 슬퍼보았는데 왜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어떻게 돕지 않을 수 있단 ㅁ라인가. 동정이나 연민이 논리적인 판단을 방해하는 것은 틀림없지만, 동정이나 연민을 가슴에 품지 못하는 사람의 진정성과 실천력은 떨어질 수 있다. 

 

화를 내느라 에너지를 모두 써버려서 그런지 요즘 어린이들은 책을 읽고 잘 울지 않는다. 입으로는 주인공이 불쌍하고 가엾다고 하지만 공감하기보다는 왜 불쌍한가에 대한 원인 분석에 열을 올린ㄷ. 주인고의 감정은 논평의 대상읻. 주인공이 나 같고 내가 주인공 같아서 슬프다는 아이들이 별로 없다. 

-159~161  

<김지은, 거짓말 하는 어른, 문학동네, 2015> 

페미니즘 아동문학_ 참고자료_ 영문

<Nancy chodorow, The Reproducion of mothering: Phychoanalysis and Sociligy og Gender, University of califonia Press, 1978.>

PDF 원문 

https://toleratedindividuality.files.wordpress.com/2015/10/the-reproduction-of-mothering.pdf


 

<George L. Mosse, The image of man, Oxford University press, 1996> 

https://www.amazon.com/Image-Man-Creation-Masculinity-Sexuality-ebook/dp/B000SBPAKQ

 

<George L. Mosse, The image of man, Oxford University press, 1996> 

<김지은, 어린이 세 번째 사람, 창비, 2017>

<김지은, 어린이 세 번째 사람, 창비,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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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든 어린이들이 남자답게 혹은 여자답게 행동하게 되는 배경에는 그들을 키우는 부모와 사회의 심리적 태도가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심리학자 낸시 초도로는 남녀 어린이들의 성격차이가 어릴 적 부모와 맺은 관계와 사회의 기대치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특히 주된 양육자인 엄마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가 중요하다. 그에 따르면 남자 어린이들이 툭하면 엄마의 손을 뿌리치고 뛰어다니는 까닭은 엄마들의 양육 방식과 관련이 깊다. 엄마들은 자신과 다른 신체적 특성을 지닌 아들을 키우는 일이 낯설다. 아들에게는 어서 엄마에게서 벗어나 아버지처럼 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딸들에게는 다른 태도를 보인다. 젖먹이 딸과 엄마는 비슷한 경험을 하면서 성장하고 엄마는 딸과 지속적인 공생 결속 관계를 맺는다. 이 덕부넹 딸들은 세상에 대한 관계 지향적 태도, 연결적 자아상을 갖게 되는 반면, 남자 어린이들은 일찍부터 자신을 독립적인 개체로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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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만 아니라 ‘남자다움’이라는 특성은 사회 정치적 필요 때문에 형성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서양의 경우 중세와 근대 초기까지 대부분의 남성들은 육체가 무기력해야 살아 있는 영혼이 깃든다고 믿었다. 근육질의 씩씩한 남성에 대한 사회적 기대가 없었던 셈이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남성성과 엿어성의 조화는 육체와 정신을 새롭게 보려고 했던 계몽주의의 등장과 관련이 깊다. 게다가 근대국가의 발생 전후로 현저하게 잦아지고 규모가 커진 전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야만적인 남성 전사가 필요했다. 남자 어린이를 씩씩하게 기르기 위해 <소년을 위한 체조>라는 책을 지었던 요한 구츠무츠는 남자다운 용기에 대해 말하면서 무모함과 비검함 사이에서 중간의 길을 찾고 약자를 보호하며 사고에서 희생자를 구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했다. 당시 사회가 원하는 ‘남자다움’이란 ‘고귀한 야만인’이라는 모순된 존재였다. 계몽주의와 전사 양성 요구가 빋어낸 기묘한 결합이었던 셈이다. 

남자다움이 애국주의와 결합하면서 소년들은 더 남자다워져야만 했다. 식민지 쟁탈전이 가속화되고 전장에서는 더 많은 남자가 필요했ㄷ. 전쟁터에 나가기에 아직 어린 소년에게는 전쟁과 모험 이야기를 안겨 주었다. 너도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위대한 모험을 토애 너의 사내다움을 시험해 보아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해서 아쉽다고 부추겼다. 모험심은 남자다움과 동일시되기 싲가했다. 

중산층 소년들의 관심이었던 ‘남자다워지기’는 잏 산업화 과정에서 모든 계급의 관심으로 확장되었다. 기업가들은 소년들의 육체 단련을 강조했다. 노동계급이 규범적인 남자다움을 갖추게 되면 생산성이 한결 높아지기 때문이다. 소년들은 생산적인 성년이 될 준빌르 해야 했다. 물론 소년들의 남자다움에 대한 독려가 모두 호전적이거나 산업 생산의 논리를 따른 것만은 아니었다. 19세기 말부터 독일 소년드에게 인기가 높았던 카를 마이(karl F. May)의 소년 소설은 북미 인디언들의 남자다운 모험에 대한 얘기였다. 가능함녀 싸움을 피하는 인디언 올드 셰터핸드의 이야기를 다룬 칼 마이의 책들은 평화주의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었다. 올드 셰터핸드는 어쩔 수 없이 싸워서 악인을 무찌르게 되면 반드시 그를 죽이지 않고 판사에게 데려오곤 했다. 

이렇게 성장한 전통적인 소년들은 각기 다른 편에 서서 남자다움을 발휘하게 된다. 파시스트와 그에 맞서는 저항군, 자본가와 자본가에 대항하는 사회주의자 양쪽은 모두 든든한 사내가 필요했다. 길고 큰 전쟁들으 허망하고 비참하게 끝나고 여권운동 진연이 목표를 차근차근 달설애 나가고, 다양한 소수자들이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 전까지 소년들의 질주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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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이전까지는 여자 어린이가 주인공인 동화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우리 어린이문학은 소년들의 독무대였다. 이른바 근대적 소년들은 일제강점기부터 민주화 과정에 이르기까지 우리 어린이 문학을 이끌어 온 주인공들이어싹. 그 겁 없고 당찬 소년 주인공들이 빌리처럼 자신의 소년다움에 대한 갈등을 겪기 시작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그런데 이들은 아주 빠르게 갈등을 마무리한 모양이다. 사내다움을 거부하는 문제로 부모와 다투는 어린이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동화 속에서는 온유하고 섬세하고 자상한 소년들이 속소 ㄱ등장했다. 사내 냄새 풀풀나는 녀석들은 놀라운 속도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이런 현상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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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자로 쫓겨난 어린이들 가운데 여자 어린이들의 자리는 더욱 외곽이다. 그 많은 어린이책 화자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잠재적 성이 여전히 ‘남성’이다. 수많은 남자아이의 눈은 여자아이게게 ‘너의 삶을 아름답게’라는 주문은 외운다. 그러나 여자아이는 ‘네가 말하는 너의 삶이 나의 삶인가, 아니면 누구의 삶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서ㅑ 비로소 자신의 왕국에서 사용할 주문을 찾아 나설 수 있다. 

이 시간에도 많은 여자 어린이는 소녀로, 여자 어른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는 아이의 성장을 다루고 있지만 그를 통해 여성의 세계가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보여 준다. 무엇이 여자아이를 둘러싼 것이며 걷어 내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그가 벌이는 성철작 탐구는 그림책이라는 ‘모호한 장르’를 통해서 끝없이 계속된다. -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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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이제 더 이상 하나의 권력에 복종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이 때로는 폭력적인 형태로 강요되었던 가부장 권력이든 아니면 사랑과 배려의 이름으로 칭칭 감겨들던 모성의 간섭이든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본래 부모의 권력으로 장악되는 존재가 아니다. 게다가 세상은 좀 더 민주적이고 다원적인 방향으로 힘의 중심이 흩어지는 추세다. 이것이 아버지의 권위가 사라진다는 식으로 접근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 이유다. 아이들의 마음은 아버지로부터 더나고 있다. 종종 아버지는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어른들은 희미해진 아버지의 존재를 아이들에게 강하게 되살려 주려고만 할 뿐 그들이 왜 아버지를 부인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귀 기울여 듣지 않는다.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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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들은 어린이가 균형 잡힌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존재’가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아버지가 없는 사람에 대한 공격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우리 옛이야기에 나오는 영웅담 가운데 많은 이야기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홀어머니가 정성껏 키운 아들들’의 얘기다. <조웅전>, <유충렬전>이 대표적이다. 세상은 아버지 없는 사람의 가능성을 쉽게 인정하기 않는다. 영ㅇ우이 되어야 비로소 인정해준다. 그런 아들을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어머니는 지나칠 정도로 헌신하고 희생하는 모습으로 과장된다. 존재하지 않는 아버지를 극복하고 그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목표는 아들에게 지나친 부담을 준다. 아버지가 눈앞에 없기 때문에 아버지를 더 크고 대단한 이로 상상하도록 부추기기도 한다. 

재미있은 것은 이런 식의 ‘아버지 없는 아들이 영우 되는 옛이야기’가 어린이들에게 남자다움에 대한 판타지를 심어준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 읽는 남성 영웅담은 남자 어린이들이 ‘거대한 아버지’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하도록 이끈다. 남성 영웅담에서는 실제 아버지의 초라한 얼굴이나 고민은 애써 감추려 든다. 이야기에는 ‘멋진 아버지 되려고 애쓰는 대단한 아들들’이 나오지만 그 이야기를 읽는 아이들의 마음 속에서 현실 속 진짜 아버지에 대한 이해는 사라져 버린다. 또한 어머니는 그 다짐을 실현하는 과정에 존재하는 보조자일 뿐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버지’가 도리 수 없는 여자 어린이들의 좌절에 대해서도 헤아리지 않는다. 

-313 

 

 

<김지은, 어린이 세 번째 사람, 창비, 2017> 

문단_내_성폭력_춘천교대_기록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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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03. 21 

http://www.kwnews.co.kr/nview.asp?s=501&aid=217032000137

 

춘천교대 교수 제자 성희롱 파문

해당 교수 사과문 게시특단 조치 필요 목소리춘천교대 한 교수의 성희롱 사실이 또 알려져 파문이 일고 있다. 최근 춘천교대 대학원 게시판에는 제자를 성희롱한 모 교수의 사과문이 게재됐다.

www.kwnews.co.kr

 

(사과문을 구하여 읽고 싶었으나 구할 수 없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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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05. 18. 

춘천교대 성폭력대책특별위 대자보 

https://twitter.com/yeonhayeon/status/865148079837560832/photo/1

 

어쩌구_4🅱 on Twitter

“춘천교대 성폭력대책특별위 자보”

twitt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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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05. 19. 

집담회 참가 후기 블로그 글 

https://brunch.co.kr/@eompebble/13

 

나는 어린이책 편집자이자 페미니스트다.

<여성+어린이+문학> 집담회를 다녀와서 | 5일 전인 지난 주 일요일, 5월 14일에 <여성+어린이+문학> 집담회가 있었다. 집담회는 저녁 7시 가톨릭청년회관의 작은 소모임방에서 열렸다. 가톨릭청년회관은 마포구 홍대역 인근이었고, 시간도 늦은 저녁이었기 때문에 나는 집담회에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했다. 주5일 나인투씩스 출근하는 직장인인 데다 항시 불면의 두려움을 갖고 사는 내게 일요일 저

brun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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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05. 29 

춘천교대 총학생회 성명서 

https://twitter.com/juniorfeminist/status/869190702520868867/photo/1

불러오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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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06.03. 

어린이문학출판계 성폭력 성명서 

https://docs.google.com/forms/d/1Dtu8wwaDvwqM7D6_s-d8_oxI8sEh0j_LC7z1tpQI3aQ/viewform?fbclid=IwAR12ITzJ1pP1a_GzOAmLNwEwBgF82ROfZZmc_EoDm_JhyKjvKzi8YdA48G4&edit_requested=true

 

어린이문학출판계 성폭력 성명서(1차 서명자, 1,236명)

어린이문학출판계 성폭력에 맞서는 연대의 행동에 참여합니다. 2017년 3월 21일과 22일, 강원일보와 강원도민일보에 보도된 한 국립대 교수의 제자 성희롱·성추행 사건은 어린이문학출판계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가해지목인은 어린이문학출판계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시인이자 평론가이며 피해자 A는 어린이문학 연구자·창작자가 되기를 희망하는 학생입니다. 지도 교수와 제자, 아동문학평론가와 작가 지망생이라는 위계적인 관계에 놓여 있는 상황에서 가해지목인은 여러 차례

docs.goog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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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03. 21

문학평론가 김지은 칼럼

http://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0633

 

[기울어진 극장] 산적의 딸들을 위하여 - 여성신문

아동문학 내 성폭력에 눈 뜨고말하고 귀기울이는 게 동화의 정신 초등학교 6학년 담임을 맡은 교사는 어린이가 청소년이 되는 순간을 지켜본다. 초임 교사가 6학년을 맡게 되면 학생과 나이 차이가 크지 않아서 ...

www.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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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3. 30. 

사건 이후 3년.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803301726005

 

“저는 피해자입니다, 사람들은 왜 용서 못 하냐고 저를 비난합니다”

지난 15일 오후 서울중앙지법 318호 법정. 서현욱 검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학교수의 성폭력 사건으로...

news.kh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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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04. 09. 

춘천교대 성폭력규탄모임 _ 페이스북 사진 

https://www.facebook.com/205967363467872/photos/a.206659053398703/206688706729071/?type=3&theater

 

춘천교대성폭력규탄모임

성폭력 가해 교수의 오피스 앞에 그를 규탄하는 춘천교대 내 학생들이 포스트잇을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성범죄자가 돌아올 곳은 여기 없습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www.faceb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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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09. 04. 

<여성+ 어린이+ 문학> 집담회 후속 기사 

http://m.khan.co.kr/view.html?art_id=201809041730001

 

 

"여자아이의 성은 왜 없나요" 페미니즘으로 다시 만난 아동문학

“클리토리스의 구조가 해부학적으로 밝혀진 게 1998년이라고 합니다. 쾌락을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 여성에...

m.khan.co.kr

 

 

<김이구, 해묵은 동시를 던저버리자, 창비,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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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인이 어린이를 만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먼저 자기 자신 속의 어린이 즉 자신의 어린 시절이나 지금 내면에 가고 있는 어린이가 있고, 둘째로 가족이나 이웃의 어린이, 셋째로 어린이글을 통해 만나는 어린이가 있다.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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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화자 논쟁은 동시 장르의 본질적이며 예민한 속살을 건드린 것이었는데, 어린이 화자 문제는 창작 주체 개인이 손쉽게 바꿀 수 있는 창작 방법의 선택으로 해소되기 어려운 것임을 우선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한국 문학사에서 동시라는 형식은 어린이가 읽기에 적합한 시가 아니라 그 자체로 독특한 미적 양식이다. 동시는 어린이를 핵심 독자로 삼지만 독특한 미적 자질을 갖고 있으며, 이러한 장르의 원리를 나는 “아이들을 향해 조율된 목소리‘로 말해진 시와 노래가 바로 동시.동요”라고 설명한 바 있다. 그런데 이렇게 어린이 독자를 향해 목소리를 조율할 때 흔히 선택되는 것이 어린이와 눈높이를 맞추는 방식이며 이를 위해 종종 어린이 화자가 설정된다. 이렇게 어린이 화자가 발화하는 방식은 동시 장르의 형성기부터 조성된 오래된 관습으로 동시 장르의 탄생과 그 역사를 같이 한다. 

화자가 어린일 때 어린이 독자가 느끼게 될 생소함과 불편함을 불식하고 어린이 독자가 친근하게 느끼고 내용에 공감하기 쉽도록 어린이 화자나 어린이 같은 목소리를 설정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화자나 목소리가 늘 공감의 효과를 불어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발화된 내용만이 아니라 화자를 주목하게 하는 효과를 발생시키는 예가 허다하다.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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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는 어린이 독자와 얼마나 가까이 있을까. 아이들이 성장하는 시기에 맑고 깊은 동시를 읽고 가슴에 품어서 어른이 되어서도 청아하고 간결한 마음을 유지하며 여전히 동시를 읽고 즐길 수 있다면 그런 인생은 출복일 것이다. 그런데 다양하고 자극적인 매체들이 어린이의 이목을 사로잡는 시대이니만큼 동시를 일상적으로 읽고 노래 부르는 수용문화를 기대하기는 매우 어렵다. 어린이 도자가 보통 40~70편에 이르는 작품이 수록된 동시집을 제대로 읽는 것은 상당히 예외적인 경우일 듯 하고, 동시가 어려 매체와 결합하여 어린이와 마날 수 있게 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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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어떤 정신을 어떤 형식에 담을 것인가, 그리하여 자신의 길을 찾아갈 수 있는 신인이라면 한국 동시사에 의미 있는 자기 목소리를 보탤 수 있을 것이다.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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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이후 현재까지 출간된 주요 동시집을 대부분 읽어 보았지만, 몇몇 작품집을 뺴고는 대부분 시적 긴장과 완성도가 떨어져 시를 읽는 즐거움을 얻지 못하였다. 동시도 기본적으로 시를 읽는 즐거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시’를 추구하다가 ‘동(아이)’을 놓쳤거나, ‘동’시가 돼야 하는데 시에 머물렀다거나 하는 것은 형식논리로는 성립할 수 있어도 해심을 비켜난 접근이다. 최고의 동시가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최고의 시가 돼야 한다. -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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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과 가능성을 가진 많은 시인들이 해묵은 관습에 얽매여 낡은 동시의 틀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다. 낡고 타성에 젖은 동시의 관념을 털어버리지 않는 한 재미없는 동시가 계속 나올 수 밖에 없고, 동시단은 생동감을 잃고 자기회로를 맴도는 어리숙한 동호인들의 자기만족을 위한 마당으로만 남아 있게 될 것이다. -208 

 

동시는 그 본질상 어린이를 의식하고 쓰는 시다. 그런데 그 어린이는 어떤 어린이인가? 흔히 ‘혀짤배기 동시’라고 지적되는, 어른의 유치한 아이 흉내는 패턴화한 작품은 이제 그다지 많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여전히 동시가 의식하고 있는 어린이는 좁은 사고와 제한된 경험, 제한된 희로애락의 감정을 지닌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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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중의 위와 같은 자기검열- 어린이 인식은 1950년대 이후 주류 문단의 동시 인식과 동궤에 놓이는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그리고 이런 어린이 인식, 어린이 관념은 수십 년을 경과한 21세기에도 여전히 동시 문단을 지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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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어린이의 살아 있는 모습을 느낄 수가 없다.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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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표현되어 있다. / 착상의 전개도 시인의 이름을 가렸을 때 누구만의 표현이라고 생각될 만한 개성을 보여 주지 못한다. / 소재를 보는 상상력이 발랄하지 못하다. 

 

+그러나 낡아빠지고 감동 없는 교훈성 구절과 착한 어린이표, 아름다움표 표현을 구사한 작품도 여러 편 같이 실려 있어서 이 신인들이 동시에 대한 자의식을 갖지 모사고 해묵은 동시 관념에 젖어 있음을 드러내 준다. 또한 거의 모든 작품이 압축적인 표현을 찾는 데 소홀해서 언어의 경제성을 보여 주지 못한 것도 커다란 약점이다. 이런 상황은 두 권의 작품집에 실린 여덟 명의 시인에게 별 차이없이 공통으로 드러난다. -221 

 

+시인이 사물의 본질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주체의 관념을 투사해버린다. 시인이 그려내는 사물은 궁극적으로는 시인의 주관으로 해석한 대상일 수 밖에 없다 할지라도, 그것은 대상의 본질에 도달하기 위해 몇 번이고 두드려 보기를 반복한 결과로서의 해석이어야 한다. 이때의 본질은 물론 자연과학적 또는 사회학적 사실과는 다른 시적 진실의 추구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의 관습은 사물의 본질을 발견하기 앞서서 서둘러 주관을 투사하기 일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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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가 어린이를 의식하고 씌어져야 하는 것은 밥을 지으려면 쌀을 구해 와야 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때 의식되는 어린이가 기존의 동시들이 그려 내던 어린이상이거나 사회 통념으로 퍼져있는 어떤 어린이상이라면 그 동시가 가질 수 있는 시적 매력은 반감된다. 뛰어난 시인은 주어진 어린이상을 받아들여 가공하지 않고 매번 새롭게 어린이를 발견해 한 편 한 편에 살아있는 어린이의 모습을 담아내려 한다.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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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눈으로 보고 아이의 마음을 담고 아이에게 즐거움을 주려는 시인의 시도가 편편이 배어있다.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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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뛰어난 시적 성과를 보여 준 역량 있는 시인들이 살아 있는 어린이를 담아내고 어린이 마음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치열하게 정진한 결과가 이렇게 제한적인 결실에 다다르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동시에 대한 이해나 체득이 미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어린이 존재를 제한적인 인격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어린이는 유한하다. 어린이는 그 존재의 조건으로 인해 지식도 경험도 감정도 유한하다. 이를 개념적으로는 부정하더라도, 두 시인에게는 이런 어린이상이 내면화되어 있어 어린이에 집중할수록 더욱 이러한 어린이상을 구현한 동시를 창작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창작과정을 통해 시인의 역량이 극대화되고 시의 파장이 무한히 넓어지거나 깊어지는 결과를 얻어 내지 못하였다. -225

 

+

<고양이 학교>의 작가 김진경은 최근 어떤 문학잡지의 좌담에서 “지금은 근대가 만들어 낸 아동이라는 개념 자체가 무너지는 과정이 아닌가 싶”다고 발언하였다. 이는 좀 더 본격적으로 검토해 볼만한 논제인데, 김진경은 ‘작은 어른’으로 간주되던 아동의 개념이 근대 산업사회로 넘어오면서 “일하는 어른들과는 구분된느, 근대 학교 시스템에 수용되어 국가가 요구하는 교육을 받는 일정한 연령까지의 아이들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바뀌었고, 따라서 아이들에게 지식 정보를 연령대별로 통제할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그렇게 해왔다고 지적한다. 이런 맥락에서, 지금의 어린이책 시장에서는 아동문학을 “철저하게 근대 아동 개념에 입각해서 보고 있”고 ‘이렇게 보면 아동문학의 지위가 정말 낮아져 버린다“고 진단한다. 그의 문제의식은 지식 정보에 대한 무차별적인 접근성, 핵가족의 해체, 소비사회 진입 등으로 인해 근대의 아동 개념이 붕괴될 정도로 아이들의 모습이 달라지고 있고, 따라서 어린이문학은 ”아이들이 가장 첨예하게 변하고 있는 지점을 정확하게 포착해서 그것들의 사회적 의미를 자꾸 작품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탈근대의 아동의 출현을 보면서 탈근대에 걸맞은 아동관이 필요함을 지적한 것인데, 매우 논쟁적인 문제제기다. 어린이를 미성숙한 존재이면서 독자적인 인격체로 보는 근대 어린이문학의 아동관은 지금도 여전히 어린이문학을 지배하는 관념인데, -226

 

+

아이의 노래 / 페터 한트케

 

아이가 아이였을 때

팔을 휘저으며 다녔다.

시냇물은 하천이 되고 하천은 강이 되고

강은 바다가 된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자신이 아이라는 걸 모르고

완벽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세상에 대한 주관도, 습관도 없었다

책상다리를 하기도 하고 뛰어다니기도 하고

사진 찍을 때도 억지 표정을 짓지 않았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질문의 연속이었다.

왜 나는 나이고 네가 아닐까?

왜 나는 여기에 있고 거기에 없을까?

시간은 언제 시작되었고 우주의 끝은 어디일까?

 

태양 아래 살고 있는 것

내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이

모였다 흩어지는 구름조각은 아닐까?

악마가 존재하는지, 악마인 사람이 정말 있는 것인지

내가 내가 되기 전에는 무엇이었을까?

지금의 나는 어떻게 나일까?

과거엔 존재하지 않았고 미래에도 존재하지 않는

다만 나 일 뿐인데 그것이 나 일수 있을까?

 

아이가 아이였을 때

시금치와 콩, 양배추를 억지로 삼켰다

그리고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모든 것을 잘 먹는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낯선 침대에서 잠을 깼다

그리고 지금은 항상 그렇다

옛날에는 인간이 아름답게 보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옛날에는 천국이 확실하게 보였지만

지금은 상상만 한다

허무 따위는 생각 안했지만

지금은 허무에 눌려있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아이는 놀이에 열중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열중하는 것은 일에 쫓길 때 뿐이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사과와 빵만 먹고도 충분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딸기만 손에 꼭 쥐었다

지금도 그렇다

덜 익은 호두를 먹으면

떨떠름했는데 지금도 그렇다

산에 오를 땐 더 높은 산을 동경했고

도시에 갈 때는 더 큰 도시를 동경했는데

지금도 역시 그렇다

버찌를 따러 높은 나무에 오르면 기분이 좋았는데 

지금도 그렇다

어릴 땐 낯을 가렸는데 지금도 그렇다

항상 첫눈을 기다렸는데 지금도 그렇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막대기를 창 삼아서 나무에 던지곤 했는데

창은 아직도 꽂혀있다

 

 

+

지금까지 동시단은 어린이를 너무 의식했다. 그 어린이는 시인의 몸 안이 아니라 바깥에 있었다. 기성 동시가 터를 두고 있는 어린이는 깡그리 잊어버려라. 몸에 배어 입만 열면 흘러나올 것 같은 해묵은 구절들도 우주로 펑펑 날려 버리자. -237

 

 

+

<아동기의 소멸>을 쓴 닐 포스트먼은 인쇄 매체의 보급과 교육 대중화에 따라 ‘발명’된 아동기가 전자매체 시대에 접어들어 흔들리고 있다고 본다. (.....) 아동기의 소멸을 보는 ‘어두운 절망’과 전자매체 시대의 새로운 자율성을 찬양한는 ‘낙관적 전망’ 사이에서 그 나름대로 균형을 잡아 보려고 한ㄷ. 버킹엄은 거대 글로벌 미디어 기업이 생산하는 서사와 이미지, 상품에 흠뻑 빠져든 현대사회의 아이들이 처한 상황을 ‘미디어 아동기’라 부르면서 현대의 아동기가 전자매체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생겨나고 규정되는 점을 주목한다. 근대와 탈근대가 교파하는 이 시대에 과연 어린이는 어디에 서 있는가? 우리 아이들에 대한 사회문화적 보고와 함께, 예민한 문학적 감수성으로 포착한 생생한 모습들이 풍부하게 나와 줘야겠다. -260 

 

 

<김이구, 해묵은 동시를 던저버리자, 창비, 2014>  

 

(컬럼) 왜 분노하는 대신 혐오하는가_ 박권일

[세상 읽기] 왜 분노하는 대신 혐오하는가 / 박권일

등록 :2016-02-11 19:58수정 :2016-02-11 20:15

 

선배 세대를 만나면 슬쩍 ‘헬조선’을 화제로 꺼내곤 한다. “우리 젊을 때는 더 힘들었다” “한국보다 못사는 나라가 얼마나 많은데 투정이냐” 같은 힐난이 아예 없진 않지만, 대다수가 공감을 표시한다. 젊은이들 참 열심인데 그만큼 보답받지 못한다고. 점점 살기 힘들어진다고. 그러면서 하나같이 하는 말이 있다. “바꿔야지, 같이 들고일어나야지.” 어떤 사람은 이렇게 비꼬기도 한다. “글쎄, 말로는 헬이다 지옥이다 하는데 잠잠하잖아? 아직 살만해서 그런 거 아닌가?”

 

‘아직 살만하니 저항하지 않는다’는 비아냥거림에 동의할 수는 없다. ‘살만한 나라’의 자살률과 출산율이 이 지경이란 건 말이 되지 않으니까. 그러나 레토릭의 과격함이나 언론의 호들갑에 비해 현실의 움직임이 미미한 것은 사실이다. 언어가 격하다고 해서 봉기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물론 없으나 담론과 실천 간의 이런 극단적인 비대칭은 확실히 기묘하다. 몇몇 사회적 원인이나 배경을 지적할 수 있을 테지만, 헬조선 담론이 무엇보다 혐오담론의 일종으로서 자국혐오론이라는 사실에 각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헬조선 담론이 내미는 선택지는 두 개다. 하나는 헬조선에서 탈출, 즉 ‘탈조선’하는 것이다. ‘금수저’와 ‘능력자’ 같은 극소수만 쥘 수 있는 카드다. 나머지 하나는 ‘죽창’으로 서로를 찔러 죽이는 공멸이다. 이 죽창은 실제 무기가 아니라 대안 없는 절망의 물화된 상징이다. 다른 선택지, 예컨대 헬조선을 개선하거나 전복시키는 등의 방법은 처음부터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왜일까?

 

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혐오와 수치심>에서 분노(anger)와 분개(indignation), 그리고 혐오(disgust)를 구별해 설명한다. “혐오는 자신의 몸 안과 밖이라는 경계와 관련이 있다. 그 감정은 자신을 오염시킬 수 있는 것에 대한 거부를 표현한다. 이와 달리 분개는 부당함 또는 위해에 대한 사고가 중심을 이룬다.” 분노는 주체로 하여금 대상으로 다가가게 만든다. 논박을 하든 보복을 하든, 어쨌든 주체는 대상과 마주쳐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혐오는 다르다. 주체를 대상과 가능한 한 멀리 떨어뜨린다. 동물적인 것, 열등한 것이 나를 오염시킬까 꺼림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피하든가, 아니면 대상을 배제하거나 말소해야 한다. 요컨대 혐오를 다른 감정과 구별하는 가장 큰 특징은 ‘주체와 대상의 분리’다. 이 정동은 대상에 대한 개입을 끊임없이 방해한다. 분노는 참여와 저항을 부르지만, 혐오는 도피와 방기로 이어진다.

여기서 쉽게 어떤 당위, 즉 ‘잘못된 일에는 분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신, 질문을 던져보자. 왜 분노해야 하는 것을 혐오하게 되었는가? 왜 오늘의 청년들은 잘못된 일을 “미개하다”고 하는가? 불평등과 부정의를 판단할 분별력이 없어서? 그렇지 않다. 판단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불평등과 부정의의 시정을 체념했기 때문이다. 혐오해서 체념하게 된 것이 아니다. 체념을 합리화하기 위해 혐오가 동원된 것이다. 그 결과 사회 모순은 자연재해처럼 묘사되고, 나와 무관하게 발생한 사태로 타자화된다. 거기서 나는 내 몫의 책임을 짊어진 연루자가 아니라 재난의 일방적 피해자일 뿐이다. 지옥은 나에게 고통을 주는데 나는 너무 혐오스러워 지옥에 손댈 수 없다. 그렇게 지옥은 날이 갈수록 더 끔찍해진다.

 

어찌해야 하는가.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혐오라는 ‘증상’이 아니라 체념이라는 ‘원인’에 집중해야 한다. 그것은 어떻게 주체가 정치적 무력감을 극복하고 세계 속에 의미 있게 개입할 좌표를 찾아내는가라는, 식상하되 결정적인 질문의 답을 찾는 지난한 여정일 것이다.박권일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박권일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30008.html#csidxb93dffa98259666a91c05b42e57277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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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색은 사랑하는 시간이었다 13_ 정선율

 


 

파란색은 사랑하는 시간이었다 13 

 

너무 뜨거운 곳에선 바람을 기다리면 돼 

바다가 남겨 둔 꿈을 

 

엄마, 작게 흔들리는 저 바다가 어른이 되면 바다는 무슨 꿈을 꾸어요 

 

엄마, 저 바다가 어른이 되면 흰 돛단배 함께 타고 놀던 물고기들은 모두 어디로 헤엄쳐 가요 

 

새들이 물고 떠나간 파란 바람을 

새들은 기억해 주어요? 

 

저 바다가 앞니 빠진 할머니가 되면 내 퉁퉁한 볼 부드러이 감싸며 괜찮다 괜찮다 해 주던 엄마는 무슨 꿈을 꾸어요

 

엄마, 바다는 무슨 꿈을 꾸어요* 

 

 

*위 전 곡은 각 음원 사이트에서 "엄마, 바다는 무슨 꿈을 꾸어요"곡으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정선율, 파란색은 사랑하는 시간이었다13, 동시마중56호> 


#세계의 첫 번째 질문 #시의 질량과 동시의 질량 

 

1

이 세계에 처음으로 내려온 질문들을 마주한다. 첫 번째로 내려온 질문은 세계를 미묘하게 뒤틀어놓는다. 시인의 언어는 이 가당치도 않은  은 질문을 내려놓는다. "바다는 무슨 꿈을 꾸"는지. 작은 아기 바다가 어른 바다가 되어가면서 "함께 타고 놀던 물고기들은 모두 어디로 헤엄쳐" 가는지. 새들은 파란 바람을 기억하는지, 엄마는 무슨 꿈을 꾸게 될지. 이 모든 질문의 시작에는 '호기심으로 가득찬 아이의 마음'이 있다. 

 

2

혁명가는 세계를 사랑하는 방식으로서 세계를 전복하려 들고, 아이는 세계를 사랑하는 방식으로서 세계에 질문을 내어놓는다. '호기심'이란 사랑하는 방식을 결정짓는 첫 번째 질문인지도 모른다. 

 

3

얼마전 김창완 선생님의 북토크 영상을 보다가 "시가 촘촘한 그물로 언어를 낚는 것이라면 동시는 성긴 그물로 언어를 낚는 것이죠." 라는 말이 떠나지 않는다. "성긴 그물로 대어를 낚을지 누가 알겠어요." 라는 유-우-머까지. 요즘 자주 고민하고 있는 대중성과 인간성. 단순함과 치밀함. 이것에 대해서 한 번 떠올려 보게 되는 작품. 

 

 

 

 

 

 

<정선율, 파란색은 사랑하는 시간이었다, 동시마중56호> 

윤복진_ 석중과 목월과 나 (김제곤의 자료로 읽는 동시사 44)

 


1

"나도 석중처럼 '문학의 음악'을 좋아한다. 그리면서도 나는 동요에서 '시'를 발견하려고 했고 '시의 품격'을 갖추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 그러한지 나의 동요 가운데는 소곡적 동요가 있으냐 하면 동요적 소곡이 있다. 또 민요적 동요도 있다. 그러나 나는 '동요'를 버리고 '시'로 달아나지는 않았다. 내가 '시'를 찾으려 하고 '시의 품격'을 갖추려는 것은 '문학으로서의 동요'를 창작하자는 것이다. '동요'도 '문학'이고 '예술'인 바에야 문학으로서 예술로서의 품격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189쪽, 동시마중 56호)  

 

 

"다른 하나의 석중이가 되어 보자꾸나. 다른 하나의 목월이가 되어 보자꾸나! 다른 하나의 내가 되어 보자꾸나! (192쪽, 동시마중 56호) 

 

 

 

 

#기록해둘 만한 문장 #시의 격, 문학의 격에 대한 생각들이 드리치는 #김제곤 선생님 감사감사  


<동시마중 56호, 김제곤의 자료로 읽는 동시사 44> 

없는 개_ 송진권

없는 개 

 

개가 죽고 

감나무 밑에 빈 개집 

빈 개집 앞에 개밥 그릇만 놓였습니다 

바닥이 반질반질한 

개밥 그릇만 놓였습니다 

 

빈 개집을 들여다보던 할머니가 

개밥 그릇에 떨어진 땡감을 주워 듭니다 

할머니가 빈 개집 안을 들여다봅니다 

 

꼭 꼬리 치며 나올 것 같아서 

컹컹 짖으며 드러누울 것 같아서 

 

 

없는 개는 

없는 개지만 

없는 채로도 

아직 개집 안에 삽니다 

 

 

<송진권, 어떤 것, 문학동네, 2019> 

 

 


#예감의 영역 #예감으로서의 부재 

 

1

이 작품의 앵글은 정확하게 한 곳에 집중하면서 롱테이크(long-take)로 담아낸 풍경이다. 한 곳에 서서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는 그 자리까지도 느껴지는 작품이다. 1연은 개집과 개밥 그릇이 놓여있는 풍경을 묘사한다. “감나무 밑 빈빈 개집” 이미지는 작품의 초점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준다. “바닥이 반질반질한 개밥 그릇”은 이미지의 해상도를 높여준다. 2연에서 할머니가 등장한다. 할머니는 빈 개집을 두 번을 들여다본다. 한 번이었으면 그냥 지나는 길에 눈길이 스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할머니는 “개밥 그릇에 떨어진 땡감”을 주워들어 “빈 개집 안을” 다시금 들여다봄으로서 “빈 개집 안”의 정서를 담아낸다. 3연에서 할머니의 마음 속 말이 툭, 툭 2행으로 간결하게 진술된다. 할머니가 빈 개집을 들여다보는 이유는 “없는 개”가 나올 것 같고, 드러누울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다. “없는 개”가 있을 것 같은 예감 속에 “없는 개”는 있다. 3차원 속에 “없는 개”는 존재하지 않지만 예감 속에서 “없는 개”는 존재한다. 꼭,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의 방식으로 말이다. 4연의 마지막 진술은 “예감의 존재론”을 잘 보여준다. “없는 채로도/ 아직 개집 안에 삽니다” 없는 개는 있을 것만 같은 예감 속에서 희미하게 살아있다. 예감은 도래하지 않은 사건에 대한 감각이다. 아직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에 ‘앎’이 될 수 없고 오직 ‘감’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 할머니의 예감 속에 없는 개는 있다. 자신에게도 다가오는 죽음(없는 개)의 예감을 느끼며, 빈 개집을 들여다본다. 오래토록. 

 

 

 

 

 

<송진권, 어떤 것, 문학동네, 2019> 

너도 올라오겠어? _ 김개미

 


너도 올라오겠어? 

 

 

 

집에 있으면서 없는 척 

자유를 만끽하려면 

사다리를 놓고 지붕 위로 올라와 

아무도 찾아내지 못하게 

사다리를 멀리 밀어 버려 

 

방 정리하란 엄마 잔소리도 

칼싸움하자고 귀찮게 구는 동생도 

여기까지 따라오진 못해 

여긴 온통 잠자리 날개뿐이야 

 

나를 좀 봐, 벌렁 드러누워 

바람의 안마를 받고 있어 

노을 영화관에 앉아 

구름 감상을 하고 있어 

 

별이 발등에서 깜빡대기 시작하면 

온 식구가 허둥대며 

나를 찾아 헤매겠지 

 

가만, 그런데 어떻게 내려간담?

 

 

<김개미, 어이없는 놈, 문학동네, 2013> 

 

 

 


#김개미론 스케치 #주체의 궁핍과 쪼그라든 주체의 전략

 

1

혼자인 아이. 혼자 남겨진 아이. 혼자 버려진 아이가 여기 있다. 그래서 어떤 아이A는 장롱 속으로 들어간다. “한낮에도 깜깜한/ 밤이 필요해서/ 장롱 속으로 들어간다”(장롱 속으로 들어간다) 또 어떤 아이B는 지붕으로 올라간다. “집에 있으면서 없는 척”하면서 “아무도 찾아내지 못하게/ 사다리를 멀리 밀어 버”(너도 올라오겠어?)리고 혼자가 된다. 어떤 아이C는 그림 속으로 숨는다. “내가 그린 코뿔소는/ 귀를 틀어막은 소/ 눈을 꼭 감은 소”(누굴 닮아서)가 되어 그림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김개미 시인은 혼자인 아이가 하고 있는 놀이를 담아낸다. 

 이는 앨리스 증후군(Alice in wonderland Syn-drome)을 앓고 있는 주체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는 대상이 작아 보이거나(쪼그라들거나), 크게 보이거나(과장되거나), 왜곡되어 보이는 증상을 말하는데, 주ㅡ           ㅡ 관 적인 이미지의 변용을 일으키는 증후군(김영도, 2006)이다. 이를 두고 “주체의 궁핍”(destitution of subject)에 의한 증상이라고 하기도 한다. 허기진 주체들의 놀이가 김개미의 작품 곳곳에 드러난다.  

 

쪼그라든 시적 주체는 타자와의 교섭이 필요한 현실세계의 바깥, 미지의 세계로 향한다. 미지의 세계에는 엄마 잔소리도, 떠들지 말라는 담임선생님도 없다. 현실의 중력이 사라진 곳으로 간다. <너도 올라오겠어?>에서 화자는 1연에서 “사다리를 놓고 지붕 위로 올라와/ 아무도 찾아내지 못하게/ 사다리를 멀리 밀어 버”린다. 사다리를 밀어버림으로서 지붕의 공간은 타자의 침입을 허용되지 않는 미지의 공간으로 변모한다. 2연에서 “방 정리하란 엄마 잔소리도/ 칼싸움 하자고 귀찮게 구는 동생도/ 여기까진 따라오진 못”하게 한다. 말의 중력을 지워낸다. 이제 원더랜드로 진입한다. 3연에 “바람의 안마를 받고 있어/ 노을 영화관에 앉아/ 구름 감상”한다. 원더랜드 속에서 시적 주체는 4연에 들어서면서 “온 식구가 허둥대며/ 나를 찾아 헤매겠지”라며 자신을 찾는 모습을 상상하며 자신을 찾아주길 원한다. 쪼그라든 주체의 자기 전략은 자신을 조금씩 지워냄(주체의 부재)으로서 타자를 끌어들인다. 작품의 마지막 연에서 시적 주체는 깨닫는다. 지붕으로 올라올 수 있는 사다리를 밀어버렸다는 것을. 타자가 올라 올 수도 없고, 주체가 내려갈 수도 없는 곤경에 빠졌다는 것을. <너도 올라오겠어?>는 쪼그라든 주체들이 처해있는 곤란함에 대한 하나의 보고서로 읽히기도 한다. 

 이에 반해 과장된 시적 주체는 타자와의 교섭에 있어서 매우 적극적이다. 그들의 미지의 세계가 아니라 언어의 중력을 받아들이면서 과장을 전략으로 삼는다.  <넌 그런 날 없니?>는 이를 잘 보여준다. “누가 말만 걸면/ 몸을 비비 꼬며 낄낄”거리고 “별일 아닌데/ 원숭이처럼 책상을 두드”린다. 과장된 주체가 노리고 있는 것은 의미체계가 아니다. 그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느낌의 효과다. “누가 부르기만 하면/ 귀청이 떨어지도록 큰 소리로/ 대답”을 하는 것은 의미를 전달하기보다 느낌을 효과 있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의미를 원하는 말의 중력에 적극적으로 의미 이전의 느낌의 효과로 개입한다. “알지도 못하면서/ 번쩍번쩍 손을 들”면서 한 마디 덧붙인다. “쓸데없이”. 쓸모에 따라 의미의 논리가 구성되기 때문에 과장된 시적 주체는 쓸모없는 행동이 된다. <넌 그런 날 없니?>는 쓸모 있어야만 하는 세계에 맞선 별 쓸모없는 시적주체들이 처해있는 곤란함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신경질적 보고서로 읽히기도 한다. 

 

3

 우리시대에 곤경에 처한 시적주체들에 대한 김개미식 보고서에는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슬픔이 세공되어 있다. 시대적 곤경에 유머를 잃지 않고 아이들과 “아픈 눈을 뜬 채로” 마주하겠다는 것이 김개미의 윤리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김개미, 어이없는 놈, 문학동네, 2013> 

빛보다빠르게미래로달아나라 -이상,삼차각설계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