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순 "돼지라서 괜찮아" -태어나는 돼지들을 위하여


                                                                                                          <수유너머 인문사회과학연구원 봄학기 에세이>



김혜순의 “돼지라서 괜찮아”
-태어나는 돼지들을 위하여- 

                                                                                                                                                        서한영교


1. 포르노적 부활

전 세계의 섹스심벌, 마릴린 먼로. 벌거벗은 몸으로 침대 위에 누워 엉덩이를 흔들면 남성-남근들은 마릴린 먼로가 덮고 있는 이불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듬었다. 치마 밑으로 솟구치는 바람이 되어 그를 향해서 있는 힘껏 불었다. 그가 상연한 세계로 들이닥친 남성-남근들의 탐욕으로 충만한 시선은 그를 실제보다 더 섹시하게 만들었다. 


화면같이 청결한 세상에서 살았었다고

은빛 비행기를 타고 가서

거울 속처럼 깨끗한 침대 위에

누워 이마에 손을 올렸었다고

하늘하늘 치마를 걷었었다고 하지 마라


(...)


양손에 돼지 가슴이 담긴 봉지를 든 여자가

아까부터 같은 얘기를 계속 중얼거리며 걸어가고 있다 

오줌 같은 비가 한 모금 두 모금 떨어지고 있다



 -『마릴린 먼로』부분



남성-남근은 “청결한 세상에서”, “거울 속처럼 깨끗한 침대 위에/ 누워”, “치마를 걷었던” 그를 보고 있다. 그 시선 아래에서 마릴린 먼로의 배역이 결정되고, 그 배역 속에서 마릴린 먼로는 “같은 얘기 계속 중얼 거리”게 하는 배역을 맡긴다. 남성-남근이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대답: 자기 욕망. 이 대답에 대한 라캉-지젝의 대답. 대타자에 의해 전도된 자기욕망. 즉, 도착적 시선(빛) 아래서 남성-남근이 본 것은 그들 자신의 욕망이다. 마릴린 먼로가 실제로 느꼈을 “유배지에 있는 것처럼” 느끼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며 4.5mg의 수면제 님부탈과 8mg의 안정제 바르비루투를 집어 삼켜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관해서는 보이지 않다. 마릴린 먼로는 그저 스크린 위에 있을 뿐이다. 남성-남근이 상연하고 있는 스크린 위에 그들의 환상을 위해 치마를 걷어 올리는 배역을 맡겼을 뿐이다. 마릴린 먼로는 정확하게 욕망의 원인-대상으로 자리 잡는다. 그래서 마릴린 먼로는 영원히 “청결한 세상”인 환상 스크린 속에서 “같은 얘기를 계속 중얼 거리”며 반복된다.


그리하여 최후의 배역에 철컥 달라붙는다


내가 싼 것 위에 몸을 철퍼덕 싸는 배역

영혼이 빠져나간 다음 쇠갈고리에 걸리는 배역

뭉개지며서 내가 내 혀 맛을 볼 수 있게 되는 배역



-『마릴린 먼로』부분

“청결한 세상” 속에 살고 있는 마릴린 먼로의 “최후의 배역”은 수면제를 집어삼키고 맞이한 죽음이었을까. 아니다. 그들은 다른 배역을 맡길 준비하고 있다. 그것은 포르노속으로 마릴린 먼로를 등장시키는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비밀(속살)을 간직하며 환상을 작동시키고 상징으로서의 마릴린 먼로를 발가벗길 예정이다. 2011년 마릴린 먼로의 포르노 필름이 경매에 붙여졌다. 약 2억 7000만원에 낙찰된 포르노 필름 속에 마릴린 먼로는 마침내 상징이 제거되어 벌거벗은 채 등장했다. 먼로의 마지막 배역이 상연되었던 것은 극장이 아니었다. “오줌같은 비가 한 모금 두 모금 내리는” 어둡고 침침한 모니터 위였다. 섹스 심벌 마릴린 먼로가 완전히 벌거벗었을 때, 상징은 해체되었다. 그저 벌거벗은 살덩어리의 실재로 등장했다.

아무래도 돼지를 십자가에 못 박는 건 너무 자연스러워, 의미없어

아무래도 돼지가 죽어서 돼지로 부활한다면 어느 돼지가 믿겠어?



-『돼지는 말한다』부분


먼로를 “십자가에 못 박는 건 너무 자연스러워, 의미없어” 하는 돼지(포르노 관객)는 돼지가 죽어서(환상 스크린 속 먼로) 돼지로 부활(포르노 모니터 속 먼로) 시켰다.
섹스심벌이라는 상징을 “의미없어”라며 거부하였다. 상징도 없고, 의미도 없는  벌거벗은 살덩어리 먼로로 부활시켰다. 상징적 돼지에서 벌거벗은 포르노 돼지로 부활시켰다. 오늘날에는 마릴린 먼로 뿐만 아니라 세월호 참사라는 사회적 상징을 제거하고 희생자들을 퉁퉁 불은(벌거벗은) 어묵으로 부활시키기도 하고, 5.18 광주민주화항쟁 당시 시신들을 두고 홍어로 부활시키기도 한다. 오늘날의 포르노 관객들은 상징적 의미를 거부하고 벌거벗은 실재와의 충돌에서 오는 효과에 환호한다. “오줌같은 비가 한 모금 두 모금 떨어지”는 포르노 모니터 앞에서 환호하고 있다.

하늘에 분홍 당신 떠간다 발가벗은 당신

나는 당신 알몸 쳐다보기 좋아서 손뼉을 짝짝짝 친다



(...)

분홍색 당신 몸속에서 기지개 켜는 시간 너무 좋아서

당신이 누구인지 누구의 딸인지 누구의 엄마인지 모두 잊고서
내가 네 개의 발에 구두 신고 짝짝 짝짝짝 손뼉 발뼉을 친다

-『핑크 피그 플루이드』부분


포르노 관객들은 “당신이 누구인지 누구의 딸인지 누구의 엄마인지” 전혀 상관없이 “짝짝 짝짝짝 손뼉 발뼉을” 치며 환호한다. 상징을 발가벗기고, 의미를 발가벗기고 남는 것은 오직 외설적 효과뿐이다. 


돼지다, 도무지 밖을 본 적 없는 돼지다, 내내 돼지다, 우울한 돼지다, 늑대가 온다 외치는 돼지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돼지를 왕으로 뽑은 돼지다, 오 멋진 시궁창! 외치며 베개를 껴안는 돼지다, 뒈질 돼질 낳아주신 엄마를 잡아가면 좋겠네 혼자 웃는 돼지다, 온 세상이 다 살쭉이라고 생각하는 입술이 부르튼 돼지다, 4XL돼지다, 침대에 꽉 찬 돼지다, 그 이름 도무지 돼지다, 바다 건너란 말만 들어도 벌벌 더는 돼지다, 고개를 들어본 적 없는 예예 돼지다,
(…)
눈동자에 무엇을 껴입었니 돼지, 왜 돼지가 돼지인 줄 모르나 돼지, 사진은 아는데 거울은 아는데 너만 모르는 돼지, 탄식 돼지, 후회 돼지, 이빨 뽑히고 꼬리 잘린 다음 입 안에 혼자 남은 외로운 혀 돼지, 그러나 입만 벌리면 돼지 돼지 소리가 나는 돼지, 고기 돼지




-『뒈지는 돼지』부분 


그들은 “의미없어”를 외치며 돼지로 퇴행-부활했다. 자기 거울 이미지 속으로 부활했다. 타자들의 시선이 차단된 자신들의 “오줌같은 비가 내리는” 방 모니터에서 부활했다. 그 누구도 그들을 보고 있지 않다. “도무지 밖을 본 적 없는 돼지”들은 “고개를 들어본 적 없는” 돼지들이다. 돼지들이 있는 곳은 바라보는 시선과 (타자에 의해)보여지는 응시의 간극이 지워진 자리에 등장하는 포르노적 거울의 방이다. “밖을 본 적 없는 돼지”들이 거주하는 자리다. 돼지들의 “눈동자에 무엇이 껴입”혀있는데 그것은 오직 바라볼 뿐인, 시선의 벽이다. 돼지는 돼지를 보고(시선) 있지만 그런 돼지를 바라보고(응시) 있는 돼지를 위한 자리는 없다. 오직, 볼 뿐. 시선과 응시의 간극에서 발생하는 환상의 자리도 없다. 비밀도 없다. 수수께끼도 없다. 오직 벌거벗길 뿐이다.
라캉-지젝에 의하면 포르노는 “타자의 응시와 주체의 시각의 이와 같은 일치”로서 “우리의 시각과 타인의 응시 간의 이러한 중첩, 이러한 일치"라고 말한다. 이는 거울단계의 아이들이 상상적 자아를 형성하는 시선과 응시의 거리가 중첩되는 것과 같다. 그래서 “포르노그라피는 본래 도착적”인데 포르노그래피의 도착성은 “갈 데까지 다 가서 우리에게 지저분한 세부들을 전부 다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포르노그래피의 형식이 “선험적으로 도착적인 위치를 점유하도록 강제”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응시와 시선의 거리를 메워버리는 것이 포르노라는 것이다. 포르노는 응시와 시선의 간극을 지워버림으로서 “마비된 대상-시선”으로 환원한다. “타인 내에 있는 대상-응시의 지점을 알고도 놓치거나 축소”함으로서 포르노는 상상계에 머무른다. 먼로의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은 그곳에 없다. 포르노는 닫힌 공간에서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확인하고 있을 뿐이다. 이곳이 포르노 원룸이다.
돼지들은 포르노 원룸에 갇혀있다. 그곳에서 “왜 돼지가 돼지인 줄 모르나 돼지”로 남는다. 돼지는 돼지인줄도 모른다. 알 수가 없다.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다. 그곳은 먼지 하나 없는 데카르트의 원룸이고, 헤겔의 “순수한 자기관계”의 원룸이다. 포르노 원룸 안쪽에 지내고 있는 돼지들의 실재는 “이빨 뽑히고 꼬리 잘린 다음 입안에 혼자 남은 외로운 돼지”이고 혼자 웃는 돼지”이고 “고개를 들어본 적 없는 예예 돼지”이며 “일평생 나를 타고 놀아”나는 돼지이다. 하지만 돼지들은 “무엇보다 제가 돼지일 줄 모르는” 돼지들이다. 그들은 상징계로의 진입을 거부하며 그저 “우는 소리”를 “비명”으로 지르며 “교성”을 내뱉는 포르노 속의 마릴린 먼로를 보고만 있다.



2. 포르노 원룸

먼로의 포르노가 끝나고 포르노 관객들은 충만해졌을까? 기쁨과 환희로 충만한 신체가 되어 삶의 의지로 가득한 주체로 이행하게 되었을까? 대답: 아니다. 보다 나은 대답: 아니, 그들은 또 다른 포르노를 찾아 나선다. 보다 완전한 대답: 포르노 원룸을 응시하고 있는 대타자의 시선을 못 본척(도착증)하거나 그 시선을 지워버리면서(편집증) (퇴)행위로의 이행 중이다. 

여자는 굴 껍데기 속에
굴처럼 미끈거리는 집을 지었습니다

집은 굴처럼 쉽게 상하고 입속에서 미끈미끈 씹혔습니다


(...)

엄마는 입속에다 아기를 길렀습니다

아기는 어마를 아껴서 파먹었습니다
아기가 여물어갔습니다

엄마! 세상에서 제일 먼 곳이 어디야
먹을게 없는데지!
나는 대답했습니다


(...)

새끼는 하루 종일 먹을 거 먹을 거 하고 

나는 아는데 내 배속의 끼룩끼룩
늘 배고픈 돼지는 모르는 것

그것은 나의 끝 

썩은 굴처럼 문드러질 나의 몸젖


갈매기 한 마리 떨어진 제 눈알을 쪼아 먹고 있네



-『키친 컨피덴셜』부분

그들이 퇴행한 곳은 굴 껍데기 속 같은 “엄마의 입속”이다. “엄마의 입속”에서 아기는 자란다. 엄마와 나의 동일시를 방해하는 응시로부터 숨기 위해 입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붉은 살덩어리가 꿈틀거리는 그곳에서 아이는 “엄마를 아껴서 파먹”으며 “여물어”가고 있다.

엄마의 가슴이 아이스크림처럼 폭폭 떠 먹히고 실밥이 풀린 손들이 너덜너덜 국 냄비 속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곳 이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서쪽 하늘을 숟가락으로 닥닥 긁어 먹는 달의 뼈를 고아 뽀얀 국물을 만들고 거기에 땅속 시신들의 육즙을 곁들여 마시는 곳 이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키친 컨피덴셜』부분


“차마 꿈엔들 잊”혀지지 않는 엄마의 입속은 엄마와 자신의 완전한 동일시가 이루어졌던 거울 안이다. 엄마를 “아이스크림처럼 폭폭 떠”먹을 수 있었던 거울의 안이다. 포르노 관객들은 꿈속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다. 도착적 자아의 탄생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타자라는 창문(시선)이 없는 포르노 원룸(입속)에 고집스레 존속(insist)하려한다.
엄마가 있는 부엌(입속)에서는 계속해서, 쉴 새 없이 음식들이 만들어진다. 그곳의 음식들은 실감은 나지만 질감이 없다. 상상적으로 실감나지만 실재가 없기 때문이다. 그 곳에서 “새끼는 하루 종일 먹을 거 먹을 거 하고” 보채고 엄마는 “파란 칼”을 꺼내들어 “늘 배고픈 돼지는 모르는” 음식을 내놓는다. 먼로의 포르노가 끝이라도 또 끊임없이 다른 포르노를 떠도는 것과 비슷합니다. 배가 부르다는 것은 “그것은 나의 끝”을 상징하기에 계속해서 먹어도 속이 더부룩하지 않는다. 실감은 나지만 질감이 없는 세계, 그곳에 고집스레 존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는 끊임없이 요리한다. 쓰레기와 요리가 동시에 만들어진다. 내가 먹는 것이 쓰레기인지, 요리인지 알 길이 없어진다. 자본주의 체제는 이것을 정확하게 노린다. 끊임없이 잉여를 생산한다. 잉여가 가치를 가지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생산되어야 한다. “엄마! 세상에서 제일 먼 곳이 어디야” 엄마는 대답한다. “먹을게 없는데지!” 길러진 아기에게 가장 먼 곳은 바로 엄마가 없는 곳, 엄마의 외부이다. 타자의 응시를 받아들이는 곳이다. 그곳은 길러진 아기에게는 먹을 것이 없는 곳이다. 엄마와의 상상적 동일시 속에서만 아기의 먹을 것은 요리되기 때문이다.

돼지9 길러서 먹어주세요

돼지9 먹고 울어주세요

돼지9 새끼도 낳아드릴께요

돼지9 슬픈 인생이었다고 한 번만 말해주세요

돼지9 나를 잘 싸서 준비해주세요

돼지9 창자는 줄에 걸어주세요

돼지9 하나도 버리지 말아주세요

돼지9 트림은 그렇게 심하게 말아주세요


맛있는 걸 당신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


모두 이름이 같은 돼지


돼지들이 걸어온다

다 먹어 치웠는데 또 걸어온다

배가 불러 죽겠는데 또 걸어온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당신』부분


포르노는 계속된다. 포르노 관객들이 깨닫지 못하는 거울이미지는 결국 대타자의 시선에 의해서 만들어진 “가짜”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 “가짜”를 알아차린다고 하더라도 포르노 관객은 “다른 가짜”로 눈을 돌릴 뿐이다. “가짜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그 가짜들은 이름이 없어서 이름이 모두 같다. “돼지9 원피스 돼지 돼지9 투피스 돼지 돼지9 넥타이 돼지” 처럼 끊임없이 만들어진다. “돼지9”들은 포스트모던하게 분열하며 증식한다. “다 먹어 치웠는데 또 걸어온다/ 배가 불러 죽겠는데 또 걸어온다” 이는 오이디푸스의 금지를 반대하면서 실재로 나아가 해방되길 원했던 들뢰즈의 분열증자의 그것과도 닮아있다. 배가 부르면 그만 먹어야 한다는 금기를 내면화하기를 거부한 분열증자의 그것 말이다. 돼지들은 금기 없이 무한 증식한다. 그 어떤 곳이어도 상관없다. 


구정물 가득 든 몸뚱이

한 우리에서 꿀꿀거리는

돼지들 어째서 다 똑같이 생겼는지

(...)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건

엄마 되고 싶은 애새끼들

아빠 되고 싶어 훌쩍거리는 애새끼들


아빠는 아빠 만들려고 나를 기르고요

엄마는 엄마 만들려고 나를 길러요


몸에 달라붙은 엄마아빠 냄새 때문에

몸 흔들어 털어버리는 중이에요

나는 시방 더러워요

엄마아빠 그림자 얼룩진 몸뚱이는 정말 더러워요


나 나 나 나는 죽지만 엄마아빠 영원히 살아요


엄마는 기름진 구름처럼 더럽고요

아빠는 더러운 물이 끓어서 더 더러워요 

-『어두운 깔깔 클럽』부분

아이는 어머니와의 동일시에 실패할 운명을 타고났다. 거울 속에 자신이 확인한 거울이미지가 어머니의 욕망이라는 것을 확인한 아이는 어머니와 자신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거울이미지 속에서 자신이 본 것은 스스로의 욕망이었으나, 사실은 그것은 자신의 욕망일 거라고 여겨지는 대타자(어머니)의 관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아이가 그러한 분리를 받아들이 않는다면. 즉, 어머니와의 동일시를 고집한다면. 그래서 어머니의 시선을 지워버린다면. 아이는 상징계의 질서로 입문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상상계를 고집스럽게 집착하는 도착증적 자아로 퇴행한다. 오이디푸스콤플렉스와 같은 주체 통과의례를 성공적으로 겪지 못한 아이는 어머니-되기의 불가능성을 받아들이고 아버지”처럼 되기”를 겪지 못한다. 주체는 비-주체로 퇴행한다. “나는 아버지가 아님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라는 역설이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이의 욕망은 근친상간적 욕망을 포기하지 못한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것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것은 “구정물 가득 든 몸뚱이”일지라도 말이다. 이제 “아빠는 아빠 만들려고 나를 기르고요/ 엄마는 엄마 만들려고 나를 길러요”처럼 “나는” 아빠와 엄마의 보충물로서 자리 잡는다. 그래서 “나는 시방 더러워요/ 엄마아빠 그림자 얼룩진 몸뚱이 정말 더러워요”가 된다. 아이의 포르노적 동일시는 자신을 끊임없이 “나 나 나 나는 죽지만 엄마아빠 영원히 살아요”로 직진한다.
라캉-지젝은 이를 두고 “영원한 생존이라는 남근적 세계는 (성)도착의 세계이다.(...) (성)도착이란 죽음과 성이라는 실재에 저항하는 방어(...)뿐만 아니라 죽음의 불가피성에도 저항하는 방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도착적인 시나리오가 상연하는 것은 ‘거세에 대한 부인’이다. (...)도착자의 불멸성은 코미디적인 불멸성이다.” 라고 한다. 주체의 입문의 계기가 되는 거세(언어)를 부인하며 “죽음만 싸지르는 엄마아빠”를 선망하며 동일시에 대한 고집을 피우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퇴행적 도착증은 거세공포에 시달리며 엄마아빠의 파편화된 신체의 일부 속으로 미끄러져 “엄마의 혹은 아빠의 창자가 되려는 창자를 흔들고 토하는 밤”의 시간을 맞이하게 된다. 페니스로의 퇴행 충동은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건/ 엄마가 되고 싶은 애새끼들/ 아빠 되고 싶어 훌쩍거리는 애새끼들”을 만든다. 포르노가 상연되고 있는 포르노 원룸에서 타자의 응시가 지워진 자리에서 도착적 돼지는 이 세계가 어서 망해버리길, 전쟁이라도 나서 다 리셋 되어 버리길 바라며 무한히 반복되는 죽음충동에 시달린다.



3. 철근콘크리트 천황 폐하!

나는 지금 벽 앞에 앉아 꿀꿀거리는 돼지 기분이에요
시간을 백열등처럼 매달아 놓고
불안이 마련해준 특별 방석에 앉으셔서
돼지더러 돼지를 버리라 닦달하시니 대단하시네요

-『철근콘크리트 황제 폐하!』부분
 

포르노에 손뼉 치는 돼지들은 “철근콘크리트 황제 폐하!”에 의해 사육된 돼지들이다. 돼지들은 포르노 원룸에 앉아 “벽만 바라보”며 “시간을 백열등처럼 매달아 놓고/불안이 마련해준 특별 방석에 앉”아 “꿀꿀”거리고 있다. 이곳은 창문하나 없이 사벽이 철근콘크리트로 지어진 원룸이다. 

도와달라는 소리 들어본 적은 있나요?

(다들 그렇게 외치니까)

왜 나보고 자꾸만 나를 버리라는 거예요?

엿 같다니까요? 정신과 의사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경찰도 아니면서

이 세상은 후손 거라면서 왜 자꾸 셋방살이하는 기분이 들게 해요?

왜 새벽에 일어나 벽만 바라보라는 거예요?

-『철근콘크리트 황제 폐하!』부분
 

이곳에서 “철근콘크리트 황제 폐하!”는 “기분이 엿 같아 본 적은 없으세요? 도와달라는 소리 들어본 적은 있나요?”라는 소리를 들어도 듣지 않는다. “왜 나보고 자꾸만 나를 버리라는 거예요?”라고 묻게 만든다. 아무리 소리쳐도 대답은 없다. 왜? 꿀꿀거리는 소리만 남았기 때문이다.


속의 아이는 절대 성장하지 않고 징징대고 껄떡거리는데
왜 내가 벽보고 나를 버려야 해요?
내가 어디있어서 나를 버려야 돼요?

-『철근콘크리트 황제 폐하!』부분
 

상징을 제거한 포르노 돼지들의 목소리를 오직 꿀꿀거리는 것뿐이다. 꿀꿀거리며 “징징대고 껄떡거”릴 뿐이다. 이쯤에서 철근콘크리트 황제 폐하!가 바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드러난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전략은 비-주체화로 “서사적 의미를 생성시키지 않고 통일적 신체를 파괴시키고 신체들을 찢어놓음으로서 죽음충동을 부추긴다. 비-주체되기를 강요받고 어떻게 욕망해하는지 훈육 받는다. 그러한 욕망에 길들여져 무력하게 자본주의적 시장 너머로 자신들의 욕망을 바라 볼 의욕조차 들지 않게 만드는 편집증적 체제“이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전략에 포섭된 비-주체들은 “절대로 성장하지 않고” 오직 “벽만 바라보”며 사육되고 있다. 사육된 돼지들의 배역은 전시되는 것이다.  


나는 돼지

노출증 환자 돼지



나는 내 오물을 나의 독자들에게 나눈다



만져봐 이보다 더 부드러울 수는 없어



내가 쓴 것을 돼지처럼 공중에 매달아주세요



뚱뚱보 독재자를 광장에 매달 듯이



(...)
내 입에 커피향이 열릴 때 모르는 얼굴이

모르는 무기를 들고 성큼성큼 내 안으로 들어온다

은박지가 벗겨지자 검푸른 밤하늘에 새콤거리는 발렌타인 데이의 별들

새로 만든 무덤의 얼굴이 소녀의 얼굴처럼 여물어 간다



-『요리의 순서』부분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모든 것을 전시의 강제 아래 복속시킨다. 돼지들은 전시되어야 한다. 발가벗겨진 채로 “노출증 환자 돼지”가 되어 매끈한 삼겹살을 보여주어야 한다. 전시되었을 때에만 가치를 획득할 수 있다. 전시가치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가볍게 무시한다. “전시가치의 관점에서 존재한다는 것 자체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기 못하고 오직 “보이는 한에서만 가치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시가치는 “완성된 자본주의의 핵심”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이렇게 전시되는 사회는 포르노적 사회이다. 모든 것이 겉으로 나오고, 벗겨지고, 노출된다. 포르노적 전시의 결과로 모든 것이 “어떤 비밀도 없이 즉각적인 소비에 내맡겨진” 상품으로 전락한다.  진열대 위로, 광고판 위로 전시한다. “광장에 매달 듯” 전시하고 “공중에 매달아” 전시한다. 전시가치를 생성시키는 것은 그것의 의미가 아니라 연출적 효과에 있다. 시선의 아우라가 제거된 페이스face를 전시하는 북book 은(페이스북) 너you라는 튜브tube로(유튜브) 전송된다. 포르노적 구경거리로 전시하도록 강제하는 자본주의 시선 아래 페이스face는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인스턴트instant하게 ‘좋아요’로 텔레그램telegram(인스타그램)된다. 의미는 죽음마저도 즉각적instant으로 생중계하는 촉각의 속도를 따라올 수 없다. 느려터진 의미의 속도는 ‘좋아요’의 촉각적 속도를 따라올 수 없다. 의미의 고유한 커뮤니케이션은 폐기되고 “이보다 더 부드러울 수 없”는 촉각적인 것이 지배한다. 그것은 직접적이다. 그래서 포르노적이다. 전시될 수만 있다면 벌거벗은 “오물”도 상관없다. 그 “오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 “오물”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중요하지 않다. 전시의 시뮬라르크 속에서 “오물”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어떤 “오물”이라도 전시가치를 인정받는다면 “모르는 얼굴”들이 “성큼성큼 내 안으로 들어”와 ‘좋아요’를 눌러줄 것이다. 이러한 망상을 두고 프로이트는 “편집증은 끝까지 구경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도 맹목적인 믿음으로 그들이 그 자리에 있다고 추정한다””고 한다. 이러한 망상적 믿음은 불분명하게 “모르는 얼굴”들을 기다리게 하며 편집증을 작동시킨다. 철근콘크리트 돼지가 강제하는 전시의 명령 아래 포르노 돼지들은 편집증적 망상에 사로잡힌다. 

우리는 미래의 어느 날 다큐멘터리를 찍는다. 영원히 생존할 자아를 위한 장기 농장 프로젝트 촬영 중이다. 그중에 나는 제일 예쁜 배우다. 이 생각이 내 연기에 최고로 도움을 준다. 나는 당신의 염통이 되려고 길러진다. 나는 당신의 폐가 되려고 길러진다. 나는 당신의 피부가 되려고 길러진다. 나는 당신의 쓸개가 되려고 길러진다. 심지어 나는 당신의 뇌가 되려고 길러진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나는 당신의 눈치를 보면서 얼른 당신의 눈동자를 내 눈동자로 바꿔준다. 

-『돼지가 돼지에게』부분


자본주의는 “영원히 생존할 자아” 중의 자아이다. 영원한 생존을 위해 편집증적 망상을 개발해야 한다. “나는 제일 예쁜 배우다. 이 생각이 내 연기에 최고로 도움을”주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나르시시즘적인 섬과 에고들로 이루어진” 고립을 가속화한다. 이는 상징계와 단절된 상상계가 주체를 지배하는 형식인 편집증이다. 지젝은 “이데올로기는 편집증적 구조”로 본다. 편집증적 망상이 전적으로 타자의 것인 것처럼, “당신의 눈동자를 내 눈동자로 바꿔”서 세계를 구성한다. 철근콘트리트 돼지의 시선이 이제 포르노 돼지의 시선을 완전히 장악한다. 나는 이제 “당신의 염통이 되려고 길러진다. 나는 당신의 폐가 되려고 길러진다. 나는 당신의 피부가 되려고 길러진다. 나는 당신의 쓸개가 되려고 길러진다. 심지어 나는 당신의 뇌가 되려고 길러진다.” 편집증적 망상은 전적으로 타자(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것이다. 

내가 완전히 당신이 되는 날, 예예 주인님 내 염통이 당신에게 가서 인사하는 날을 상상해본다. 그런데 고깃덩어리만 남은 내가 내 얼굴을 알아볼까? 당신은 연두색 형광조끼를 입고 와서 내 사지를 묶어서 질질 끌고 간다. 당신은 내 간, 당신은 내 콩밭, 당신은 내 심장, 당신은 내 눈알, 당신은 내 피부, 간절히 울부짖어도 당신은 내가 당신인 줄도 모르고 나를 끌고 간다. 곤봉으로 가끔 쑤셔대면서 간다. 당신은 돼지 사찰 모독 횡령 고문 협박으로 감옥에 가야 한다. 당신은 나를 이런 암덩어리 하면서 침대보다 작은 우리에 처박는다. 

-『돼지가 돼지에게』부분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사찰 모독 횡령 고문 협박”으로 포르노 돼지들을 “침대보다 작은 우리에 처박는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우리는 돼지로 키우고, 돼지로 가두고, 돼지로 살게 하며, 돼지의 표정을 짓게 한다. 편집증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신체를 갈갈이 찢어놓음으로서 죽음충동을 부추긴다. 이렇게 길러진 돼지는 벌거벗겨진채 “고깃덩어리만 남은 내가 내 얼굴을 알아볼까?”라는 질문 앞에 선다. 아니. 아니. 전혀 알아 볼 수 없을 것이다. 또 다시 포르노가 시작 될 것이다. 분명하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포르노를 계속해서 상연하며 돼지를 또 다시 가둘 것이다.



4. 돼지 유령이 찾아왔다

무음 청소기로 소리를 모두 빨아들인 것 같은 방 안

이름 모를 나무의 이파리들이 흐릿한 커튼을 어루만지는 방 안


(...)

하루 종일 제가 낳은 똥만 바라보면서 똥을 질질 싸는 선


(...)

나는 돼지인 줄 모르는 돼지예요

나는 돼지인 줄 모르는 선생이에요

매일 칠판에 구정물만 그리죠

나는 몸 안의 돼지를 달래야 하는 환자예요

그러고도 사람들 몸 안에 좌정한 돼지만 보여요

하루만 걸러도 냄새 진동하는 이 짐승을 어찌할까요

하루만 먹이지 않아도 꽥꽥 소리를 지르는 이 돼지를 어찌할까요


(...)

나는 돼지인 줄 모르는 돼지예요

두통이라는 뚱보 여자예요

구토라는 뚱보 여자의 그림자예요

날개도 없는 검은 기름가방이예요

제 몸을 제가 파먹는 돼지예요

-『돼지선』부분


포르노 원룸에 살고 있는 도착적 자아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라는 편집증적 방주인에게 월세를 꼬박꼬박 내며 이상적 자아를 유지한다. 방은 안락하고 제법 괜찮은 편이다. 단, 돼지로 머물러만 있다면 창문 없는 원룸이라도 꽤 괜찮은 편이다. 원룸 안에는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상연되는 포르노-모니터도 있다. 월세가 좀 밀려도 방 빼! 하지 않는다. 게다가 지루하지도 않다. 이 정도면 “돼지라서 괜찮아”라고 말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오히려 ‘돼지라서 다행이야’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하지만 “무음 청소기로 소리를 모두 빨아들인 것 같은 방안”인 포르노 원룸에도 “이름 모를 나무의 이파리들이 흐릿한 커튼을 어루만”질 때가 있다. 그것은 이 생활이 모두 끝날지도 모른다는, 공포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이다. 타자의 응시가 내 안으로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나는 돼지인 줄 모르는 돼지”라는 타자의 관점을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 타자의 관점에서 나는 “몸 안의 돼지를 달래야 하는 환자”이고 “두통이라는 뚱보 여자”이고, “구토라는 뚱보 여자의 그림자”로 보여질지도 모른다는 공포 말이다. 그런 이미지의 원초적 이미지들 속에서 결국 스스로 “제 몸을 제가 파먹는 돼지”라는 걸 인정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거세-공포 말이다. 포르노 원룸의 문틈으로 나란히 누운 한 줄기의 빛(시선)이 내가 돼지인 줄 모르고 있는 돼지라는 것을 비추어주는 거울 밖의 실재와의 조우한다. 


우리는 돼지로 돌아온다
먹고 싸는 이 돼지 자석에 철컥 달라붙는다
(...)
우리는 뜨거운 돼지로 돌아온다
마지막 배역을 맡으러 돌아온다


-『마릴린 먼로』부분 


실재와의 조우는 “유령적인 환영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상징적인 소통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곳에서, 즉 세계가 실패한 곳에서 출현”한다. 유령의 귀환은 “먹고 싸는 이 돼지 자석”으로 상징적 채무가 아직 청산되지 않은 지점에서 “돌아온다”. 상상계의 거울 속에서만 머무르려고 고집을 피우고 있는 거울이미지의 자아가 상징계로의 진입에 실패했던 곳에 “돼지로 돌아온다”. 상징화에 저항하는 수수께끼 같은 그곳에 실재가 놓여있다. 실재와의 조우에서 “일어나는 충격적인 쇼크는 자동인형처럼 움직이던 주체를 탄생시키고 어떤 간극을 여는데, 주체를 이를 상징화하려는 (궁극적으로 실패할) 노력들로 이 간극을 자유로이 채워 넣게 된다. 자유란 궁극적으로 외상적 마주침에 의해 개방된 공간에 다름 아니며 그 공간은 주체의 우발적/ 부적절한 상징화들/ 번역들로 메워지게 된다.” 상상계의 자아는 다시금 자신이 실패했던 증상(Sypmtom)의 문고리를 잡는다. 그리고 드디어 거울 밖으로 (쫓겨나듯)나간다.

오 더러운 년 간다

두들겨 맞고 간다

오 눈부신 망할 년 간다

도망간다

오 검게 반들거리는 시궁창 같은 년 간다

내뺀다


저년을 막아! 회초리를 든 사람들이 몰려온다

나혼자 살게요

버림받은 년
돼지 같은 년
달아난다

(...)


더러워 더러워 더러워 나 참 더럽네

그냥 꿈속에서 살걸 여긴 왜 왔을까

죽어라 돼지
너 왜 젖 먹니
너 왜 자라니

나 같으면 안자라겠다

주인님 오셔서 손가락 얼마나 굵어졌나

살은 얼마나 피둥거리나 만져보는데

나 같으면 안 자라겠다

오 그리운 돼지가 간다
쫓겨간다


오 한 여자가 돼지를 나가려고 한다


건들지 마 건들지 마
돼지를 건들지 마
더 이상

반토막난 흑돼지

그림자가 그녀에게 매달려 간다



-『지뢰에 붙은 입술』부분 


거울 밖의 타자(언어)의 세계는 괴물들로 가득하다. “회초리를 든 사람들”이 뒤쫓는다. 쫓기는 죄목은 “돼지를 나가려고” 한 것이다. 돼지(거울)의 바깥으로 나가려고 한 것일 뿐인데 뒤쫓는 사람들은 말한다. “그냥 꿈속에서 살”지. 응? “나 같으면 안 자라겠다”. 응?. 거울 안에서 살을 피둥피둥 찌우며, 손가락을 굵게 만들어준 주인님의 시선 아래서 살아가면 돼지? 왜 나가려는 거야?. 응? 거울 밖을 나가려고 하자마자, 고통스러운 타자의 시선들이 시작된다. 포르노 원룸 밖으로 나가려고 했던 것뿐인데, 방주인(이데올로기)은 매몰차게 뒤쫓는다. 뒤쫓기 때문에 달아난다. 뒤쫓지 않았으면 다시 방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는데 쫓아오기 때문에 달아난다. 맹렬히 달아난다. 포르노 원룸으로부터 달아나는 “반토막난 흑돼지/ 그림자가 그녀에게 매달”고 가야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야 한다. 


떠나면서 돌아본다
구름 같은 나를 담은 자루를
변덕 많은 그림자를 기수처럼 태우고
검은 땀 흘리다가 이제야 다리를 꺾는 돼지 한 마리를
나에게 어울리는 맞춤복은 아니었지만
벗어놓은 열 가락 살 장갑과 열 가락 살 양말
그위에 작은 창문처럼 손톱과 발톱
그 창문 뒤에서 내다보는 한 사람
깨우는 약
재우는 약
나가는 약
토하는 약
약 먹고 토하는 약

죽은 느낌표처럼 쓰러진 몸을 흰 천에 싸서 남겨두고 이제 떠난다

저것을 벗고 떠도는 것이 또 나라고 굳게 믿으면서


-『구천무곡』부분

 
돼지는 떠난다. “떠나면서 돌아본다” 돌아본 그곳에는 나에게 맞춘 듯 딱 맞다고 상상했던 것들이 “나에게 어울리는 맞춤복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벗어놓은 열 가락 살 장갑과 열 가락 살 양말”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한 때는 나의 것이었으나, 지금의 지금은 나의 것이 아닌 것들을 바라본다. 그것은 거울의 “창문 뒤에서 내다보는 한 사람”에 의해서 투여되었던 “깨우는 약/ 재우는 약 /나가는 약 /토하는 약 /약 먹고 약 토하는 약”으로 인해 느낌표조차 “죽은 느낌표”가 되어버린 곳이었다. 이제 떠날 시간이다. 떠나기 위해서는 “저것을 벗고 떠도는 것이 또 나라고 굳게 믿으면서” 떠나야 한다. 믿어야 한다. 거세공포를 넘어서 자기각성의 전율로 이행한다. 안녕, 거울들아. 안녕, 돼지들아. 안녕. 안녕. 안녕. 내 것이지만 내 것이 아니기도한 것들아. 안녕. 내 것이었으면 했으나 단 한 순간도 내 것이 될 수 없었던 것들아. 안녕. 안녕. 안녕. 이제 “쓰러진 몸을 흰 천에 싸서 남겨두고 이제 떠난다” 안녕. 꿈속에서나 만나자. 



5. 저게 나야, 저 얼룩진 얼굴말야

몸 버리고 가라는데 몸 데리고 간다
돼지 버리고 가라는데 돼지 데리고 간다

꿈속에서 나가
이제 그만 새나 되라는데
몸속에서 새가 운다

이제 그만 안녕 너 없이도 살 수 있어

돼지가 따라온다

내가 바로 저 여자야
못생기고 더러운 저 여자
배 속에 가득 망각이 들어찬 저 여자
머릿속에 토사물만 가득 든 여자
지나가던 소녀가 침을 탁 뱉는 바로 저 여자
길거리 모퉁이에 서 있으면 모두 달아나버리는 저 여자
무서운 아저씨들의 장화 밑에서 우글거리는
글의 집은 너무 좁은데 피할 줄도 모르는
떄 묻은 얼굴이야 더러운 엉덩이야 피 뭍은 발톱이야
날 데리러 오는 장의차 소리는 귀신같이 아는 바로 저 여자야
무서워서 먹고 무서워서 소리치고 무서워서 또 먹는 바로 저 여자야
나는 입술에 붙은 밥통이야 뱉은 걸 먹고 싼 걸 먹는 바로 저 여자야
역겨운 여자 냄새나는 여자 미친년 맞는 년
내가 접시에 누우면 맛있는 소스라도 발라서 구워줄래?
못생긴 여자야 하루에 한 움큼씩 항우울약 먹는 여자야
네가 나를 사랑해주겠다고 동정해주겠다고 그러지만
나 돼지야
그런데 한마디 덧붙이자면 나 재미있는 돼지야
나는 이렇게 생신 비밀이야 유머가 터질 듯해서
아들이이 운동장에서 차고 놀 수 있는 오줌보야

돼지 한 마리가 산문을 나서는 나를 멀찍이 따라온다
36도 5부 방에서 나왔으니 춥겠지? 냄새나는 코트들고 따라온다 

기쁘다 돼지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산문을 나서며』전문

거울을 떠난다. 벽을 떠난다. “이제 그만 안녕 너 없이도 살 수 있어” 하며 떠난다. 떠나면서 버린 것을 “데리고 간다”. 데리고 가지 않아도 “따라온다”. 상징계의 언어란 그런 것이다. 떠나면서도 동시에 데리고 가야하는 것이다. 돼지는 기존의 자신을 배치하던 상징적 질서와 단절하는 주체로서 떠난다. 돼지를 돼지로 만들던 그 상징적 배치를 뚫고 나가려고 한다. 포르노적 원룸에서 풀려난 돼지는 나르시시즘적 매끈했던 얼굴에서 “때 묻은 얼굴”을 마주한다. 카프카가 더러운 “아버지의 이름”을 받아들이면서 상징계로 들어설 수 있었던 것처럼 돼지도 자신의 오점을 받아들이면서 주체로 도약한 것이다. 돼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면역화된 안전한 돼지우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돼지를 끝까지 밀어붙여서 돼지로서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하는 것의 공허함을 받아들이는 것. 즉, 대타자의 응시 아래서 “못생기고 더러운” 모습으로 보여질까봐 두려워하는 돼지에서 그래 “나 돼지야”로 이행하는 것. 그래서 얼룩진 나의 돼지들을 데리고 “산문을 나서는” 것. 대타자의 관습적인 “36도 5부”의 온도에서 나와 “어떤 대타자도 없는 공포”의 온도로 이행하는 것. 그것은 거울 밖으로 걸어 나가면서 거울을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거울의 부정성을 “냄새나는 코트”처럼 껴입음으로서 헤겔의 “부정적인 것에 머무르기Verweilen bei Negative”에 이른다.
헤겔은 “정신은 부정적인 것과 정면으로 마주하며 그것에 머무를 때에만 정신은 위력으로 된다. 이러한 머무름이야말로 부정적인 것을 존재로 전환시키는 마술적 힘”이라고 한다. 이 때에 “부정적인 것”은 추상적이고 단순한 자기관계로서의 정신(친숙한 세계)을 깨뜨리는 타자(부정적인 것, 모순, 분열)를 뜻한다. 단순한 자기관계와 부정적인 것이라는 서로 대립하는 두 계기의 모순적 공존 속에서 “정신의 자유는 한낱 타자 밖에서 얻은 자립성이 아니라 타자 안에서 타자로부터 얻어낸 자립성이며, 타자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타자를 극복함으로써 실현”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부정적인 것에 “머무르는 한에서만 정신은 위력을 발휘”하며 그것은 “죽음을 감내하고 절대적 찢겨짐을 견뎌내는 정신, 조화롭고 평화로운 안식의 세계를 파괴하는 낯선 것에 대해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대면하는 정신의 힘”을 두고서 “부정적인 것에 머무르기”라고 명명하였다. 이를 통해서 새로운 세계/주체를 창조하는 정신이 바로 헤겔의 주체이다.   
김혜순의 돼지들은 오물을 뒤집어 쓴 주체로 탄생한다. “내가 바로 저 여자야
못생기고 더러운 저 여자 (...) 머릿속에 토사물만 가득한 여자 (...) 때 묻은 얼굴이야”로 가득한 주체는 근원적인 상실과 불가능한 회복을 끌어안은 채 변증법적으로 형성해나가는 돼지-주체이다. 그 주체는 말한다. “나 돼지야
그런데 한마디 덧붙이자면 나 재미있는 돼지야
나는 이렇게 생긴 비밀이야”. 비밀 없음의 포르노에서 이제 비밀이 생긴 주체이다. “영혼을 가진다는 것은 비밀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키냐르의 말에 따라 돼지-주체 영혼이 생겼다. 포르노적 벌거벗음 속에서 울부짖는 교성이 비밀의 말을 가지면서 “유머”를 구사하기도 한다. 새롭게 탄생하는 돼지. 그 돼지를 두고 “기쁘다 돼지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라고 환호를 질러도 되지 않겠나. 



6. 나서며 

쓰레기는 일견 가난한 자, 이방인, 고아, 난민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들이 스스로 쓰레기가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의 얼굴은 내가 비참하게 버려졌을 때, 죽음에 다가갔을 때, 국가의 무기력함으로 지뢰처럼 터지는 재앙들 앞에서 목격한, 마주한 이웃의 얼굴이며, 나의 국가 공동체 혹은 가부장제의 폭력 앞에서 내가 감당한, 나를 둘러싸고 있는, 바로 나 자신의 구멍인 어둠이다.

-『여성, 시하다』부분

김혜순의 15편의 돼지 연작시의 구성은 몽타쥬적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몽타쥬가 서사에 개입하여 알레고리를 생성해내는 반면 이 돼지 연작시 15편은 그야말로 포르노적이다. 돼지의 시선과 돼지 아닌 것들의 응시가 겹쳐있다. 돼지와 다른 돼지들은 딱히 구별되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 가까이(도착증) 있거나, 너무 멀리(편집증)있다. 그래서 파편적이고 부분-대상적이다. 그것은 15편의 연작시의 시적 주체들이 모두 거울에 반사된 시선-들의 포르노적으로 겹쳐있기 때문이다. 타자의 시선이 침범하지 못하는 시적 공간을 만들게 되면서 김혜순의 돼지로 접근하면 접근 할수록 돼지와 독자사이의 간극은 너무 가까워지거나, 너무 멀어진다. 15편의 연작시는 알레고리를 생성하기 보다 오히려 알레고리를 분산시키면서 포르노의 형식을 가지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형식이야 말로 오늘날의 돼지들의 형식이 아닐까.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새로운 주인-기표를 향한 욕망을 차단시켜 무력하고, 냉소적인 얼굴 속에서 인간의 표정을 지워내는 이 세계와 작별을 고하며. 김혜순의 돼지-주체는 상품 형태로 전시를 강제하는 이데올로기에 맞서 “안죽은(undead) 부분대상의 형태로 고집스레 지속되는 충동의 노래”들을 부른다. 

있지, 조금 있다 고백할 건데 나 돼지거든 본래 돼지였거든”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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