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 : Cosmic Charlie's Dark Star
록 구성체의 역사에서 가장 강도높은 탈영토화 운동은 67년 샌프란시스코와 76년 런던에서 발생했을 것이다. 우리가 각각 사이키델릭 록(psychedelic rock)과 펑크 록(punk rock)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운동. 두 운동에 대한 비교평가는 평론가와 팬들의 태도를 결정하는 중요한 테마였다. 1967년 하이트 애시베리에서 3분 분량으로 레코딩된 곡 <어두운 별 Dark Star>(Live/Dead, Warner, 1970)를 20분이 넘는 시간 동안 즉흥연주(Improvisation)하는 그레이트풀 데드의 기계에 포섭되어 황홀경에 빠져들 것인가, 아니면 1976년의 런던의 101클럽에서 로봇같은 비트의 광적인 리듬과 '반(反)가창(anti-singing)'이라고 부르던 백색 소음(white noise)25) 속에 빠져 들 것인가.
나는 해묵은 문제,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미 지루하고 피곤해진 문제를 다시 던지는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러저러한 이유를 들면서 어느 한쪽이 '우월'하고 다른 한쪽이 '열등'하다는 진부한 해석을 내리고 싶지는 않다(이는 국내외의 많은 '소장' 록 평론가들의 결론이다). 60년대 후반의 정세에서는 싸이키델릭 록이 정당했고, 또 70년대 후반의 정세에서는 펑크 록이 상황적으로 정당했다는 '역사주의적' 해석도 내키지 않는다(이는 많은 개명한 '노장' 평론가들의 결론이다). 문제는 두 운동의 양태와 성격의 차이를 논하는 것이다. 두 운동의 귀결의 차이는 이를 논한 다음에야 평가할 수 있는 문제이다.
단정적인 느낌이 없지 않지만, 히피들의 사이키델리아는 우주로 개방되는 절대적 탈영토화 운동의 외양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주마저 새로운 대지로 재영토화한 듯하다. 사이키델릭 록에서는 SF식의 외계의(extra-terrestrial) 테마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 테마는 특히 지미 헨드릭스 Jimmy Hendrix와 (초기의) 핑크 플로이드 Pink Floyd에서 많이 등장했다.
히피들의 '혁명'은 흔히들 60년대의 급진적 운동들이라고 불리는 갬퍼스 내에서의 지성의 자유를 위한 투쟁,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 흑인 민권운동과의 연대반전운동, 흑인민권운동과의 연대투쟁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들의 '총체적' 혁명은 현재의 체제를 일거에 부정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정신적, 문화적, 정치적 차원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었다. 이 혁명은 생활양식 되기(becoming life-style)'였고, 적어도 관습적 의미로 볼 때는 탈정치화된 것이었다. 혁명이 이루어지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체험되는(lived) 것이 필요했다.
주목할 것은 이런 경험들, 예를 들어 섹스, 드럭, 록 음악을 통한 '여행(trip)'이 신체적 감각의 찬양으로 그치지 않고 두뇌 속에서의 질서를 필요로 했다는 점이다. 한 문화연구자의 말을 들어보자. "이런 경험들의 '진정성'은 다른 지도들을 사용하면서 발견되었다. 그 지도들은 현대 산업사회의 혼돈된(entropied) 의식 외부의 영토들에 속하는 것이었다 : 동양, '어머니 지구(Mother Earth)'의 리듬들, 내부의 혹은 외부의 스페이스". 26)
그런데 이들의 사이키델리아가 외부를 향해 개방되는 운동은 '잃어버린' 아메리카를 발견하려는 귀환운동을 동반했다. 즉, 유럽화되고 산업화된 아메리카가 아닌 "본래의(original), 태고의(archaic) 아메리카"27)가 '진정한' 아메리카로 부상했다. 아메리카 인디언, 카우보이, 비트, 힙스터가 새로운 조명을 받았고, 집단으로 숙식하던 히피들의 공동체 생활은 아메리카의 농촌공동체의 생활양식을 추종하는 것이었다. 도시, 그리고 산업 문명으로부터의 집단적 탈주는 대지의 심층으로 깊숙이 스며드는 은둔의 동전의 양면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사이키델릭 록에 등장하는 히피들은 영웅들이다. 바그너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은 방랑하는 아메리칸으로 대체된다. 차이가 있다면 전자가 고독하고 비극적인 반면, 후자는 유쾌하고 희극적이라는 점이다.28) 대지의 구심작용을 통해서만 탈영토화하는 바그너의 주인공들(Hero)과 달리 그레이트풀 데드의 주인공들은 외부로의 개방을 통해서만 재영토화된다. 우주는 새로운 대지가 된다. 록은 엄마를 찾아 헤매는 아이의 송가가 된다.
<어두운 별>에서 전기 기타의 연음 사이로 비집어진 탈코드화의 틈, 이 틈은 어머니를 찾는 소년이 방랑하는 환경이었다. 그렇지만 이 균열은 곧 폐쇄회로 속에 들어갔다. 하드 록의 '파워풀'한 리프(riff)로, 아트 록의 '테크니컬'한 키보드 솔로(solo)로의 성인 남성의 욕망으로의 전도. 그리고 스튜디오와 경기장이라는 대지 없는 영토로의 이상한 안착.
1976 : Holiday in Black Hole Sun
섹스 피스톨스의 펑크는 '아무 생각 없는' 운동으로 보이고 그들의 시선은 '영국'이라는 영토를 떠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펑크는 싸이키델리아보다 더욱 강도높은 탈주선 위에서 운동했다. 펑크는 구축해야 할 질서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펑크 역시 '라이프 스타일'이었지만, 펑크의 라이프 스타일 되기는 '진정한' 영토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카오스로 빠져드는 것이다. 섹스 피스톨스의 한 멤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실은 우리는 음악에 빠져드는 것이 아니죠. 그럼 뭐냐구요? 우리는 카오스에 빠져 드는 겁니다". 29)
펑크의 음악적 특징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글에서 언급되었으므로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른바 DIY(Do It Yourself)의 에토스로 만들어진 3분짜리 싱글 레코드는 "수공된 원자폭탄"(MP, p.426) 이라는 들뢰즈.가타리의 표현에 어울릴 것이다. 펑크에는 로큰롤의 뿌리인 아프로-어메리컨 음악 특유의 굴절된 비트가 주는 그루브한 리듬감조차 없다. 그렇지만 박자는 균등하게 세분되어 있는 반면, 리듬은 들뢰즈.가타리의 기계처럼 반복의 운동을 전개한다. 중요한 것은 유연한 '라인'이 없이도 아주 뾰족하고 매끄러운 선을 만들어내는 모노톤(monotone)의 목소리로 인해, 피스톨스의 음악은 노이즈로 함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린아이처럼 소박한 치한 선율적 풍경으로 모든 것을 포착하고자 하는 단순한 선. 섹스 피스톨스의 펑크는 그레일 마커스(Greil Marcus)의 표현처럼 "현대 사회의 전체주의적 동결에 대한 반응"30)이었다. 전체주의적 자본주의의 권태로운 리토르넬로에 대해 반대하는 카오스가 펑크의 리토르넬로였을까. 아니 펑크는 모든 리토르넬로의 파괴에 가까웠다.
방금 지적했던 논점으로 돌아가 보자. 후대의 많은 사람들은 모든 것을 부정하려고 했던 피스톨스가 정작 특유의 '영국성(Englishness)'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31) 그들도 결국 '영국의 무정부상태를 의도했고, '여왕을 보살피라고?'라고 비아냥거렸을 뿐이라고. 그렇지만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 '부정' -- 물론 이 말 앞에는 '순수한', '허무주의적'이라는 수사가 동반된다 -- 이라는 용어는 운동을 의인화한 시선 아닐까? 섹스 피스톨스는 조건을 무시하는 정서적 투여를 수행했을 따름이다. 둘째 영국성에의 집착은 국지적인 운동이 마치 눈덩이를 굴리듯 분자적으로 운동하면서 초래한 카오스를 고려한다면, 그들의 '의도'를 지나치게 강조한 해석이다. 영국성이라는 영토는 급격히 탈영토화된다. 섹스, 사랑, 가족, 계급, 자본주의가 차례로 이들이 쏜 총알에 난사당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구 근대사회의 비밀인 '진보' 개념이 운동의 바퀴에 깔렸다. <신이 여왕을 보호하사 God Save the Queen>(Virgin, 1977)의 종반부의 "미래는 없어 No Future"라는 반복된 절규는 절대적 탈영토화 운동이다.
그런데 유심히 들으면 "No Future"라는 코러스의 기계적 반복 중간에는 "For You"라는 가사 뿐만 아니라 "For Me"라는 가사도 들어 있다. 리토르넬로의 탈영토화는 블랙 홀에 마주한다. 그들의 마지막 싱글 레코드 <휴일 속의 태양 Holiday in the Sun>(Virgin, 1977)에서 조니 로튼은 베를린 장벽을 넘어서 나찌의 학살 캠프로 가려고 한다32) 음악이 반복되면서 그는 백색 장벽(white wall)을 넘어 검은 구멍(black hole)으로 빨려 들어간다. "부디 나를 기다리지 마"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노이즈의 장벽(wall-of noise)은 반복의 가능성을 무화시킨다.
들뢰즈.가타리는 "시인으로 살 것인가, 암살자로 살 것인가"(MP, p.427)라고 물었다. 그런데 조니 로튼은 시인도 암살자도 아니다. 그는 공공연한 연쇄살인자로 등장한다. 군주제를 "파시스트 레짐"이라고 묘사했던 그들은 이제 스스로 파시스트의 색채로 등장한다. 미학적 테러리스트는 마지막으로 스스로에게 테러를 가한다. 펑크의 탈영토화된 리토르넬로에서는 더 이상 반복의 원천이 사라진다. 모든 것을 권총의 탄창 속에 쑤셔 넣든가, 아니면 총탄을 난사하여 모든 선들을 지워 버린다. 이 모든 것은 9개월이라는 극히 짧은 시기 동안 발생했다. 펑크는 연속적 시간이 아니라 특정한 순간(moment)이었다. 순수한 생성과 순수한 소멸의 카오스는 그자체의 황홀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에 상응하는 혹은 그를 압도하는 공포를 동반한다. 카오스와 질서 사이에 발생하는 마법(magic)은 부재했다. 펑크는 모든 욕망이 등록되는 부재의 표면이었다.
들뢰즈.가타리는 아방 가르드 음악이 곧잘 "아이, 광인, 소음"에 고착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들은 존 케이지만을 언급하고 아방가르드 팝 음악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프리 재즈, 노이즈 록(헤비 메탈?)의 일부도 그 사정권 아래 있을 것이다. 파시스트를 무력화시키는 것은 아이같은 간결성을 가진 미니멀리즘(minimalism)이다. 그런데 펑크의 미니멀리즘은 스스로 파시스트를 닮아 버렸고, 블랙 홀의 균질적 공간으로 흡입되었다(블랙 홀은 균질적일까? 아무튼 이질적인 것들이 모두 빨려들어간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남은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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