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으로서의 현대성 그리고 도시인상학 _ 김성윤

기억으로서의 현대성 그리고 도시인상학 

― 벤야민이라는 모호한 대상

김성윤





2. 역사의 발견 ― 부단히 현재적인 역사


(1) ‘체험’과 ‘경험’의 이중주

군중이 도시를 체험하고 경험한다고 했을 때, 우리가 눈여겨 볼 것은 ‘체험’과 ‘경험’ 사이에 존재하는 특정한 계기들이다. 우리말(화된 언어체계)에서 체험은 體驗 즉 몸으로 증험한다는 의미를, 경험은 經驗 즉 그 증험한 바를 새로운 방식으로 직조하고 다룬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5)그런 면에서 경험은 ‘지혜, 완숙함, 경륜’ 등의 함의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구분은 영어보다는 독일어에서 더 잘 확인된다. 영어의 ‘experience’는 ‘시험, 시도, 실험’의 뜻이 대부분을 이루는 것으로서 그 근간에는 실험과 측정을 통해 검증한 경험적, 과학적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반면 독일어는 ‘Erlebnis’, ‘Erfahrung’으로 그 의미가 구분된다.6) Erlebnis는 특이한 방식으로 흔적을 남긴 우연한, 갑작스런 사건을 겪는, 순간적이며 충격적인 체험으로 정의된다. 반대로 Erfahrung은 실천적, 반복적, 일상적 노동에 의해 어떤 것을 체득하게 되는 것, 일상적인 삶의 지속을 통해 얻는 깨달음 및 ‘지혜’의 뜻을 강조한다. 이러한 구분은 다음의 <표>와 같이 재정리될 수 있다.

체험 Erlebnis

경험 Erfahrung

몸으로 증험(證驗)

새로운 방식으로 직조하고 다룸

(지혜, 완숙함, 경륜)

우연적, 순간적, 충격적, 짜릿함

실천적, 반복적, 체득적, 깨달음

보다, 접하다, 봐서 알다

듣다, 전해 듣다, 들어서 알다


그렇다면 소설과 ‘경험-체험’의 대조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벤야민은 「얘기꾼과 소설가」에서 전통적인 설화나 민담을 전해주는 ‘이야기꾼’의 세계와 근대 대도시의 책 시장을 겨냥해 글을 쓰는 ‘소설가’를 대조하며, 이야기꾼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경험’을 다루는 데 주목한다. 반면에 도시를 중심으로 한 근대 인쇄문화의 산물인 소설은 이러한 구전적 전통이 단절되는 것을 기본 요건으로 삼는다. 이 둘 사이를 가르는 기준은 바로 경험을 전달해주느냐의 여부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벤야민에게 근대 소설의 등장은 생활에 배어있는 전통이 사라지는 것이며, Erfahrung의 세계가 쇠퇴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가령, 이야기는 듣고 말하는 이가 사건-텍스트의 저자로 참여해 하이퍼텍스트를 확대재생산하는 반면, 소설은 ‘고독한 개인’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그러한 경험의 계기들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 이유로 그의 글쓰기는 근본적으로 ‘이야기’를 지향한다. 그에게는 사건이 체험화되고 이 체험이 경험화되는 특정한 양식이 중요시된다. 궁극적으로 사건에 체험과 경험이 덧붙여지지 않는 것에는 역사적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건에 체험과 경험이 맞물리는 것만으로는 긍정적인 의미가 획득될 리는 없다. 만약 사건-체험-경험의 계기들을 우연적으로만 내몬다면, 벤야민이 작업한 도시적․시적 이미지들은 단순 나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브에 관해서」라는 논문에서 이러한 곤경으로부터 탁월하게 탈출한다. 그는 인간의 기억을 두 가지 층위로 나누어서 생각한다. 첫 번째는 베르그송과 프루스트를 빌린 것으로서 순수기억과 종합기억에 관한 것(베르그송), 그리고 무의지적 기억과 의지적 기억에 관한 것(프루스트)이다.(Benjamin, 1983: 122) 다분히 프로이트적인 것으로 이해할 만한 이 기억의 문제설정을 통해, 그는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영역에 의해 인간의 의식활동이 지배받고 있음을 간파하고 있다. 따라서 벤야민에게 ‘체험과 경험’은 기억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지닌 속성을 거쳐 ‘인지와 개념화’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경험이라는 것은 여전히 사적이다. 이것은 두 가지 난점을 야기하는데, 첫째 경험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결코 우연적인 요소에만 국한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문이고, 둘째 경험의 사적인 성격은 인간이 자신의 경험 속에 외부의 사실들을 동화시키고 있는 실제적 현실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게 한다. 따라서 벤야민의 ‘경험’이 의미 있기 위해서는 이 경험이 사적인 차원을 벗어나야 한다.

이것이 바로 벤야민이 발견한 인간 기억의 두 번째 층위에 관한 문제이다. 벤야민은 체험과 경험의 경계선을 명확히 긋기 위해 경험에 들어가 있는 커뮤니케이션적 가능성에 착목한다. 예컨대 ‘똥간’에 빠진 단순 체험은 그 자체에선 기억 속에서조차 잊힐 법한 성격의 것이지만, 이것이 인간의 회상과 기억해내기(Erinnerung)를 거친다면(물론 이 기억은 의지적일 수도 무의지적일 수도 있다),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하는 경험의 것으로 전화한다. 왜냐하면 벤야민이 보기에 이 ‘기억해내기’의 계기라는 것은 ‘종합적 기억’(Gedächtnis)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서도 의문점은 남는다. 종합기억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경험의 교류를 통해 나온 것이므로, 이것은 언제나 가상적인 속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이란 결국 왜곡된 체험과 경험을 공유하는 것에 불과한 일이 된다. 이것은 분석적으로 합당할 수는 있어도, 정치적으로는 다분히 부족함이 많은 설명이다. 그런데 여기서 벤야민은 종합적 기억이라는 것에 언제나-이미 순수기억의 계기 역시 포함되어 있다는 구도를 설정한다. 프루스트를 인용하면서 그는 “이들 사지 속에 저장되어 있는 기억의 이미지들을 끊임없이 얘기하면서 이러한 기억의 이미지들은 의식에 조금도 속하지 않으면서도 느닷없이 그 의식 속으로 침입해 들어온다.”고 설명한다. 기억의 이미지들에 대한 끝없는 분출 과정에서 의식적으로 체험되지 않았던 것, 즉 주체가 ‘체험’으로서 겪지 않았던 일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주목하는 ‘무의지적 기억’의 과정이다. 객관적으로 존재했던 사건이지만 체험되지 않았던 것, 그래서 의지적으로는 기억될 수 없는 것, 이것이 바로 벤야민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지향점이자 글쓰기의 목적이며 메시아적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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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보다빠르게미래로달아나라 -이상,삼차각설계도 중에서